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가 정보공개 청구에 나선 사연
금융관련 법제도/공적자금 :
2001/03/13 03:57
시민이 참여하는 공적자금 정보공개청구 캠페인 시작
“공적자금에 대한 채권자로서 채무자의 신상과 채무내역을 알고 싶다”
참여연대 회원인 황경순 씨(48)는 13일, 예금보험공사를 대상으로 ‘퇴출금융기관의 채무자 및 대주주의 재산 은닉실태’를 정보공개를 청구하며 이같은 청구의 취지를 밝혔다.
참여연대는 국민의 세 부담으로 귀결될 수 있는 공적자금이 150조에 이름에 따라 지난 1월부터 부실책임추궁 시민행동을 위해 총 35건의 정보공개청구를 하였으나 8건만이 공개된바 있다.
이 때문에 참여연대는 공개를 거부한 대표적인 사례로 ‘퇴출금융기관의 채무자 및 대주주의 재산 은닉실태’에 대해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1차 시민정보공개청구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이에 참여연대 회원 황경순씨는 장문의 청구취지를 밝히며 참여하게 되었다.
참여연대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직접 나서서 정보공개청구를 하기에 이른 것은 예금보험공사 등 관련 기관들이 정보를 독점한 채 국민들에게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관련 기관들이 공적자금 관련 정보, 특히 부실책임자들에 관한 정보를 국민 앞에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재차 촉구했다.
현재 공적자금 시민행동 사이트(www.cleanfund.com)를 방문하면 누구나 쉽게 이 정보공개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
황경순씨의 정보공개 취지 전문
저는 올해 마흔여덟 된 황경순 주부입니다.
현재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릉에 살고 있고, 곧 여의도로 이사할 계획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시골에서 자라 그런지 콘크리트 빌딩숲보다 언제나 이슬 맺힌 풀잎이 그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김지하 시인의 생명존중 사상의 존귀함을 알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소박한 주부입니다.
그런 제가 오늘은 예금보험공사 이상용 사장님께 척박한 땅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조리 없고,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십시오.
얼마전 조간을 보니 “공적자금 특별감사-자금조성 적정성 여부 등 고강도 감사”라는 기사가 나왔더군요. 12일부터 공적자금 특별감사를 한다는 신문보도도 들었습니다. 감사원이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조성된 총 168조2천억원 규모의 공적자금에 대해 특별감사를 한다니 뒤늦게나마 환영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을 듣고도 왜 저는 마음이 안 놓이는 걸까요? 아마도 얼마 전 참여연대 상근활동가로부터 우울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에서는 지난 해 12월 27일 ‘퇴출금융기관 채무자 및 대주주 은닉재산 적발’이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이 보도자료에 따르면 예보는 퇴출금융기관의 부실관련자에 대한 재산조사 진행과정에서 퇴출금융기관 채무자(176명)와 퇴출종금사 대주주(2명)가 해당기업 부도일이나 금융기관 영업정지일 등을 전후해 자신의 부인, 자녀, 장인, 처남, 제수, 친구 등 특수 관계인에게 증여 또는 매매 등의 방법으로 총 207건 615억원 상당의 재산을 빼돌린 사실을 밝혀냈다고 적혀 있습니다.
예보는 이런 행위가 민법 제406조에 의한 채권자 취소권 행사 대상으로 판단되어 조사내용을 파산재단에 통보하고, 가처분, 가압류 등 채권보전조치 및 사해행위 취소 소송 등 필요한 법적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고 썼습니다.
앞으로는 퇴출금융기관의 채무자 및 대주주에 대한 은닉재산 조사활동을 더욱 체계적으로 수행해 책임추궁을 철저히 함으로써 공적자금 손실을 최소화하고 더 이상의 도덕적 해이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도 밝혔더군요.
이 내용만 듣다 보면 예보의 활동은 눈부시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고의로 재산을 은닉한 공적자금 투입 금융기관과 대주주를 찾아내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혀내려는 노력이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보는 그 시작의 창대함과 달리 미미한 결과를 덧붙였습니다. 176건의 부실관련 금융기관과 대주주의 재산은닉 사건에 대해 고작 11건만을 공개했더군요. 그것도 세 줄로 짤막하게 써서 도대체 그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게 말이에요.
참여연대는 무분별하고 과도하게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공적자금의 운용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예금보험공사는 물론 자산관리공사 등 관계기관에 그 동안 1월부터 2월 중순까지 모두 47건의 정보공개를 청구했고, 이중 비공개 된 것이 12건, 부분공개 된 것이 9건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답변기한인 15일째를 넘겨 20일째 또는 30일째가 다 되어도 답변이 없는 것이 6건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 사장님께서는 예보만의 문제는 아니니 너무 다그치지 말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상용 사장님.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비밀의 천국’에 살고 있는 걸까요?
98년 1월 1일부터 정보공개법이 시행됐는데도 말이에요.
저는 이 땅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단 한번도 세금을 연체하지 않은 국민입니다. 해마다 저희 가족이 내는 세금을 합치면 갑근세 493만5,600원, 주민세 49만3,560원, 자동차세 24만780원, 재산세 년 2회 한번에 12만8,930원씩, 매달 전기세에 상하수도요금까지 끝이 없는 세금항목을 채워 넣고 살고 있습니다.
성실 납세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비밀의 문에 갇혀 있는 국가 정보들을 하나씩 꺼내어 모든 국민들과 함께 알고 싶다는 욕구가 분출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겉으로는 정보공개법을 만들어 ‘투명’한 체 하지만 실상은 얼마나 ‘비밀’이 많은지 그 내용을 낱낱이 밝히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듯 합니다. 제가 너무 심한 걸까요? 지나친 시민의식이 발동된 겁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국민은 국민의 알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적자금의 실질적인 부담자입니다. 150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을 경우 이는 결국 국민의 세부담으로 귀결될 것이며 그 돈을 부담하기 위해 저는 지금보다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한편으로는 부업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왜 제가 이같은 부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라경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같은 부담을 가중시킨 책임자들이 누군인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즉 공적자금에 대한 채권자로서 채무자의 신상과 채무내역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더구나 이들 부실 책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재산을 빼돌리기까지 한다니 그 분노로 인해 잠들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모름지기 정부란 국민에게 좀더 질 높은 서비스를 하기 위해 연구해야 하는 기관인 것입니다. 그 서비스의 척도에 따라 좋은 정부,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지금 내는 이 정보공개청구서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값지고 뜻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IMF만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한국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96년 봄, ‘무조건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이 개탄스러워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필라델피아로 갔습니다.
아이들에게 좀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인생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달러 값이 두 배로 폭등하는 바람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서둘러 귀국을 했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한국 땅으로 돌아오게 된 배경에 부실한 경영으로 기업을 망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 국민을 IMF체제에 살게 한 재벌들과 부실기업주, 그리고 이를 방조한 정부가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리고, 밤잠도 설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귀국 후 털끝만큼도 변한 게 없는 한국사회를 바라보면서 과연 이 땅의 희망은 무엇인가 되뇌이고 또 되뇌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다시 한번 이 땅을 떠날 것인가, 미약하나마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것인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이민을 권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이런 나라를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국가의 정보를 국민이 투명하게 알 수 없고, 부실과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는 이 나라는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박한 주부이나마 나부터 시작한 실천이 물방울이 되어 강물로 퍼져 나갈 때 세상의 작은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작은 노력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마는 ‘시작이 반’이라는 경구를 믿으며 오늘 이 정보공개청구서를 예금보험공사 앞으로 보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2001. 3. 13
청구인 황경순
예금보험공사 사장 귀하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