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프리즘> 프로도와 샘
칼럼/기고 :
2004/01/16 03:20
며칠 전 아들과 함께 '반지의 제왕' 3편을 관람하였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화면 위에 옮겨 놓는 놀라운 컴퓨터 그래픽 기술 덕택에, 소년 시절의 감수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된 필자도 잠시나마 환타지의 세계에 끌려들어 갔다.
특히 '내가 반지 운반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주인님을 운반할 수는 있다'며 '프로도'를 업고 바위산을 기어오르는 '샘'의 헌신, 죽은 큰아들 때문에 산 둘째아들을 버리고 왕의 귀환마저 거부하는 곤도르의 섭정 '데네소르'의 집착 등,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대한 단순명료한 헐리우드적 대비도 거부감보다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환타지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 왔을 때, 현실의 남루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 환타지 영화의 단점이다. 우리는 언제나 샘의 헌신보다는 데네소르의 집착을 더 많이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 수많은 데네소르들이 자신의 집착을 샘의 헌신으로 강변하는 후안무치함이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서까지 불법자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사자후를 토하는 정치인들, 불법정치자금 출처는 회사 돈이 아니라 총수의 개인재산이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기업인들, 시장의 안정을 위하여 시장의 원칙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고 당당하게 브리핑하는 관료들, 이들은 진짜 자신을 데네소르가 아니라 샘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에게도 선한 '스미골'과 악한 '골룸' 사이의 내면적 갈등의 대화가 계속되기는 하는 것일까. 정말 궁금하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 드디어는 이들이 자신을 샘이 아닌 프로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주종관계를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으로까지 발전한다.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대한 천착은 누구나 한번쯤 빠져드는 철학적 고민이기는 하나, 천박한 경제학자가 답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벅찬 문제다. 경제학자는 단지 어떤 환경 하에서 한 경제주체가 샘의 헌신과 데네소르의 집착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지를 유추할 뿐이다.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신이 헌신할 주인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사실 샘이 헌신한 것은 프로도 자체라기보다는, 프로도에게 부여된 절대반지의 파괴라는 임무였다. 데네소르에게는 자신이 통치권을 대리하고 있는 왕의 귀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을 뿐이다.
우리가 매일 언론을 통해 접하는 정치인, 기업인, 그리고 관료들은 주인이 아니라 그 대리인이다. 문제는, 헐리우드의 환타지 영화처럼 주종관계가 특정 개인을 중심으로 구체화되어 있지 않은 현실 세계에서는 대리인이 주인을 배신하고 심지어 대리인이 주인 노릇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현실 세계의 주인들에게는 사자(死者)까지도 복종하게 만드는 왕의 보검과 같은 권위의 상징도 없다. 이들 대리인이 내세우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국민경제의 이익은 흔히 주인에 대한 의무의 위배를 은폐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이제 한국사회의 지도자급 대리인들이 자신의 주인을 누구로 설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주인에게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를 판별할 기회를 무지무지 많이 갖게 되었다. 똑똑히 지켜보자. 그리고 다음에는 데네소르가 아니라 샘을 대리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똑똑한 주인이 되도록 하자. 다음은 그 체크 리스트다.
1. SK그룹 손길승 회장이 SK해운에서 1조 가까운 천문학적 액수의 자금을 유용한 이유는? 최종현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최태원 회장을 보필하기 위해? SK그룹을 위해? 그 주주를 위해? 아니면 자신을 위해?
2. 서정우 변호사가 법조인으로서의 그리고 사외이사로서의 규범을 깨고 재벌들을 협박하여 차떼기로 불법정치자금을 조성한 이유는?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해? 이회창 후보와의 개인적 관계 때문에? 아니면 자신을 위해?
3.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재벌의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들이 검찰과 법원에서 자금출처에 대해 뭐라고 진술할지? 회사 돈이 아니라 총수 개인재산이라면, 그 개인재산은 어떻게 조성된 것이며, 무기명 장기채권으로 보유하고 있는 이유는?
4. 권력의 시녀에서 어느 날 갑자기 네티즌의 짱으로 탈바꿈한 검찰이 기업 비자금의 조성경위를 어디까지 파헤칠지? 중간에 덮는다면, 그 이유는 뭐로 댈지? 투자활성화를 통한 경제회복? 불법정치자금 수사에 한정? 아니면 여전히 권력의 시녀?
5. 삼성카드와 LG카드의 부실을 메우기 위해 그 계열사들이 증자참여 또는 회사채인수 등의 지원을 결정하기 위한 이사회에서 이사들이 찬성표를 던질 때의 논거는? 시장의 안정? 도의적 책임? 주주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아니면, 재벌총수를 위해?
6. 금감위와 공정위 등의 감독기구가 카드사에 대한 계열사 지원의 합법성을 심사할 때 어떤 판단을 내릴지? 승인한다면, 그 근거는? 시스템 리스크 방지? 법률적 규정의 미비? 아니면, 재벌과 정치권의 압력?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만간 이 모든 문제의 판단에 도움이 될 기회가 있을 듯하다. 19일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이 회동한다. 우리 나라 정치와 경제의 최고위 대리인들이 모여 무슨 말씀을 나누는지 지켜보자. 특히 이들 최고위 대리인들이 자신들을 샘으로 확신하고 있는지, 심지어 자신들을 프로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똑똑히 지켜보자.
