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도 제 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허수(虛數)는 한자 풀이대로라면 비어 있는 수 혹은 없는 수라는 뜻일 게다. 영어로는 Imaginary Number이니 ‘가상의 수’쯤으로 풀이해야 되지 않나 싶다. 이 허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그리스의 헤론과 디오판투스 시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수학자 카르다노(Cardano, 1501-1576)가 방정식의 해법으로 음수의 제곱근 즉, 허수, 가상의 수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수학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허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데카르트(Descartes,R.,1596~1650)는 그의 저서 『기하학』에서 “참인 근이나 거짓인 근(음수근)이 반드시 실수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허수일 때도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허수(Imaginary Number)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들을 수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673년 암호학자 존 월리스가 “허수가 상상의 수일지는 모르지만 음수보다 더 황당하지는 않다”고 말한 이래 19세기 가우스에 의해 기하학적으로 시각화되었으며 수학자들은 점차 이 허수를 분수, 무리수처럼 수의 한 멤버로 받아들였다. 오늘날 이 가상의 수 허수는 프렉탈 곡선에서 공학설계 및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만날 수 있다.

수학과 문학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빈틈없는 논리와 정교한 이론으로 무장한 수학과 감성과 상상력의 영역에 속하는 문학은 어찌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그리스 시대 수학자들이 동시에 철학자였던 것처럼 문학에 소질을 보인 수학자들도 있었다. 사원수론의 해밀턴, 행렬 이론의 실베스터, 로그를 발견한 네이피어는 시인이거나 소설가로도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로 시인의 기질이 전혀 없는 수학자는 결코 완벽한 수학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이 말은 곧 상상력은 시에서 뿐 아니라 수학에서도 중요한 요소라는 의미일 터이다. 어떤 의미에서 상상력은 모든 것의 신이다. 신이 창조와 동의어라면 말이다.

김훈의 「화장」은 2004년도 제2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화장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내를 딸과 교대로 병간호하고 있는 50대 남자가 회사 부하 여직원에 대해 연모의 정을 품고 있지만 아내의 장례가 끝나고 돌아와 보니 그 여자 직원은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래서 그는 사표를 수리했다는 내용이다. 어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줄거리에 살을 붙이고 생명을 불어넣어 평론가들의 찬사를 이끌어 낸 것은 소설가 김훈의 힘이다. 그가 택한 주제가 죽음과 생명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서술은 읽기에도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부하 여직원에게 상상 속에서 말을 걸고 생활에 대해서 그래서 비켜갈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주인공은 현실에서는 끝내 그녀에게 속을 털어놓지 않는다. 전립선 이상으로 늘 몸이 무거운 그에게 갓 입사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변해 가는 한 여성은 생명의 환희 그 자체였으며 그래서 현실 속에서는 감히 말을 건넬 수조차 없는 존재였을 터이다. 그러나 병들어 시들어 가는 인간의 몸에 대한 그의 묘사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시선에 잡힌 젊은 여성의 생명력 넘치는 존재에 대한 자각은 존재와 소멸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뼈아픈 자각일 것이다.

연이어 김훈의 수필 두어 편이 더 실려 있다. 나는 늘 작가는 작품으로서 독자와 만나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김훈이 느티나무 카페에서 한동안 펜을 잡고 있던 그 순간에 일부러 그를 외면했다. 글은 사람 그 자체보다 더 세련되고 다듬어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수필이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작가의 체취라고 한다면 이 두어 편의 수필은 작가로서의 김훈 이전인 그 어떤 것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수상소감에서 서사 중심의 전통적 소설이 문학 중심권에서 밀려나게 될 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낡고 오래된 것 속에서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찾는 미학이 소설이라고 스스로 답한 문순태의 「늙으신 어머니의 향기」는 어머니의 고약한 냄새가 실은 그녀가 살아온 역사임을 담담하고도 노련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구효서의 「밤이 지나다」는 우리 존재가 이 지구에 한정되지 않고 저 먼 우주까지 팽창하면서 근원적인 고독은 더욱 깊어질 것이며 슬픔 역시 확장될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한다. 전성태의 「존재의 숲」과 박민규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서로 넘나들고 있다는 의미에서 주제의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떠오르는 작품이다.

「칵테일 슈가」는 시작과 끝이 교묘하게 접선하는 구성의 묘미가 있다. 그에 비해 하성란의 「그림자 아이」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 때문에 여운이 남는다. 김승희의 「진흙 파이를 굽는 시간」과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는 둘 다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듯하다. 존재의 기반이 얼마나 허술하며 얇은 유리막으로 되어 있는지. 그것은 약간의 진동에도 금새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린다는 절망적인 자의식을 드러낸다. 수상작 모두 수작이라는 심사위원들의 평을 접어두더라도 겨울이 끝날 이즈음에 한 번 뒤적여 볼 만한 작품들이라고 한다면 한낱 독자로서 너무 주제 넘는 짓인가.

나는 문득 허수의 개념을 상상한 그 최초의 수학자를 떠올린다.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수, 그러나 반드시 어딘가는 존재하는 수. 그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눈앞에 드러나는 실체의 한 자락과 마주치게 되리라는 상상의 힘. 마치 소설이 상상력의 산물이긴 하지만 반드시 우리 삶을 어떤 일면을 드러내는 그 무엇이라는 것과 너무도 흡사한 발상이 아닌가.

소설 읽기는 상상력의 힘을 빌어 삶을 체험하는 일이다. 어쩌면 고통스러운 체험을 자초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 읽기가 단지 고통일 수만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작가의 상상력 덕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지은
2004/03/01 00:00 2004/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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