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개정 1년 만에 우려할만한 사건 발생...말없는 재경부



2001년 재경부는,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의 재벌그룹에 속한 투신운용사와 증권투자회사(뮤추얼펀드)가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을 경우, 그 계열사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한 규제를 풀어 의결권 행사를 허용하는 법개정을 추진했다.

그동안 재벌계열 금융기관들의 의결권 행사를 규제했던 이유는, 투자자들이 맡긴 재산으로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고 이를 통해 재벌 총수의 지배권을 유지, 강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재경부는, 주가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 투자자들의 신탁재산에 명백한 손실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안건의 경우에는 같은 재벌계열사라 하더라도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로 법개정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당시 참여연대는, 이렇게 법이 바뀌면 재벌 금융사들이 투자자들의 신탁재산 보호는 뒷전으로 미루고 엉뚱하게 그룹총수의 이익을 위해 고객의 재산을 사용할 것이며, 소액주주들의 경영참여와 견제를 차단하는데 이를 교묘히 이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금융업에 진출하려는 재벌들의 욕구가 커질 것이며,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투신사 등에 맡겨진 투자자들의 자금으로 계열사 주식을 필요이상으로 매입하는 등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라는 대원칙이 훼손될 것이라며 법개정을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재경부의 방안대로 2002년 4월 법이 개정되었다.

참여연대가 의결권 행사 허용 후 실태 조사를 해보니..

그런데 최근 이와 같은 우려가 단지 '기우'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참여연대는 지난 9월 14일 재벌계열 투신운용사와 뮤추얼펀드가 신탁재산으로 보유 중인 계열사 주식에 대해 주주총회 의결권을 행사한 내역을 조사하여 발표하였다.

조사 결과, 자산규모 2조원이 넘는 재벌그룹 중에서 투신운용사를 거느리고 있는 곳은 모두 11곳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삼성그룹의 삼성투자신탁운용과 삼성인덱스프리미엄30혼합형펀드 등 4개 뮤추얼펀드 만이 올해 2월의 삼성전자, 삼성SDI, 삼성전기 주주총회와 올해 6월의 삼성화재해상보험 주주총회에서 경영진이 제안한 안건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비해 현대투신운용이나 LG투신운용 등 나머지 재벌그룹 소속 투신운용사 등은 의결권을 아예 행사하지 않거나 다른 주주들의 투표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는 쉐도우 보팅(shadow voting)방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했다. 주주총회 안건은 이사선임과 정관 변경 등으로 삼성이나 다른 재벌그룹이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도, 삼성 계열 금융사들만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다.

삼성계열 금융사들만 의결권을 행사한 이유와 법규에 부합하는지 의문

삼성그룹만이 지난 2002년 4월 개정된 의결권 제한 완화 규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2001년 당시 재경부에 법개정을 적극적으로 요청한 곳이 삼성그룹이었다는 항간의 추측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삼성그룹 출신의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이 지난 8월, 공정위가 재벌 금융사의 의결권 행사 실태를 조사하겠다고 한 것을 두고 “외국에는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비판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 결국 계열 금융사를 통해 그룹 계열사의 경영권을 방어하겠다는 삼성그룹의 의지가 확인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삼성그룹의 경우 계열금융사인 삼성생명이 에버랜드에 이어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삼성증권과 삼성투신운용도 경영권 방어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삼성투신운용 등의 의결권 행사 내용은 과연 법개정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인가.

개정된 법에 명문화되어 있듯이 재벌계열 금융기관의 의결권 행사는 임원선임과 해임, 정관변경이나 합병안건 처리여부가 “신탁재산에 명백한 손실을 초래하는 경우”에 한정해서 허용되어 있다. 그러나 참여연대는 이번 삼성계열 금융사들의 경우는 이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투신운용 등이 의결권을 행사한 안건은 정관변경 안건과 임원선임 안건이었다. 정관변경안건은 스톡옵션 부여 방식에 대한 것으로, 증권거래법은 임직원에게 총발행주식의 10%내에서 스톡옵션을 부여할 경우 이사회 결의만으로 가능하도록 하고 있고, 삼성화재해상보험의 정관도 이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금융기관의 경우에는 이사회 결의에 따라 스톡옵션을 부여하더라도 주주총회에서 사후 승인을 받도록 하라는 금융감독위원회의 정책 지도에 따라 삼성화재해상보험도 지난 6월 정기주총에서 정관개정안을 상정한 것이다.

참여연대는 증권거래법에 따라 정해진 정관을 금감위의 지도에 따라 변경하는 안건이 “신탁재산에 명백한 손실을 초래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사선임 안건에 있어서도, 경영진이 추천한 사람들만 이사 후보로 나왔고 또 선임안건을 부결시키기 위한 의결권 대결이 벌어지지도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이 안건에 삼성투신운용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으면 신탁재산에 명백한 손실이 초래될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참여연대의 입장이다.

만약 이 안건들이 ‘신탁재산에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 명백히 예상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면, 이사선임이나 정관변경 등의 안건은 그 구체적 내용을 불문하고 모두 해당이 될 것이며, 따라서 재경부가 제한적으로만 허용한다 해서 만든 그 단서는 무의미해지게 되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금감위 조사 착수, 재경부는 공식 반응 없어

참여연대의 문제 지적 이후 금감위가 구체적인 실태를 조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또한 2001년 당시 재경부의 법개정에 우려를 표명했었다는 점에서 금감위의 조사 결과가 주목된다.

금감위의 조사결과도 지켜봐야겠지만, 과연 이런 상황에 대해 당시 법개정을 주도했던 재정경제부는 어떤 입장일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참여연대가 이 조사결과를 발표한 이후 몇몇 언론이 보도를 하여 이 문제가 알려지게 되었지만 재경부는 아직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와 관련전문가, 일부 국회의원들의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법개정을 밀어붙인 재경부가 삼성투신운용 등의 의결권 행사 사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입장을 밝힐 차례이다. 더구나 재경부는 현재 ‘산업자본의 금융지배 방지를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기구에서 꼭 다루어야 할 현안이 아닌가.
박근용
2003/09/17 15:59 2003/09/1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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