특히 '내가 반지 운반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주인님을 운반할 수는 있다'며 '프로도'를 업고 바위산을 기어오르는 '샘'의 헌신, 죽은 큰아들 때문에 산 둘째아들을 버리고 왕의 귀환마저 거부하는 곤도르의 섭정 '데네소르'의 집착 등,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대한 단순명료한 헐리우드적 대비도 거부감보다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환타지에서 현실로 다시 돌아 왔을 때, 현실의 남루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것이 환타지 영화의 단점이다. 우리는 언제나 샘의 헌신보다는 데네소르의 집착을 더 많이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 수많은 데네소르들이 자신의 집착을 샘의 헌신으로 강변하는 후안무치함이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서까지 불법자금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사자후를 토하는 정치인들, 불법정치자금 출처는 회사 돈이 아니라 총수의 개인재산이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기업인들, 시장의 안정을 위하여 시장의 원칙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고 당당하게 브리핑하는 관료들, 이들은 진짜 자신을 데네소르가 아니라 샘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에게도 선한 '스미골'과 악한 '골룸' 사이의 내면적 갈등의 대화가 계속되기는 하는 것일까. 정말 궁금하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 드디어는 이들이 자신을 샘이 아닌 프로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주종관계를 거꾸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으로까지 발전한다.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대한 천착은 누구나 한번쯤 빠져드는 철학적 고민이기는 하나, 천박한 경제학자가 답을 제시하기에는 너무 벅찬 문제다. 경제학자는 단지 어떤 환경 하에서 한 경제주체가 샘의 헌신과 데네소르의 집착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지를 유추할 뿐이다.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신이 헌신할 주인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사실 샘이 헌신한 것은 프로도 자체라기보다는, 프로도에게 부여된 절대반지의 파괴라는 임무였다. 데네소르에게는 자신이 통치권을 대리하고 있는 왕의 귀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을 뿐이다.
우리가 매일 언론을 통해 접하는 정치인, 기업인, 그리고 관료들은 주인이 아니라 그 대리인이다. 문제는, 헐리우드의 환타지 영화처럼 주종관계가 특정 개인을 중심으로 구체화되어 있지 않은 현실 세계에서는 대리인이 주인을 배신하고 심지어 대리인이 주인 노릇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현실 세계의 주인들에게는 사자(死者)까지도 복종하게 만드는 왕의 보검과 같은 권위의 상징도 없다. 이들 대리인이 내세우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국민경제의 이익은 흔히 주인에 대한 의무의 위배를 은폐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이제 한국사회의 지도자급 대리인들이 자신의 주인을 누구로 설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주인에게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를 판별할 기회를 무지무지 많이 갖게 되었다. 똑똑히 지켜보자. 그리고 다음에는 데네소르가 아니라 샘을 대리인으로 선택할 수 있는 똑똑한 주인이 되도록 하자. 다음은 그 체크 리스트다.
1. SK그룹 손길승 회장이 SK해운에서 1조 가까운 천문학적 액수의 자금을 유용한 이유는? 최종현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최태원 회장을 보필하기 위해? SK그룹을 위해? 그 주주를 위해? 아니면 자신을 위해?
2. 서정우 변호사가 법조인으로서의 그리고 사외이사로서의 규범을 깨고 재벌들을 협박하여 차떼기로 불법정치자금을 조성한 이유는?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해? 이회창 후보와의 개인적 관계 때문에? 아니면 자신을 위해?
3.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재벌의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들이 검찰과 법원에서 자금출처에 대해 뭐라고 진술할지? 회사 돈이 아니라 총수 개인재산이라면, 그 개인재산은 어떻게 조성된 것이며, 무기명 장기채권으로 보유하고 있는 이유는?
4. 권력의 시녀에서 어느 날 갑자기 네티즌의 짱으로 탈바꿈한 검찰이 기업 비자금의 조성경위를 어디까지 파헤칠지? 중간에 덮는다면, 그 이유는 뭐로 댈지? 투자활성화를 통한 경제회복? 불법정치자금 수사에 한정? 아니면 여전히 권력의 시녀?
5. 삼성카드와 LG카드의 부실을 메우기 위해 그 계열사들이 증자참여 또는 회사채인수 등의 지원을 결정하기 위한 이사회에서 이사들이 찬성표를 던질 때의 논거는? 시장의 안정? 도의적 책임? 주주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아니면, 재벌총수를 위해?
6. 금감위와 공정위 등의 감독기구가 카드사에 대한 계열사 지원의 합법성을 심사할 때 어떤 판단을 내릴지? 승인한다면, 그 근거는? 시스템 리스크 방지? 법률적 규정의 미비? 아니면, 재벌과 정치권의 압력?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만간 이 모든 문제의 판단에 도움이 될 기회가 있을 듯하다. 19일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이 회동한다. 우리 나라 정치와 경제의 최고위 대리인들이 모여 무슨 말씀을 나누는지 지켜보자. 특히 이들 최고위 대리인들이 자신들을 샘으로 확신하고 있는지, 심지어 자신들을 프로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똑똑히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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