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신들의 개혁과 진보는 무엇인가?
2004/2004년 02월 :
2004/02/01 00:00
박노자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한국인들의 내적 모순과 결함을 적확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읽을 때마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후끈거린다. 혹자는 그가 귀화한 한국인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겪지도 않았고, 끈끈한 연결망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 이방인이기에 가능한 다소 과도한 또는 서구 중심적인 성찰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 마디마디에 전적으로 수긍하는 편이며, 당연시하여 간과하는 한국인의 심상과 사회심리를 일깨우고자 할 때마다 제목만이라도 읽곤 한다.
그는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이 실제로 공모하여 이루어지는 커닝의 폐습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게는 “아이들인데 당연한 일 아니냐”라는 교수들의 태연한 반응이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그를 더 실망시킨 사실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점수를 잘 받고 싶은 것이 뭐가 나쁘냐”고 대꾸하고 있으며, 진보세력의 선봉에 섰던 학생들이 자기들의 작은 부정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부정에 익숙한 학생들이 사회적 진보를 이끌어갈 정직한 시민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진단을 덧붙인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현재의 학생들처럼 대학시절에 커닝을 했다. 그러나 이를 당연시했다기보다는 친구들과 더불어 그에 대한 납득할만한 변명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연일 벌어지는 시위에 참여하고 저녁에는 술자리에 세미나에 아르바이트까지 나다니느라 공부할 여유를 찾기 어려웠던 우리였지만 커닝에 대해서는 왠지 켕기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친구가 “커닝이야말로 민중의 지혜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당장의 현실을 바꾸고자 뛰어다니는 민중으로서 불안한 미래를 위해 졸업장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 상반된 요구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지혜로운 행위라는 의미였다.
교수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타당하지 않은 말장난이었지만, ‘민중’ 속에서 희망과 열정을 느끼던 당시의 우리들은 앞뒤 인과도 따지지 않고 박수를 쳤고 나중에 자주 인용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상황은 반복되는 듯싶다. 권위주의적 군부정권에서는 벗어났지만 왜곡된 대의정치체제와 불공정한 경제체제의 억압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어떤 지인은 집값이 폭등하는 상황에서 서울에 자그마한 아파트라도 사두어야 한다고 나에게 충고하면서 ‘민중의 지혜’조차 지니지 못한 무능함을 꼬집었다. 교육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자식의 유명대학 입학에 서로 축하할 뿐만 아니라, 고교평준화를 지지하면서도 자기 자식이 명문 특목고에 들어간 사실을 자랑하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대부분 교육개혁에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스승의 비도덕성과 그로 인한 교수 임용의 비리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과의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는 이들의 입에서도 사회진보와 개혁은 거리낌 없이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권위주의적 문화에 대해서는 그 판단을 유보하는 이들도 우리 곁에는 적지 않다. 불평등한 한미관계 등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이나 그 자식들이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뒤처지지 않도록 매사 대비하는 지식인들도 많다. 그렇다고, 이 모두가 개혁의 대상을 지탱하게 하는 우리들의 모순인 행태라는 자기성찰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행위들이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민중의 지혜’라는 말인가?
다른 맥락으로 가보자. 박노자는 스승과 제자라는 봉건적 관계에 묶여 있는 한국의 대학문화에 대해서도 매섭게 질타하고 있다. 그의 지적은 일면 타당하지만, 그 관계는 가혹했던 시절에 대학 내에서 온기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대학시절 한 노교수는 “옛날 학생들은 돌을 던지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슬며시 내려놓았지. 그게 너무 예뻐서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든 나섰는데 요즘 학생들은 너무 적대적이고 정이 없어”라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70년대에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라도 있었던 반면,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교수들을 권위주의 체제의 주구들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노교수는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학생들과 같이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과 교수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는 변화와 개혁의 헤게모니가 강하게 자리를 잡아왔다. 보수세력조차 개혁을 내세우는 상황이니만큼 온 국민이 개혁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난 20여 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의 폭보다는 대립과 갈등이 더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보수세력은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극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으며, 개혁진보세력은 ‘기대보다 지체된 변화’에 조급증을 느끼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변화한 것’에 대한 성취감과 ‘변화해야 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확장하기보다 과도한 편 가르기와 낙인찍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보수’ 혹은 ‘수구’로 낙인찍히기를 두려워하며 ‘개혁’과 ‘진보’의 편에 서 있다고 자처한다. 사람들이 사회를 보는 관점이 그렇게 변한다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이 변화하지 않고 상호간의 정치적인 대립관계에 의하여 그러한 외적 표현만 변화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대화와 공조가 가능한 합리적인 보수세력들도 개혁과 진보의 반대편에 서있어야 하는 사회적 억압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억압은 수구세력과 개혁세력 모두로부터 나오고 있다. 개혁세력으로 일단 주장되면 그 개혁적 진정성과 무관하게 그들의 내적 비민주성과 부패 등이 묻혀지기도 한다. 나아가서 현실적으로 힘을 지니고 있는 개혁세력들은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메우는 진보세력들에 대해서도 결코 겸손하지 않다.
사회개혁은 일상적인 삶까지 지배하는 정의의 원칙을 확고히 하면서도 보다 개방적인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실현되는 과제이다.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는 개혁을 외치면서 자신의 삶은 개혁대상인 제도와 현실, 그리고 사람 등과 무원칙하게 타협하고 있다면 그 변화는 지체될 것이고 오히려 개혁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개혁세력이 개혁과 진보의 과도한 원칙에 사로잡혀 우리 사회의 성원들을 바라보는 애정과 관용을 갖추지 못한다면 사회발전보다는 사회적 대립과 갈등만을 낳을 것이다. 사회개혁은 반드시 개혁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역사에 보다 겸손해질 수 있을까?
