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위 규정의 위임입법 한계 일탈 문제



1. 재량적 판단 대 자의적 개입

IMF 경제위기 이후 150조원의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얻은 교훈 중의 하나가 바로 금융감독의 중요성이다. 금융기관의 건전성과 금융거래의 효율성을 담보하는 엄정한 금융감독 시스템 없이는 모든 것이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음을 우리 모두가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금융거래의 복잡성과 방대한 규모 그리고 경제적·기술적 환경의 급변 등을 감안할 때, 금융감독의 세세한 기준을 모두 법 또는 시행령에서 규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금융감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금융감독당국의 내부 규정으로 위임할 수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금융감독당국의 재량적 판단의 여지를 상당 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결국 금융감독 시스템의 성과는 일차적으로 금융감독당국의 능력(전문성)과 위상(독립성)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나라 금융감독당국의 능력과 위상에 대한 신뢰는 어떠한가. 경제위기 이전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최근 대한생명과 현대투신 등 대형부실금융기관의 처리에서 금융감독당국이 보여준 행태는 상위법령이 부여한 재량적 판단의 합리적 범위를 크게 일탈한 것임에 틀림없다. 적법절차를 가장한 자의적 개입의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금감원 규정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부실금융기관 대주주의 경제적 책임 부담기준' 문제

총 3조 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한생명의 매각과 관련하여 금융감독당국과 공적자금관리위원회(이하 공자위), 그리고 한화그룹 사이의 힘 겨루기가 한창이다. 공식적인 의사결정기구인 공자위(및 그 산하 매각심사소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한화컨소시엄으로의 매각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고위관료의 발언이 이어졌고, 이에 대해 공자위가 강력하게 문제제기하자, 급기야 한화그룹은 인수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식의 최후통첩성 기자회견을 열기도 하였다.

최근 대한생명의 영업실적 호전을 반영하여 매각가격을 상향조정하는 문제가 관심을 모으고 있으나, 이와 더불어 보다 세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은 인수자의 자격 문제이다. 부실금융기관 처리에서 공적자금의 회수에 못지 않게 중요한 원칙이 바로 금융질서의 정상화이기 때문이다. 한화그룹의 경우 재무건전성, 자금조달능력, 경영능력 등 현재의 자격 요건에서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또한 한화종금, 충청은행 등 과거 금융계열사의 부실에 따른 책임 문제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참여연대는 지난 4월 23일 금감원에 한화그룹 금융계열사의 부실화 원인과 이에 대한 책임분담 내역 등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하였다. 그 대답은 놀랍게도 "한화종금의 부실화 원인에 대하여 별도로 조사한 바 없음"이었다. 한화종금에 1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실원인을 조사하지도 않은 채 책임문제를 매듭짓고 나아가 새로운 금융기관 인수를 허가한다니, 납득할 수 없었다.

이에 참여연대는, 금감원이 공적자금 투입기관에 대한 검사의 일환으로 99년 8월 한화종금에 대한 부문검사를 실시하고 그 주요 지적 사항을 2001년 1월 국정조사시 보고한 사실을 적시하면서, 지난 5월 16일 또다시 금감원에 한화종금에 대한 부문검사 결과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하였다. 그 대답은 정보공개법 관련 조항에 따라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허탈하였다. 금감원의 답변에서는 부실원인을 밝히고 그에 상응한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금융부실의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일말의 의지도 읽을 수 없었다.

이제 그나마 문제제기할 수 있는 수단은, '부실금융기관 대주주의 경제적 책임 부담기준'(이하 부담기준)에 따라 1,300억원의 증권금융채권(이율 2%, 만기 5년)을 인수함으로써 한화종금의 부실에 따른 과거 책임 문제는 종결되었다는 금감원과 한화그룹의 주장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검토하는 것뿐이다.

보험업법시행령은 주요출자자의 자격요건과 관련하여 "금융산업구조개선에관한법률에 의하여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된 금융기관의 최대주주·주요주주 또는 그 특수관계인이 아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그 하위규범인 보험감독규정은 "금감위가 정하는 '부담기준'에 의하여 경제적 책임부담 의무를 이행한 경우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면책규정을 두고 있다.

문제는 명확하다. 금감위가 정하는 '부담기준'이, 부실금융기관 책임자가 금융업에 신규 진출하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활동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또 다른 원칙 사이의 충돌을 조화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인가, 그리고 이에 관련된 금융감독당국의 재량적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는가의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한화그룹의 경우 1,300억원이라는 부담규모는 '부담기준' 2호 가목에 따라 계산된 것이고, 증금채 인수 역시 '부담기준' 3호 가목에 열거된 방법 중의 하나이고, 증금채 발행조건(만기, 금리 등)은 3호 나목에 "가목에서 정하는 채권(전환사채 포함)의 발행조건은 발행기관과 금융감독원장이 협의하여 정하는 방법에 따른다"고 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규정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참여연대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표면이율 2%, 만기 5년의 증금채 1,300억원어치 인수로 한화그룹이 떠안은 부담의 현재가치는 295.41억원에 불과하다(아래 계산식 참조). 1조원 이상의 공적자금 투입을 유발한 한화종금의 부실에 대해 300억원이 채 안되는 부담으로 경제적 책임부담 의무를 다 이행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이것으로 부실원인에 대한 실체적 조사를 생략한 채 대주주들의 책임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는가.

