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봄이 찾아올 때쯤 태국은 1년 중 가장 무더운 시기가 시작된다. 그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프간에서 폴리네시아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각국 젊은이들이 속속 돈무앙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의 생김새, 피부, 언어, 종교 등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천사의 도시 방콕에 모여든 이유는 오직 하나. 한결같이 평화의 사도를 자임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각자가 하나에 이르자(Each one Reach one)

세계청년평화정상회담(World Youth Peace Summit, 이하 WYPS)은 2000년 ‘밀레니엄세계평화회의’를 계기로 결성된 ‘세계종교지도자회의’가 산파 역할을 했다. 지난 2월25일부터 4일 동안 열린 이번 행사는 오는 10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대회를 준비하는 첫 지역회의다. 태국의 불교대학이며 존경받는 전(前) 국왕 라마4세의 이름을 딴 ‘마하출라롱콘대학’과 일종의 불교선원인 ‘사티라-다마사탄’이 함께 마련한 이번 행사는 종교, 문화, 지역을 넘어 미래의 지도자인 젊은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자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젊은이다운 새로운 사고방식과 무한한 가능성으로 평화를 위한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자는, 그리고 현재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태국의 주요 불교 행사가 열린다는 방콕 외곽의 부다몬손에서의 첫날. 우볼 라트나 공주가 축사를 하는 등 이 WYPS 행사에 태국 정부는 깊은 관심을 보였다.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됐고, 여러 토론회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려는 참가자들의 열의가 인상적이었다.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ESCAP)’ 김학수 사무총장의 축사로 시작된 둘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는 유엔회의장에서 인간존중, 경제적 불평등 등 7개 분야로 나누어 분임 토의를 하고 행동강령을 논의해 이를 채택하는 일정이었다.

그 결과 세계평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할 8가지 요소를 선정했다. 종교, 문화, 국적의 차이를 인정하는 존중심(respect), 정치, 경제, 성(性), 교육에 있어 기회의 평등(Equality), 보호되어야 할 천연자원(Natural Resources), 의식주, 건강, 에너지, 안전 등의 기본 요구(Basic Needs),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보편적인 교육(Education), 참여적이고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거버넌스(Governance), 국제적 협력(Global Cooperation)과 소통(communication)이 그 것이었다. 다음날 이를 토대로 구체적인 행동계획에 관해 논의했다. WYPS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젊은이의 참여를 높이고 참석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인 네트워크를 결성,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력한 대안으로 나온 것은 역시 인터넷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인터넷은 이미 일상적인 도구로 자리 잡았지만 이 또한 국가별 정보격차라는 장애에 부딪혔다.

가능성과 한계

새천년을 맞아 온 인류의 한결같은 염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평화’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끝없는 보복전,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9.11테러, 여성과 아이들이 최대 희생자가 된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 모처럼의 화해 분위기를 꽁꽁 얼어붙게 만든 북핵문제 등이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들의 염원을 짓밟고 있다. 그뿐 아니다. 국가 내부의 정치.경제적 불평등이 그러하듯, 국가들 간 불평등 관계가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기성 지도자들에게만 이 문제를 맡겨둘 수 없다는 작은 움직임이 일고 있다. 기성세대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평화의 문제를 종교지도자들이 먼저 들고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갈망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해 넘어야 할 산도 있다. 이번 대회가 각 분야를 아우르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평화 네트워크 구축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종교적 화해라는 배경에서 아직 벗어나진 못한 듯 하다. 주최가 불교대학이고 태국의 소승불교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개개인이 먼저 평화에 대해 인식하고, 가족과 이웃을 변화시키자는 주장은 자칫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를 도외시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도 있다.

또한 이번 행사가 젊은이답지 않게 치러진 점도 있다. 참석자들이 지나치게 고급스런 호텔에 묵고 필요이상으로 비용을 많이 들인 행사였다. 본래 취지와 달리 기성세대의 행태를 답습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계속 이런 식의 행사라면 앞으로도 재정문제가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다양하지만 바라는 건 한가지 ‘평화’

참가국이 많았던 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먼저 인사를 하며 말을 걸어왔다. 버마(현 미얀마)에서 온 ‘사이 멍’은 태국어가 유창하다. 현재 방콕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종족어까지 4개 언어를 구사한단다. 티벳에서 온 사람들은 현재 인도에서 살고 있는 난민으로 자신들의 국기를 품에 안고 온 그들의 모습에서 불과 60여 년 전 우리 역사의 아픈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국민총생산(GNP)보다는 국민의 행복(GNH)을 중시해야 한다는 히말라야 산자락의 작고 가난한 나라 부탄왕국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나즈룰은 남북관계에 관한 논문을 쓸 정도로 한반도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에서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니시다는 한국과의 문화교류가 중요하다며 우리 게임소프트웨어 수준을 한껏 치켜세웠다. 동경의 WYPS 사무국차장인 아사기리는 한국과 일본의 이라크 파병문제에 대한 우려와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보내줬다. 행사 마지막 날 밤 조촐한 뒤풀이에서도 따뜻한 만남이 계속됐다. 성격이 활달한 네팔의 아차리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기꺼이 자신의 나라로 놀러오라던 솔로몬제도의 토니, 비밀로 해야 한다면서 조심스레 맥주를 마시던 인도네시아 무슬림 친구까지,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행사기간 내내 자원 활동으로 한 몫 했던 태국 대학생들. 이 모든 이들의 얼굴이 정겹게 떠오른다.

백종운
2004/04/01 00:00 2004/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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