그는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이 실제로 공모하여 이루어지는 커닝의 폐습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게는 “아이들인데 당연한 일 아니냐”라는 교수들의 태연한 반응이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그를 더 실망시킨 사실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점수를 잘 받고 싶은 것이 뭐가 나쁘냐”고 대꾸하고 있으며, 진보세력의 선봉에 섰던 학생들이 자기들의 작은 부정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부정에 익숙한 학생들이 사회적 진보를 이끌어갈 정직한 시민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진단을 덧붙인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현재의 학생들처럼 대학시절에 커닝을 했다. 그러나 이를 당연시했다기보다는 친구들과 더불어 그에 대한 납득할만한 변명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연일 벌어지는 시위에 참여하고 저녁에는 술자리에 세미나에 아르바이트까지 나다니느라 공부할 여유를 찾기 어려웠던 우리였지만 커닝에 대해서는 왠지 켕기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친구가 “커닝이야말로 민중의 지혜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당장의 현실을 바꾸고자 뛰어다니는 민중으로서 불안한 미래를 위해 졸업장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 상반된 요구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지혜로운 행위라는 의미였다.
교수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타당하지 않은 말장난이었지만, ‘민중’ 속에서 희망과 열정을 느끼던 당시의 우리들은 앞뒤 인과도 따지지 않고 박수를 쳤고 나중에 자주 인용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상황은 반복되는 듯싶다. 권위주의적 군부정권에서는 벗어났지만 왜곡된 대의정치체제와 불공정한 경제체제의 억압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어떤 지인은 집값이 폭등하는 상황에서 서울에 자그마한 아파트라도 사두어야 한다고 나에게 충고하면서 ‘민중의 지혜’조차 지니지 못한 무능함을 꼬집었다. 교육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자식의 유명대학 입학에 서로 축하할 뿐만 아니라, 고교평준화를 지지하면서도 자기 자식이 명문 특목고에 들어간 사실을 자랑하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대부분 교육개혁에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스승의 비도덕성과 그로 인한 교수 임용의 비리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과의 술자리에는 빠지지 않는 이들의 입에서도 사회진보와 개혁은 거리낌 없이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정치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권위주의적 문화에 대해서는 그 판단을 유보하는 이들도 우리 곁에는 적지 않다. 불평등한 한미관계 등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이나 그 자식들이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뒤처지지 않도록 매사 대비하는 지식인들도 많다. 그렇다고, 이 모두가 개혁의 대상을 지탱하게 하는 우리들의 모순인 행태라는 자기성찰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행위들이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민중의 지혜’라는 말인가?
다른 맥락으로 가보자. 박노자는 스승과 제자라는 봉건적 관계에 묶여 있는 한국의 대학문화에 대해서도 매섭게 질타하고 있다. 그의 지적은 일면 타당하지만, 그 관계는 가혹했던 시절에 대학 내에서 온기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대학시절 한 노교수는 “옛날 학생들은 돌을 던지다가도 나와 눈이 마주치면 슬며시 내려놓았지. 그게 너무 예뻐서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든 나섰는데 요즘 학생들은 너무 적대적이고 정이 없어”라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70년대에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라도 있었던 반면, 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교수들을 권위주의 체제의 주구들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노교수는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학생들과 같이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과 교수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는 변화와 개혁의 헤게모니가 강하게 자리를 잡아왔다. 보수세력조차 개혁을 내세우는 상황이니만큼 온 국민이 개혁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난 20여 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의 폭보다는 대립과 갈등이 더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보수세력은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극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으며, 개혁진보세력은 ‘기대보다 지체된 변화’에 조급증을 느끼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변화한 것’에 대한 성취감과 ‘변화해야 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확장하기보다 과도한 편 가르기와 낙인찍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보수’ 혹은 ‘수구’로 낙인찍히기를 두려워하며 ‘개혁’과 ‘진보’의 편에 서 있다고 자처한다. 사람들이 사회를 보는 관점이 그렇게 변한다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이 변화하지 않고 상호간의 정치적인 대립관계에 의하여 그러한 외적 표현만 변화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대화와 공조가 가능한 합리적인 보수세력들도 개혁과 진보의 반대편에 서있어야 하는 사회적 억압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억압은 수구세력과 개혁세력 모두로부터 나오고 있다. 개혁세력으로 일단 주장되면 그 개혁적 진정성과 무관하게 그들의 내적 비민주성과 부패 등이 묻혀지기도 한다. 나아가서 현실적으로 힘을 지니고 있는 개혁세력들은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메우는 진보세력들에 대해서도 결코 겸손하지 않다.
사회개혁은 일상적인 삶까지 지배하는 정의의 원칙을 확고히 하면서도 보다 개방적인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실현되는 과제이다.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는 개혁을 외치면서 자신의 삶은 개혁대상인 제도와 현실, 그리고 사람 등과 무원칙하게 타협하고 있다면 그 변화는 지체될 것이고 오히려 개혁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개혁세력이 개혁과 진보의 과도한 원칙에 사로잡혀 우리 사회의 성원들을 바라보는 애정과 관용을 갖추지 못한다면 사회발전보다는 사회적 대립과 갈등만을 낳을 것이다. 사회개혁은 반드시 개혁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역사에 보다 겸손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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