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인턴 후기⑫] 한국의 사회복지, 전인미답의 길을 가도 좋다
시민교육 :
2008/03/06 10:26
참여연대가 지향하는 사회, 그러나 각박한 대학생들
더 이상 대학생을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워 질 때 즈음, 나는 어느새 내가 그 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숨 막히고 각박한 것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88만원 세대’인 지금의 대학생들이 70년대와 80년대의 대학생들만큼, 혹은 훨씬 더 치열하게 사는 듯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소위 475세대와 386세대가 발끈할지도 모른다. 너희는 너무 개인적이라고, 사회 걱정도 할 줄 모른다고 말이다.
물론 지금의 대학생들은 그네들 부모님 세대가 얼마나 치열하게 시대를 고민했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고 부모님 세대가 만들어 놓은 소중한 민주화의 결실이 지금 그네들이 누리는 축복이라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대학생들도 사회를 고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대를 고민했던’ 부모님 세대들이 주축이 된 기업들은 ‘무언가 고민해 봤을 것 같은’ 대학생을 채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답답하다. 치열하되 위 세대보다 ‘폼’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시대를 고민했다’면 내 자식들에게 ‘내가 예전에는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라도 해 주련만, 지금 대학생들은 ‘내 딴에 열심히’ 살아봐야 누구한테 폼 잡기도 힘들고 오히려 고민이 없다고 욕을 들어먹는다. 게다가 벌어먹기도 어렵다. 오! How Terrible!
거세되어 버린 ‘복지국가를 위한 상상력’
지금 대학생들의 답답한 현실을 길고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이 답답한 현실이 대학생들의 사회복지에 대한 상상력을 거세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묻는 사람이 분명 많을 것인즉, 지루한 글을 더 풀어놓아야 하겠다.
팍팍한 대학생들이 사회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언가 근사하게 되지 못하면 패배자가 된다는 쓰라린 경험이다. 대학생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끝없는 패배와 좌절을 맛봐야 한다.
그러나 주위에는 분명 나와 비슷해 보였는데 승승장구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실패한 대부분의 대학생은 성공한 그 친구를 보고 무언가 자신보다 뛰어난 점-더 높은 영어 점수랄지, 더 좋은 학벌 따위의-을 찾아내고야 만다. ‘내가 뒤쳐지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승리하기에는 때가 늦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실패와 좌절은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 대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을 ‘취직’조차 시켜주지 않는 냉혹한 사회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찾아간다. 대학생들은 사회에 의해 평가받을 뿐 사회를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뒤쳐지면, 그 뿐이다. 뒤쳐지고 못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 된다. 개인의 탓이 된다. 사회가 무언가 책임져 주어야 한다는 상상은 패배자의 넋두리일 따름이다. 대학생들은 그렇게 몸으로 배워왔다.
이런 습관이 들어버린 대학생들이 이제 30대 초반까지 나이를 먹었다. 그들의 상상력은 승리자와 패배자의 구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복지 국가를 상상하는 것은 턱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복지’라는 말보다는 ‘승부’와 ‘경쟁’이라는 말에 익숙해진 대학생들은, 나아가 대한민국 사회는, 더 이상 복지국가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50년간 한반도를 지배해온 분단과 발전의 이데올로기는 ‘평등’, ‘분배’라는 말 자체를 터부시 해 버렸다. 분단과 발전의 이데올로기가 과거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면, 이제는 이에 더하여 새로운 ‘개인 책임’ 이데올로기가 복지국가를 상상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윤홍식 교수는 한국 사회는 과거 복지국가가 다뤄야 했던 ‘구사회위협’과 새로이 대처해야 하는 ‘신사회위협’이 공존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 위협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창조하기 어렵다고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사회위협과 구사회위협이 새로운 복지국가 담론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면, 이 같은 ‘반공’의 구이데올로기와 ‘경쟁’의 신이데올로기는 이미 ‘위험사회 대한민국’의 구성원이 겪고 있는 일종의 트라우마다.
위험사회 대한민국,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이렇게 신/구 이데올로기의 위협을 모두 겪고 있는 대학생으로서, 패배감에 젖어있었던 대학생으로서, 참여연대를 만났던 것은 큰 축복이다. 내가 참여연대에서 한 달간 배웠던 것은 이 이데올로기를 부수고 사회복지를 향한 생생한 상상력을 호명하는 일이었다.
복지라는 말로 대안을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기실 ‘복지’라는 단어를 부정하는 정치 세력은 지금 대한민국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딛고 선 민초들은 ‘복지’라는 말이 주는 매력에 아직도 ‘그저 취해있을’ 따름이다.
강연이 끝나고 “모두가 복지를 말하고 있는 지금, 단지 복지라는 두 글자만으로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진보세력이 내 놓는 복지의 대안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물론 돌아온 답은 “아직은 대답하기 어려운 과제다.”였다.
힘이 빠졌다. 대답하기 어려운데 나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막막하고 또 어려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한 후에, 간명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적어도 ‘복지국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사실이 바로 참여연대가 가야 하는 첫걸음이라는 점을. 그렇다. 참여연대와 한국 사회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전인미답의 이정표를 읽고 찾는 일을, 나는 지난 한 달간 참여연대에서 배웠다.
