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정치자금을 둘러싸고 한 편의 코미디가 진행되고 있다. 돈의 진짜 주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남의 돈을 주고받은 사람들끼리 ‘고해성사 후 사면하자’, ‘경제가 어려우니 이제 그만 덮자’며 난리다. 그 돈의 주인에게 물어보기라도 했나? 남의 돈을 훔친 사람들이 무슨 권리로 사면 운운하고, 무슨 우국충정에 경제의 어려움을 말하는가.

남의 돈(other people's money). 그렇다. 이것이 핵심이다. 자기 돈을 썼다면, 그것이 미풍양속을 크게 해치지 않는 한,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의 돈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 돈의 주인보다 더 엄격한 의무를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근대 시민사회와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은 이 기본원칙을 깨뜨렸다. 여야 정치인들이 사용한 정치자금이 자기 돈이 아님은 물론이고, 이 돈이 현대 정몽헌 회장이나 SK 손길승 회장의 돈이 아니라는 것 역시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이 돈은 투자자와 저축자의 재산이다.

그러면, 남의 돈을 자기 멋대로 주고받는 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정경유착은 규제자(정치권력)와 피규제자(경제권력) 사이에 이루어지는 불법적 경제거래를 의미한다. 즉 규제는 경쟁제한과 불투명성을 초래하고 여기에는 필히 독점적 지대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규제자와 피규제자가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곧 정경유착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에 입각한다면, 개혁정책의 첫 번째 원칙으로서 규제완화가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상의 전통적 해석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제대로 진단한 것도 올바른 처방을 내린 것도 아니다. 이러한 해석은, 하위직 공무원의 대민 접촉업무에서 발생하는 부패의 예에서와 같이, 규제자가 피규제자에 대해 교섭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경우에는 비교적 잘 적용된다. 그러나 핵심 기득권세력의 문제, 특히 정경유착의 문제에서는 이러한 해석은 본말이 전도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 과거에는 정치권력의 직접적 규제, 예컨대 금융ㆍ세제상의 특혜나 신규사업 인허가권이 독점적 지대를 창출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거대재벌은 규제와는 무관하게 스스로의 힘에 의해 시장질서와 사회질서를 왜곡함으로써 독점적 지대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규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대가로 독점적 지대의 일부가 제공된다.

다시 생각해 보자. 오늘날 한국사회 전체에 썩은 냄새가 진동할 지경에 이른 것은 과잉규제(비합리적 규제의 존재) 탓인가 아니면 과소규제(합리적 규제의 부재) 탓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통적 해석과는 달리, 건전한 시장질서와 사회질서를 창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합리적 규제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것, 이것이 정치부패와 기업부패의 근본원인이다. 현대, SK 등 재벌들이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이유는 그들이 이미 저지른 다른 불법행위를 눈감아 달라는 것 아닌가. 이것이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경유착의 두 주체인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한 목소리를 내어 규제완화를 외치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건전한 시장질서와 사회질서는 자유방임의 진공상태에서 자동적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남의 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담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투명성이다. ‘공시 또는 포기’(disclose or abstain)의 원칙은 증권시장에서만 적용될 것이 아니다. 남의 돈을 사용하는 사람은 돈의 주인에게 수입과 지출 내역을 투명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받지를 말아라. 정치자금 후원자의 명단은 왜 공개하지 못하나, 하나의 통장에서만 정치자금 출납이 이루어지도록 하지 못할 이유가 무언가, 돈세탁방지법에서 정치자금은 왜 뺐나, 무엇이 무서워 거액 현금거래 보고제도를 도입하지 못하나.

남의 돈을 무서워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의 주인의 권리를 강화해야 한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를 보호할 필요는 없겠지만, 피해구제 수단이 없어서 눈뜨고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제대로 된 집단소송제도가 도입되어 있었다면, 남의 돈을 수백억원, 수천억원씩 빼돌릴 간 큰 기업인이 생기겠는가.

원칙은 지극히 간단하며, 방법도 이미 알고 있다. 정치인과 기업인이 남의 돈을 멋대로 쓰고 있다면, 돈의 주인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경향신문 10월 29일자에도 게제됩니다..
김상조(한성대 경상학부 교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2003/10/28 20:13 2003/10/28 20:13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Economy/trackback/959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