상기 금감위의 '부담기준'은 상위법령의 위임 한계를 벗어난 자의적인 규정이다. 부실금융기관 책임자가 금융업에 신규 진출하는 것은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는 상위법령의 입법취지를 금감위 내부 지침에 불과한 '부담기준'에 의해 완전히 무력화시킨 것이다. 특히 '부담기준'의 3호 나목에서 "채권의 발행조건을 발행기관과 금감원장이 협의하여 정한다"고 한 것은 그 어떠한 논리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초법적인 규정이다. 금감원장이 채권의 이율과 만기를 조정함으로써 부실금융기관 책임자가 부담할 경제적 책임의 현재가치를 자의적으로 변경할 수 있기 때문이며, 공적자금의 실질적 부담자인 국민이 금감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대해 사법적 판단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한생명 인수 문제에서 한화그룹의 과거 부실책임 문제는 종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거의 실패경험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따라서 동일한 실패를 반복할 수 있는 위험한 태도이다.

3. '유가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 문제

또한, 금감위는 지난 5월말 '유가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유상증자시 할인율 제한(최대 10%) 규정의 예외로서 금감위원장에게 포괄적 재량권을 인정(제57조 제3항 제1호)하였다. 즉 외자유치 등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을 위해 국내에서 주식을 발행하는 경우에 금감위원장이 승인을 하면 할인율 제한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투신의 해외매각을 위한 졸속 조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즉, 지난 해 AIG컨소시엄과 협상하면서 현대증권 이사회가 애초 신주 발행가를 8,940원으로 결의했다가 AIG컨소시엄의 요구에 의해 7,000원으로 발행가를 재조정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금융감독당국이 현대증권 이사회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논란이 일자, 이번에 아예 규정 자체를 바꿔서 법적 논란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AIG컨소시엄과의 협상내용에 따르면, 현대증권에 대한 출자금은 즉각 현대투신에 재출자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AIG컨소시엄은 추가적인 자금부담 없이 우량기업인 현대증권의 경영권도 인수함으로써, 결국 현대투신의 부실은 현대증권의 소액주주들에게 전가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굴욕적인 '끼워 팔기'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던 만큼, AIG컨소시엄과의 협상 결렬 후 새로운 매각협상에서는 무엇보다 매각 조건과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금융감독당국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부실금융기관 처리 실적에만 연연해하고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개정 전의 규정에 따라 10% 할인율을 적용한 현대증권의 신주 발행가는 10,000원을 상회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달라진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금감위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맡기도록, 즉 기존의 발행가 7,000원을 새로운 인수희망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이번의 규정 개정은 금감위로 하여금 투자자를 보호하고 공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유상증자에 따른 재무관리기준을 정하도록 하고 있는 증권거래법 제192조(주권상장법인등의 재무관리기준)를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함으로써 위임의 한계를 일탈하고 있으며, 결국 투자자나 여타 이해관계자에게 손해를 초래하고 다른 상장회사와의 형평성도 침해되는 문제를 낳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중요한 규정을 개정하면서 금감위는 '규정변경 예고'라는 통상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금융감독당국은 미리 정해진 방침에 맞추어 규정을 사후적으로 개정함으로써, 적법 절차를 가장한 자의적 개입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실패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4. 참여연대, 감사원에 감사 청구

재량적 판단의 한계를 엄격하게 준수할 때 금융감독당국의 능력과 위상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제고될 것이며, 이는 금융감독당국에 허용된 재량적 판단의 범위를 더욱 확대하는 선순환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금융감독당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금융감독당국이 단기적 관점에서 부실금융기관 처리 실적 쌓기에 급급하는 한, 상위법령의 위임 한계를 넘는 자의적 개입을 계속하는 한, 금융감독당국은 불신의 대상일 뿐이다.

참여연대는 상기 '부실금융기관 대주주의 경제적 책임 부담기준'과 '유가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이 상위법령이 허용한 위임입법의 한계를 일탈했다고 판단하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 감사원에 감사를 청구하였다. 감사원의 전향적인 결정을 통해 우리 나라 금융감독 시스템의 발전을 위한 일대 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 참고자료

한화종금에 대한 한화그룹의 부실책임 실제 부담액 계산식

□ 기본사실관계

부담 주체: 한화증권

부실금융기관 : 한화종금

부담방법 : 만기 5년, 2% 금리의 1,300억원 증금채 매입

00. 8.31 100억원 - 동일자 5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 8.17%

00. 9.30 500억원 - 동일자 5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 8.42%

00.12.29 700억원 - 동일자 5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 8.69%

□ 계산근거

할인율 : 동일자 5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 사용

이자 : 3개월마다 지급

□ 계산결과

00. 8.31 매입한 100억원 증금채 현재가치 24.62억원

00. 9.30 매입한 500억원 증금채 현재가치 127.22억원

00.12.29 매입한 700억원 증금채 현재가치 143.57억원

□ 한화증권이 한화종금에 대해 부실책임이라는 입장에서 총 1,300억원을 분담하였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실제 현금으로 보전된 것이 아니라 만기 5년 연금리 2%의 증금채 매입이므로 결국 한화증권은 2%와 시중금리만큼의 차이만을 보전한 것임.

따라서, 한화증권이 실제 부담한 손실액은 295.41억원임.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센터 소장)


2002/06/07 01:47 2002/06/07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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