"참여연대, 새롭게 더 가까이 시민 곁으로 가겠습니다"
시민교육 :
2007/02/28 17:41
[참여사회 3월호-박영선이 만난 사람] 김민영 참여연대 신임 사무처장
참여연대 정관 제32조(사무처장은 집행위원회에서 추천하여 운영위원회에서 인준하며 임기는 2년으로 하고 연임할 수 있다)에 의거하여 2007년 2월 15일 운영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김민영 협동사무처장이 신임 사무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김민영 사무처장은 오는 3월 3일 참여연대 정기총회일부터 사무처장직의 임기를 시작할 것입니다. 편집자주
김민영 참여연대 신임 사무처장

김민영 참여연대 신임 사무처장. 그는 무슨 생각으로 초청장을 보냈을까? 왜 위키피디아였을까? 위키피디아는 전 세계 200여 개국의 창의적인 집단지성들이 자유롭게 항목을 구성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오픈 인터넷 백과사전이다. 집단지성의 한 예로 삼을만한 네이버 지식인엔 위키피디아가 최근 검색 항목 100만 개를 돌파했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다(백과사전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브리태니커의 검색항목은 10만 개라고 한다). 초청장 하나로 그가 사무처장으로서 구상하는 참여연대 운영방향의 일단을 눈치 챘다고 하면 성급한 것일까? 하지만, 내게 위키피디아를 주제로 졸음과 약간의 시장기에 시달리는 시간에 먹을거리를 제공하며 브레인스토밍을 제안한 초청장은 그의 속종의 결정판이다.
대중과 공감하는 현장 운동 펼쳐야

“권력형 부패와의 싸움이 지난 10여 년간 중요했죠. 시민 대다수의 지지를 통해서 제도를 바꾸고 그걸 통해서 이익을 향유했던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참여연대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운동이라 생각하는데, 우리가 잘 모르는 사이에 권위주의 독재체제에서 시장만능주의, 승자독식경쟁으로 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바뀌어버렸어요. 우리가 착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한마디로 정치를 개혁하면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참여연대가 “관성적”으로 활동하여 “앙상”하며 결과적으로 “왜소화”되었다고 했다. 새로운 운동과제와 운동방식으로 시작한 참여연대가 점점 낡아 정책과 입장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조직이 이울고 있다고 진단했다면, 변화와 혁신은 당연한 수순. 하지만 그는 함부로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혁신이란 말이 어느 틈에 구태의 상징이 되어버린 걸 그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그는 묵은 조직을 바꿔 새롭게 한다는 혁신이란 말의 고갱이를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참여연대 안의 다양한 고민을 토로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참여연대 활동방식이 유형화 되고 있어요. 정책 대안을 생산해서 입법화하기 위한 정책로비와 성명, 논평을 내는 방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과거에는 하나의 문제를 사회 이슈로 만들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종합적으로 이뤄졌다면, 지금은 참여연대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부분에만 주력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대중들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둔감해지는 문제가 생겨요. 현장에서 문제를 발굴하려 하지 않고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 정책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것들만 다루려는, 어떻게 보면 앙상한 운동만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는 “정치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입법화의 성과에 가중치를 두기보다는 좀 더 대중과 함께 하는 운동”, 즉 “대중의 동의나 공감,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운동을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헤아릴 수 있는 일.
2007년 사업을 계획하면서 참여연대 활동가들과 신경전을 벌였다고 웃으며 한 마디 하는데, 그냥 농담 같지는 않다. 참여연대처럼 일 많은 조직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에게 그가 요구하는 대중사업은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책대안을 수립하는 운동을 먼저 기획하는 습관과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라는 판단이 몸에 밴 활동가들의 관성을 안타까워했다.
낙선운동, 시민운동의 긍지이자 넘어야 할 산

