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가장 자부심을 느낀 성과 중의 하나가 바로 증권집단소송법 제정이었다. 정부의 규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해관계자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경제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예상치 못한 사태 전개에 필자는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증권집단소송법이 오히려 피해자의 권리구제를 방해하고 경제질서를 허무는 빌미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집단소송법은 올 1월에 발효되었다. 집단소송 대상 중 분식회계 혐의는 우선 자산 2조원 이상의 약 80개 기업에만 적용하기로 하고서. 그런데 재계에서는 아직 준비가 안되었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럼 우리나라의 대표기업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분식회계를 하고 있다는 고백인가?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분식회계에 대한 집단소송을 2년간 유예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속이 불편하지만, 어쩌겠는가. 법을 개정한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는 다음 선거에서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고, 필자는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개정된 증권집단소송법은 말 그대로 집단소송만 2년간 유예했을 뿐이다. 분식회계와 관련한 여타 민·형사상의 책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개별 민사소송이나 검찰의 수사까지 가지 않더라도, 분식회계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곤란할 것이다. 그래서 재계는 ‘쥐도 새도 모르게’ 분식회계를 수정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금감위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분식회계는 기업의 재무제표를 ‘척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금감원의 회계감리는 분식회계를 밝혀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장치다. 그래서 최근 금감위가 외감규정을 개정하여 과거분식을 자발적으로 수정한 경우에는 감리를 면제하기로 했다.

특히 쥐도 새도 모르게 분식을 털 수 있도록 역분식까지 허용했다.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개정된 외감규정은 법적 근거가 없다. 재삼 강조하건대, 증권집단소송법 개정은 집단소송만을 2년간 유예해주었을 뿐, 이것이 감리면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외감규정의 모법인 외감법 어디에도 기업회계기준에 위배되는 회계처리를 용인하거나 이에 따른 처벌을 면제하는 근거규정은 없다. 아무리 회계감리가 감독당국의 재량권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쥐도 새도 모르게 역분식까지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외감법의 위임 범위를 일탈했음이 분명하다.

다시 보자. 원래 출발은 자산 2조원 이상인 약 80개 기업의 집단소송 문제였다. 그러나 감리면제를 위해 외감규정을 개정한 결과 1만3천개 외감법인 전체의 회계자료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느 기업이 분식을 했었는지도 알 수 없고, 분식을 전부 턴 기업, 일부만 턴 기업, 그대로 남겨둔 기업을 구별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한편, 자산 1천억원의 비상장 중견기업에 분식회계 혐의가 있어 검찰이나 주주가 금감위에 특별감리를 요청했다고 하자. 애당초 집단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우다. 그런데 금감위는 이 기업이 과거분식을 이미 수정해 놓았다는 것을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있다. 외형상 금감위 내부규정에 불과한 외감규정이 형사소송법상 공무원의 고발의무, 나아가 헌법상 사적재산권 보호 원칙까지 사실상 무력화시킨 것이다.

금감위가 뭐하는 곳인가? 투명성을 확립하고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이 금감위의 설립목적이다. 그런데 자신의 존립근거마저 부정하는 위법·위헌적 조치를 취할 권한을 누가 금감위에 부여했고, 누가 그 책임을 물을 것인가?

감독당국이 감독을 포기함으로써 경제질서를 허물 때 외환위기가 찾아 왔었다. 필자가 가슴앓이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의 금감위원장이 1997년 당시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이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 한성대 교수)
2005/04/22 10:38 2005/04/2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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