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마당] <인터뷰> 충남 서천초등학교 교사 박소진 회원
2004/2004년 04월 :
2004/04/01 00:00
참여에 필요한 건 거창한 신념 아닌 '작은 용기'
갈대밭이 길게 펼쳐진 금강하구둑을 지나 서해바다가 가까워지는 충남 서천군 마서면. 길가에 핀 쑥과 이름 모를 풀들, 불어오는 강바람이 온몸 가득 봄기운을 전해주는 봄의 길목을 따라 서천초등학교에 닿았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녹음용 카세트테이프를 살 요량으로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찾았지만, 논과 밭 사이 드문드문 자리 잡은 집 말고는 학교가 전부다. 순간의 당황스러움은 학교 안으로 들어서자 곧 누그러졌다. 1-1반 2-1반 3-1반…. 운동장 너머 한 동짜리 건물에 쪼르륵 붙은 앙증맞은 팻말.
한 학년에 한 학급뿐인 학교는 이곳에 교사로 재직 중인 박소진 회원과 서남초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왠지 도시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인간적인 정이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기대로.
전교생 78명, 모르는 얼굴 없어요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인사차 먼저 만난 교장선생님부터 불편하고 권위적인 분이 아니라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배려할 줄 아는 화통한 분이었다. 취재하러 어떻게 이 멀리까지 왔냐며 맞아주시는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박소진 교사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흠씬 묻어났다.
“우리 박 선생은 전교조에 가입해 있고, 난 교총 서천지회 부회장입니다. 갈등이 있고 불편하기 쉬운 관계지만 우린 잘 지낸답니다. 늘 웃고 열심히 일하는 박 선생과는 전교조고 뭐고 갈등이 있을 게 없죠. 아침 출근길에 빵을 구워 와서 선생님들과 함께 나누는 박 선생을 난 그냥 ‘박뚱’이라고 부른답니다. 우린 이런 사이죠. 하하….”
점심급식시간. 작은 식당에서는 교장선생님부터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점심을 먹는다. 전교생 78명, 교직원 15명, 모두 합쳐도 1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학교. 모두가 서로의 이름을 알고 지내는 정겨운 곳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생활하는 박소진 회원은 어떤 사람일까?
4년 간 종합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전직, 보건교사로 교직에 들어선 박소진 교사는 올해로 10년차 교사이면서 서남초등학교 생활 4년째를 맞고 있다. 역시 교사인 남편이 경기도 수원에서 재직하고 있는 바람에 가족이 흩어져 지낸다. 성우, 수민 두 아이는 서천에서 박 교사와 생활하고 있다. 각자 근무하는 지역이 달라 결혼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온전히 함께 생활해보지 못한 이산가족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지친 내색이나 어두운 그림자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생활을 힘들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에도 따로 살아요. 남편은 시부모와 함께, 저는 아이들과 함께 친정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교사의 전직이 쉽지 않거든요. 하지만 방법을 찾고 노력하면 곧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겠죠. 예전에 제가 인터넷을 통해 전국 별거교사의 현황을 조사하고, 이들을 모아서 함께 문제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다른 직종의 별거부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이렇게 실태를 알리고 별거교사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애썼던 그때 일이 큰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좋은 추억이 되고 있답니다.”
현실에 순응하기보다는 도전하고 새 길을 찾는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밝음과 당당함이 느껴졌다.
문제를 느끼고, 제기하고, 변화시키고
참여연대에 가입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예전에 병원에 근무하면서 노조를 창립하던 중에 내일신문을 접했는데, 이 신문을 통해 『인물과 사상』을 알게 됐다고 한다. 박 교사는 그 책에서 소개한 인권운동사랑방의 『인권하루소식』을 받아보다가 ‘참여연대’란 네 글자를 발견했다. 인권소송을 제기하면서 후원을 요청하는 참여연대의 글을 보고, 바로 회원가입을 했단다. ‘참여’하기 위해서는 거창하지는 않지만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 박 교사에게선 작은 용기를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단아한 향기가 느껴졌다. 거창한 신념은 쉽지만 작은 용기를 내는 건 어려우므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힘을 보태고 있는 곳이 참여연대만은 아닐 듯싶다.
“마음은 간절한데 여건상 쉽지 않죠. 아이들이 좀 더 크면 그땐 정말 다양한 활동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은 전교조 충남지역 보건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어요. 10년 전 교직을 시작하면서부터 함께 한 전교조는 보건위원회가 결성된 99년부터 좀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보건위원회 활동 가운데 ‘양호’에서 ‘보건’교사로 명칭을 바꿔낸 건 큰 성과였어요. 보건교사의 위상을 바로 세워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뿐 아니라, 보건교육과 보건관리의 중요성을 사회가 인정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답니다.”
최근 대통령 탄핵 이후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거센 항의와 민주주의 요구가 촛불시위를 통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이곳 초등학교는 어떨까.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나 연일 보도되는 촛불시위에 대해 아이들로부터 혹시 질문을 받지는 않는지 물어보았다.
“아직 그런 일은 없었어요. 2000년도 낙천낙선운동을 할 땐 그런 질문을 받고 아이들에게 풀어서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언제 그런 질문을 받을지 모르죠. 온 나라가 술렁이니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관할 수는 없는 문제죠. 탄핵안이 가결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이 어찌나 쿵쾅대던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동생과 전화하는데 동생 역시 분하고 억울해 했어요. 그러면서 총선을 앞당겨 내일 당장 투표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의 분노를 당장 표출하고 싶고, 혹 지금의 분노를 잃어버릴까 겁난다면서요. 이번 총선에선 꼭 국민주권을 무시하는 썩은 정치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에게 현실 그대로를 보여줘야
박교사의 책상 위엔 동화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교사인 그는 동화책에 관심이 많다. 요즘 동화책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소재들을 다루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폭력 묘사로 가득 찬 만화 역시 문제투성이여서, 아이들이 책에 나오는 언어를 그대로 따라하면서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걸 보고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또 많은 부모들이 좋은 책이라면 30권, 100권씩 세트로 책을 한꺼번에 사주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와 아이가 좋은 동화책을 한 권 한 권 직접 고르고 함께 읽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부모 세대의 역사를 알려주는 책들이 좋아요.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함께 이해하도록 돕는 책,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 등을 자제한 책들도 좋고요. 언젠가 6살 난 둘째 아이가 파란 딸기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봤어요. 그림책에서 빨간 딸기만 봤으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자연현상과 일상을 자연스레 알려주는 동화책이 필요해요. 아이들이 좋은 책을 접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먼저 부모나 교사의 책임이죠. 어른들이 좋은 책을 골라서 먼저 읽고 아이들에게 권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저도 열심히 읽고 있답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이 읽어야 할 책이 뭔지 고민하고, 좋은 책을 접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그는 좋은 선생님, 좋은 엄마이기 전에 아이들의 좋은 친구였다. 필자도 오랜만에 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 좋은 친구를 만난 기분을 한껏 느끼며 서울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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