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마당]<인터뷰> 참여연대 10년지기 박영대 회원
2004/2004년 01월 :
2004/01/01 00:00
"사람을 볼 수 있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요"
강산이 변해도 끄떡없었던 ‘오래된 가족’
무엇이든 10년을 한결같이 해왔다면 그 정성이 오죽할까. 오늘 만난 박영대 회원은 강산이 한 번 변할 만한 시간을 참여연대와 함께 지내온 ‘오래된 가족’이었다. 이러한 가족만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 그에게 우선 1994년 가을 참여연대의 첫 인상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했다.
“참여연대는 창립 준비할 때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친분이 두터운 분이 실무자로 있었지요. 당시만 해도 경실련이 대표적 시민운동조직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경실련의 운동에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보았는데요, 하나는 과거의 민주운동방식에 대해 경실련에서 폄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죠.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그런 분들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태동됐음에도 말이지요. 다른 문제는 언론 플레이 중심의 문어발식 사업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당시 이대훈, 박원순 같은 분들이 모여 제대로 된 시민운동단체의 원칙을 논의하게 되었고, 신선한 움직임에 저도 바로 참여를 결정했지요.”
그는 이렇게 말한 뒤, 자신이 단지 한 달에 만 원만 낼뿐인 ‘만원 회원’이라고 겸연쩍게 웃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만원 회원’으로 활동하는 곳들이 주르륵 줄 설 정도이니 그 부담도 만만치는 않을 듯했다. 박영대 회원은 청솔의집, 해방문화사랑회, 기찻길옆공부방 등등에 참여하고 있고, 우리신학연구소, 지학순 정의평화기금에서 실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만하면 시민운동의 ‘리베로’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우리신학연구소는 우리에게 맞는 천주교 신학을 연구하는 곳이다.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현실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신학을 만들기 위해 10년 전 만들었다. 교회를 움직이는 논리가 신학이므로 이를 개혁하지 않고는 교회 쇄신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는데, 졸업 후 회사는 딱 6개월 다닌 게 다입니다. 취직하고 싶은 생각이 원래 없었어요. 회사에 들어가서 잘 되는 것이라면 사장되는 건데, 제 인생을 그렇게 낭비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학생 때도 가톨릭 청년학생운동을 했었고, 1986년 가을부터 신학연구소를 만들기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지요.”
딸들과 함께 한 촛불시위
그는 1990년에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와 결혼해서 13살 혜진, 11살 혜민, 그리고 겨우 2살인 늦둥이 혜빈 이렇게 세 딸을 두었다.
“딸만 셋이라고 하면 어떤 분들은 아들 낳으려다 그랬나 보다 하는데, 절대 아닙니다. 생기는 대로 낳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하하. 늦둥이로 본 막내가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첫째, 둘째 딸은 촛불시위도 함께할 만큼 커서 아주 든든합니다.”
하긴 ‘아버지가 워낙 다양한 활동을 하니 이 가족에게 시민운동이란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스며드는 것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그가 또 하나 밝힌 활동이 있는데,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이다. 이 일도 꽤 오래 하고 있다는데 “요즘은 사람이 없어서 무얼 시작하면 그만둘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에서는 유기농산물을 유통시키는 일을 합니다. 천주교 쪽에서 하는 일이라서, 미사 전후에 신도들이 유기농산물을 살 수 있게 해주고, 또 일반인들은 생협 매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하지요.”
그의 눈에 비친 요즘 농촌의 모습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농촌에서 버스를 타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경로석의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다들 연세 드신 분들밖에는 없으니까요. 설문조사를 해보면 농민들은 대부분 ‘농사는 내 세대로 끝이다’라고들 말합니다. 걱정이에요. 저희가 권장하는 유기농법도 사실 나이 드신 분들이 하기에는 좀 힘든 것인데,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옮겨가야 할 텐데요.”
그에게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귀농을 할 생각도 있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농사를 잘 지을 자신이 없어서 못 갈 것 같습니다. 도시를 벗어나고 싶긴 하지만요. 귀농자들이 늘지 않으면 이대로 농촌이 점점 죽어가고 말 거라 생각될 만큼 우리 농촌 문제는 심각합니다. 현재로선 한 지역에서 농산물 가공식품까지 복합적이고 완결적인 경제구조를 갖추는 것이 대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참여연대의 ‘건실한’ 참여비판자
참여연대의 운동은 명망가 중심이 아닌, 말 그대로 시민이 참여하는 운동이다. 박영대 회원은 참여연대가 10년 전 그런 기본정신으로 세워진 것을 똑똑히 보았고, 이것이 지금도 잘 지켜지고 있는지 계속 ‘감시’ 중이다. 그가 보기에 현재까지는 파란불.
“앞으로도 올곧게 갈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조직이나 운동의 규모가 처음보다 커졌다든지 작아졌다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정신이 그대로인가가 중요한 것이지요.”
이렇게 참여연대의 갈 길을 주시하는 것 말고 실제로 행동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짓궂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가 털털한 웃음을 곁들여 대답하기 시작한다.
“전에 이동통신료 인하운동을 할 때 이메일로 참여연대 메시지를 몇 백 통 전달했어요. 그 사람들이 또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을 하게 하고…. 생각해보니 별로 한 일이 없네요. 당장 떠오르는 게 그 일밖에 없어요(웃음).”
사람을 볼 수 있는 마음으로
그가 이렇게 여러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또 많은 고민들을 하며 산다고 해서 표정까지 심각한 사람이 아닐까라고 성급히 예상해선 안 된다. 박영대 회원은 얼굴이 밝고 미소가 부드러운 남자였다. 다소 엉뚱하기도 하지만 혹시 명상 같은 것을 하는지 궁금해져 질문을 던져보았다.
“따로 명상을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책은 소위 ‘마음 공부파’ 저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틱낫한 스님, 이현주 목사님의 글을 좋아하고 즐겨 읽습니다. 시간을 내서 명상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일상 안에서 이루어져야겠지요. ‘마음공부 한답시고 자기공부만 하면 되겠나, 다른 이들을 도우면서 살아가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삽니다. 그렇게 될 때 틱낫한 스님 말씀처럼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를 띨 수 있지 않겠어요.”
시계를 보니 어느덧 그와 이야기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참 편안하고 유쾌하고 건강한 만남이었는데, 아쉽지만 그에게 마지막 말을 부탁했다. 참여연대의 또 다른 10년을 맞이하면서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일까.
“좋아하는 선배 하나가 노숙자들을 위한 밥집을 합니다. 작은 식탁 두 개가 전부이지요. 많이 앉아야 여덟 명쯤 앉을까요. 왜 그리 작은 밥집을 하냐고 물으니, 그래야 사람 대접을 해줄 수 있다고 대답하더군요.
입에 병이 난 사람은 따로 죽도 끓여주고, 입맛 없는 사람은 게장도 담가 주고, 밥 다 먹고 나면 담배도 챙겨 줍니다. 벽에 흰 칠판이 있는데, 그곳에 3번 다녀간 사람들은 VIP 명단에 오릅니다. 이렇게 이름을 적다 보니 자연히 사람들 하나하나 이름을 알게 되지요.
내부 분위기가 이렇게 따뜻하면 일도 잘 되어간다고 생각됩니다. 참여연대도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들이 따뜻하게 일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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