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사용된 불법대선자금 수사를 보고 국민들은 그야말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과상자'를 대신해서 '차떼기', '책떼기'라는 신종 불법자금 수수방법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돈의 액수도 엄청나지만 그 수법도 가히 엽기적이어서 국민들은 이 나라의 정치권에 대해 환멸, 또 환멸을 느껴야 했다. 저절로 욕지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SK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100억원을 실은 승용차를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에게 넘겨 주었다. (주)LG는 150억을 실은 트럭을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휴게소로 몰고 가서 이회창 후보의 법률고문이었던 서정우 변호사에게 차를 넘겨주었다. 삼성은 책처럼 포장한 112억원어치의 무기명채권을 서정우 변호사에게 넘겨주었다.



'차떼기'와 '책떼기'는 그 수법의 엽기성 때문에 널리 회자되었을 뿐, 재벌이 정치권에 준 불법대선자금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한겨레신문} 2004년 5월 19일치는 4대 재벌을 위시한 11개 주요 기업이 정치권에 준 불법대선자금과 이에 대한 검찰의 형사처벌 현황을 보도했다.



먼저 불법대선자금 현황을 보면, 삼성 370억원, 엘지 150억원, 현대자동차 115억원, SK 110억원, 한화 50억원, 대한항공 25억원, 롯데 16억원, 금호 18억원, 대우건설 16억원, 부영 6억원, 두산 2억원으로 전체 액수는 무려 878억원에 이른다. 이 중에서 810억원을 한나라당의 최돈웅, 김영일 의원과 서정우 변호사가 챙겼다.



이제 형사처벌 현황을 보자. 한마디로 형사처벌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몇몇 정치인들이 구속되었거나 수사를 받고 있다. 한나라당의 최돈웅, 김영일 의원과 서정우 변호사는 '차떼기'와 '책떼기'의 주역으로서 구속되었다.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치권에는 비교적 상당한 타격이 가해졌다.



그러나 기업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권과 기업에 대한 검찰의 형사처벌은 한마디로 편파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속된 사람은 부영의 이중근 회장과 SK의 손길승 회장 뿐이다. 대우건설의 남상국 사장이 수사를 받는 중에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이른바 '총수'들은 구속은커녕 소환조사조차 받지 않았다. 검찰은 '총수가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서천 소가 웃을 일'이라거나 '개 풀 뜯는 소리'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경우에 써야 옳을 것이다. 송강수 총장도 안대희 중수부장도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대검으로 도시락까지 싸들고 가서 그들을 격려했던 시민들은 지금 쓰디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재벌에 대한 엄정수사와 처벌의 의지를 밝혔던 것이 불과 석달 전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렇듯 국민의 뜻을 완전히 저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벌은 차라리 '죄벌'이라고 해야 옳다. 그들이 쌓은 죄는 너무나 많아서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 한국 사회의 고질병 중의 고질병으로 우리는 정경유착을 들 수 있다. 기업은 정치권에게 돈을 주고 정치권은 기업에게 각종 특혜를 주는 것이다. 특혜의 내용은 다양하다. 그것을 한마디로 줄이자면, 막대한 잇권을 주는 것이다. 기업은 100억원을 정치권에 넘기는 댓가로 1000억원, 아니 1조원, 10조원의 잇권을 챙긴다. 엄청나게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돈은 결국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권과 기업이 짜고 국민의 등골을 빼먹는 것이 바로 정경유착의 본질이다.



정경유착은 정치권이 썩었기 때문에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지 않은가? 정경유착은 정치권뿐만 아니라 경제계도 썩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특히 지난 16대 대통령 선거의 불법대선자금 수수사건은 부패하고 무능하지만 영남 지역주의로 말미암아 큰 힘을 가지고 있는 한나라당과 역시 부패하고 무능하지만 이 나라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재벌들이 결탁해서 일어난 '더러운 사건'이었다. 이렇게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수사도, 처벌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검찰이 재벌을 봐주고 정경유착을 온존하려 하고 있는 가운데 불법파업을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법원의 판결이 또 다시 내려졌다. 노동운동을 근원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고안된 살인적인 손배·가압류제도의 악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이 왜 중요한 시대적 과제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홍성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상지대 교수)
2004/05/20 13:42 2004/05/2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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