더 이상 대학생을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워 질 때 즈음, 나는 어느새 내가 그 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숨 막히고 각박한 것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88만원 세대’인 지금의 대학생들이 70년대와 80년대의 대학생들만큼, 혹은 훨씬 더 치열하게 사는 듯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소위 475세대와 386세대가 발끈할지도 모른다. 너희는 너무 개인적이라고, 사회 걱정도 할 줄 모른다고 말이다.
물론 지금의 대학생들은 그네들 부모님 세대가 얼마나 치열하게 시대를 고민했는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리고 부모님 세대가 만들어 놓은 소중한 민주화의 결실이 지금 그네들이 누리는 축복이라는 점을 실감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대학생들도 사회를 고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대를 고민했던’ 부모님 세대들이 주축이 된 기업들은 ‘무언가 고민해 봤을 것 같은’ 대학생을 채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답답하다. 치열하되 위 세대보다 ‘폼’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시대를 고민했다’면 내 자식들에게 ‘내가 예전에는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라도 해 주련만, 지금 대학생들은 ‘내 딴에 열심히’ 살아봐야 누구한테 폼 잡기도 힘들고 오히려 고민이 없다고 욕을 들어먹는다. 게다가 벌어먹기도 어렵다. 오! How Terrible!
거세되어 버린 ‘복지국가를 위한 상상력’
지금 대학생들의 답답한 현실을 길고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이 답답한 현실이 대학생들의 사회복지에 대한 상상력을 거세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묻는 사람이 분명 많을 것인즉, 지루한 글을 더 풀어놓아야 하겠다.
팍팍한 대학생들이 사회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언가 근사하게 되지 못하면 패배자가 된다는 쓰라린 경험이다. 대학생들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끝없는 패배와 좌절을 맛봐야 한다.
그러나 주위에는 분명 나와 비슷해 보였는데 승승장구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실패한 대부분의 대학생은 성공한 그 친구를 보고 무언가 자신보다 뛰어난 점-더 높은 영어 점수랄지, 더 좋은 학벌 따위의-을 찾아내고야 만다. ‘내가 뒤쳐지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승리하기에는 때가 늦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실패와 좌절은 나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 대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을 ‘취직’조차 시켜주지 않는 냉혹한 사회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찾아간다. 대학생들은 사회에 의해 평가받을 뿐 사회를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뒤쳐지면, 그 뿐이다. 뒤쳐지고 못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 된다. 개인의 탓이 된다. 사회가 무언가 책임져 주어야 한다는 상상은 패배자의 넋두리일 따름이다. 대학생들은 그렇게 몸으로 배워왔다.
이런 습관이 들어버린 대학생들이 이제 30대 초반까지 나이를 먹었다. 그들의 상상력은 승리자와 패배자의 구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복지 국가를 상상하는 것은 턱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복지’라는 말보다는 ‘승부’와 ‘경쟁’이라는 말에 익숙해진 대학생들은, 나아가 대한민국 사회는, 더 이상 복지국가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50년간 한반도를 지배해온 분단과 발전의 이데올로기는 ‘평등’, ‘분배’라는 말 자체를 터부시 해 버렸다. 분단과 발전의 이데올로기가 과거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면, 이제는 이에 더하여 새로운 ‘개인 책임’ 이데올로기가 복지국가를 상상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윤홍식 교수는 한국 사회는 과거 복지국가가 다뤄야 했던 ‘구사회위협’과 새로이 대처해야 하는 ‘신사회위협’이 공존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이 위협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창조하기 어렵다고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사회위협과 구사회위협이 새로운 복지국가 담론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면, 이 같은 ‘반공’의 구이데올로기와 ‘경쟁’의 신이데올로기는 이미 ‘위험사회 대한민국’의 구성원이 겪고 있는 일종의 트라우마다.
위험사회 대한민국,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이렇게 신/구 이데올로기의 위협을 모두 겪고 있는 대학생으로서, 패배감에 젖어있었던 대학생으로서, 참여연대를 만났던 것은 큰 축복이다. 내가 참여연대에서 한 달간 배웠던 것은 이 이데올로기를 부수고 사회복지를 향한 생생한 상상력을 호명하는 일이었다.
복지라는 말로 대안을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기실 ‘복지’라는 단어를 부정하는 정치 세력은 지금 대한민국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딛고 선 민초들은 ‘복지’라는 말이 주는 매력에 아직도 ‘그저 취해있을’ 따름이다.
강연이 끝나고 “모두가 복지를 말하고 있는 지금, 단지 복지라는 두 글자만으로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진보세력이 내 놓는 복지의 대안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물론 돌아온 답은 “아직은 대답하기 어려운 과제다.”였다.
힘이 빠졌다. 대답하기 어려운데 나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막막하고 또 어려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한 후에, 간명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적어도 ‘복지국가’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사실이 바로 참여연대가 가야 하는 첫걸음이라는 점을. 그렇다. 참여연대와 한국 사회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전인미답의 이정표를 읽고 찾는 일을, 나는 지난 한 달간 참여연대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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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명의 인턴이 두 달간 참여연대와 함께 북적대며 활동하는 모습들을 후기를 통해 인터넷참여연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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