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인동窓> '포이즌 필'은 독약이다
독약증권의 내용은 다양한데, 그 중 하나는 일정한 조건에서 차별적으로 발효되는 신주인수권이다. 어떤 투자자가 한 회사의 주식을 사들여서 지배주주가 되거나 경영진을 교체하려 할 때, 기존 지배주주나 경영진이 이에 대항하여 회사로 하여금 새 주식을 대량으로 발행해서 기존 주주들만 헐값에 인수하게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연히 그 투자자는 큰 낭패를 보게 된다. 새 주식이 발행되면서 자신이 사들인 주식의 비율이 낮아질 뿐만 아니라 주식의 가격마저 떨어지므로 그 투자자는 지배주주가 되기는커녕 엄청난 손해만 보게 된다. 독약을 삼킨 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신주 발행 및 배정이 가능하다면, 기존 지배주주나 경영진이 동의하지 않는 회사 인수는 시도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독약증권은 이런 방식의 신주 발행 및 배정을 이사회의 의결만으로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법무부가 도입하겠다는 포이즌 필이 이와는 내용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지배주주나 경영진의 교체를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독약증권은 1982년에 미국에서 처음 발행되었다. 1985년에는 합법성을 인정하는 판결이 있었는데, 그 근거 중의 하나는 주주들이 원한다면 새 이사회를 통해서 독약증권을 무효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 회사는 대부분 소유가 분산되어 있으면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투자자가 주식을 사들여서 의결권 경쟁을 통해 경영진을 교체하고 독약증권을 제거할 수 있다. 그것이 투자자와 주주에게 이익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독약증권이 발행되더라도 회사 가치를 높이는 회사 인수와 경영진 교체는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독약증권이 무효화될 수 있을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미국에서보다 훨씬 어려울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회사는 미국 회사와는 달리 대부분 지배주주가 존재한다. 더욱이 그 지배주주는 자신이 소유하는 주식보다는 계열사가 소유하는 주식을 통해서 회사를 지배한다. 30대 재벌그룹 소속회사가 700여개인데, 이들 회사의 총수일가 지분 평균이 8.6%이고, 계열사 지분 평균이 28.4%다. 여기에 자사주와 비영리법인 지분을 더한 내부지분 평균이 42%다.
이런 상황에서 독약증권마저 발행된다면, 재벌총수가 동의하지 않는 회사 인수는 거의 완전히 불가능하게 된다. 8.6%를 소유하는 재벌총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91.4%를 소유하는 주주에게 이익이 되는 회사 인수도 불가능하게 된다. 91.4%를 소유하는 주주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8.6%를 소유하는 재벌총수에게 이익이 되는 회사 인수는 이뤄진다. 회사 가치를 높이는 인수는 이뤄지지 않고, 회사 가치를 낮추는 인수는 이뤄진다. 독약증권이 재벌총수에게는 보약이 되고, 회사와 주주에게는 독약이 된다.
미국에서는 독약증권이 독약이 아닐 수 있다. 소유가 분산되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회사의 독약증권은 투자자와 주주가 함께 원한다면 제거할 수 있다. 지배주주가 있더라도 그 주주의 지분이 많다면 독약증권이 덜 해로울 수 있다. 회사 가치를 높이는 것이 지배주주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회사의 지배주주에게는 독약증권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총수가 적은 지분을 가지고서도 계열사 지분을 통해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우리나라 재벌회사의 독약증권은 주주가치에는 물론이고 회사 가치에도 해롭다. 재벌총수에게만 이로울 뿐이다.
독약증권이 허용되면 재벌총수가 회사 재산과 이익을 더 많이 빼돌릴 수 있다. 독약증권이 허용되면 무능한 재벌총수도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 재벌체제가 지금보다도 강화되어 그 폐해가 더욱 심할 것이다. 결국 한국사회에서 ‘포이즌 필’ 도입은 말 그대로 독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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