그가 무엇보다 앙상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조직이다. 그래서 활동가들을 닦아세우는 중이다. 그 결과 ‘유쾌한 정치토크 - 참여연대 회원 대선을 말하다’, ‘평화와 눈 맞추다’ 등 시민사업의 구색을 갖춘 프로그램들이 조금씩 회원들에게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다행히 지난 겨울 ‘시민운동 현장체험’이 활동가들에게 큰 자극이 되어 실험은 즐거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그의 절실한 고민이 이렇게 의미 있는 실험으로 결실을 이룬다면 시민참여의 활성화 - 풍부한 시민운동 인프라 구축 - 안정적인 활동가 구조라는 시민운동 선순환 구축의 작은 씨앗이 마련될 것이다. 기대감이 솟구친다.
회원들, 시민들과 만나는 일이 즐겁다면 2000년 낙선낙천운동은 시민운동사의 신화에서 현실로 다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낙선운동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묻고 했잖아요. 낙선운동은 대중들의 공감에 대한 확신으로 시작했던 것이죠. 현장에서 창조적인 실험들도 많이 했었고요.”
그에 따르면 낙선운동은 정치개혁운동이었지만 운동방식으로 보면 “매우 창조적이고 대중과 함께 하려는 시도들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낙선낙천운동의 과실이 지금까지 유효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현재 시민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낙선운동으로 얻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해왔지요. 사회적 공신력이 생기고 우리가 내놓는 정책제안들이 비중 있게 다뤄지니까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 거죠.”
낙선운동이 만들어준 유리한 운동 조건이 그의 표현대로 하면 “운동을 날로 먹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2000년 낙선운동은 그가 넘어야 할 도전인 셈이다.
학생 노동 지역 시민…… 20년 넘게 운동 현장 지켜
참여연대 이야기부터 꺼내놓아선지 분위기가 무겁다. 평소 그의 명랑함에 매료당한-특히 술자리- 나로서는 영 마뜩하지 않다. 사실 그를 만나야만(?) 한다고 했을 때, 매일 보다시피 하던‘식구’랑 어떻게 인터뷰를 해야 할지 갑자기 쑥스러움이 앞섰다. 그리고 약속날이 다가올수록 쑥스러움보다는 막연함이 더 고민스러웠다. 그와 10년 넘게 얼굴을 맞대고 일했지만, 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참여연대 활동을 그보다 먼저 했으면서 그에게 활동가의 자리를 넘겨준 인내심 많은 아내와 씩씩한 남매를 키우며 산다는 것은 대개 아는 사실. 십년지기다운 정보는 고작 유독 짧은 손가락이 있는데, 타고 난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잘렸다는 것과 누구보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데도 누구보다 먼저, 많이 취한다는 정도. 그는 누구인가.
“중학교를 다닐 때 광주항쟁이 있었어요. 어린 나이라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파악을 못했지만……. 어떻게 보면 광주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대학에 들어가자 큰 고민 없이 숙명처럼 학생운동을 시작한다.
“대학 졸업 후 어떻게 살 거냐는 고민 끝에 당시로선 한물 지나간 노동 현장으로의 투신을 결정했어요.”
그는 주야 맞교대인 공장의 노동 강도와 천성적인 게으름 때문에 상당히 많은 좌절(?)을 했다고 한다. 선배들로부터 “너 같은 활동가는 첨 봤다”며 노동현장과 맞지 않는다는 질타에도 버티던 공장생활은 그가 유일하게 의식화, 조직화에 성공한 ‘형’때문에 정리하고 말았다. 그 형은 파업과정에서 우연한 일로 크게 다쳤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한 사람의 운명을 치명적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당시 상황이 몹시 힘겨웠고, 부상 치료 후 회사 측과 가까워지는 그 형의 모습을 보는 것도 괴로웠다고 한다. 그렇게 현장을 정리한 그는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인천지역센터를 만들고 지역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정평가」, 「의회평가」 두 권의 지방자치 평가서를 발간하고 1년 반 정도 활동한 후 접었다. 그가 언제나 운동의 퇴보를 가져온다고 한탄하는 구태 때문이다. 그 당시 그에게 인천 지역운동의 구태는 새로운 운동에 적응하지 못하고 권위만을 내세운 정파운동이었다. 새로운 운동을 찾아 참여연대의 식구가 되고, 시민사업국, 시민감시국, 사무국 등 거의 모든 부서를 거쳐 사무처장까지 오게 된 것이 그의 과거이다.
밤잠 설치며 가다듬는 새로운 도전

1만 명에 이르는 회원, 수백 명의 임원과 자원활동가들, 12개 활동기구로 이루어진 덩치 큰 조직의 수장답게 담력 있는 발언이지만, 선임자인 나로서는 큰 짐을 덜컥 넘겨버린 게 아닌가 싶어 그의 호언이 개운치 만은 않다. 그는 “사무처장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많은 이들이 돕겠다고 해요.” 라며 오히려 마음 놓으라고 한다.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새로운 참여연대를 위한 그의 힘겹지만 의미 있는 실험의 장에 함께 있는 것. 모두 그와 함께 비를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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