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대통령 탄핵결의안이 통과된 후 탄핵결정의 최종심판권한을 가진 헌법재판소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2회에 걸쳐 국내 헌법재판소의 위상과 역할, 한계와 문제점 및 전망을 점검해 본다. 이번 호에는 출범 이후 현재까지 역사적인 맥락에서 헌법재판소의 위상과 역할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임지봉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건국대 법대 교수 jibonglim@hotmail.com

탄핵정국은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됐다. 특히 대통령과 대통령이 이끄는 정권의 정치적 운명이 오롯이 헌법재판소의 손에 달려있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민들은 국회의 ‘탄핵소추 결의’라는 정치적 결정으로 탄핵정국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통한 법적 결정이 내려져야만 탄핵여부가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현실로 경험했다. 이렇듯 중요한 헌법재판소에서 누가 재판관으로 일하고 있는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고 그 업무의 중대성에 대해 깊이 자각하지도 못했던 많은 국민들은, 설마하던 탄핵소추 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나서부터 연일 언론들이 앞다투어 헌법재판소를 뜨겁게 조명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9인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의 면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으며 헌법재판소장이 왜 각종 국경일 행사에서 대법원장과 나란히 삼부요인석에 앉게 되는지 깊이 절감하게 되었다. 이제껏, 전체 국민의 관심이 이 정도로 뜨겁게 헌법재판소에 집중된 적이 없었다.

87년 민주화항쟁을 발판으로 헌법재판소 출범

우리 헌법이 헌법재판소 제도를 받아들인 것은 현행 헌법인 1987년 헌법이 최초는 아니다. 미완의 혁명인 4.19 이후 성립된 1960년의 제2공화국 헌법에서도 헌법재판소의 설치가 규정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구성되고 그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여,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제대로 된 출범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여야대표 8인의 정치회담을 통해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간 합의에 의해 탄생한 현행헌법에서 다시 독일식의 헌법재판소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이 땅에 헌법재판소가 설 수 있는 기회를 다시금 맞이하게 된 것이다.

1987년 개헌협상이 한창이던 때, 대법원은 위헌법률심판권 등의 헌법재판권을 자신들에게 줄 것을 강력히 원했다. 1962년 제3공화국 헌법하에서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권을 부여받은 전례도 있고, 헌법재판권도 일종의 사법권이라 볼 수 있는 만큼 미국 등에서처럼 최고사법기관인 대법원이 그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사법의 통일성을 기할 수 있다는 점이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개헌협상의 주역들은 일반법원 이외에 헌법재판권을 전담하는 헌법재판소를 따로이 둘 것을 선택했고,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권 이외에 탄핵심판권, 정당해산심판권, 권한쟁의심판권과 함께 헌법소원심판권까지 부여하는 특단의 배려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이나 일부 언론들은 헌법재판소 설치를 ‘옥상옥(屋上屋)’이라 폄하했다.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는 사법부 위에 별 큰 효용을 발휘할 것 같지도 않은 또 다른 사법기관을 하나 더 얹어놓는 격이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출현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던 이들은, 헌법재판소가 과거의 ‘헌법위원회’처럼 제대로 된 헌법재판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명맥만 유지하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식으로까지 헌법재판소를 평가절하하려 애썼다. 대법원은 국회에의 가열찬 로비를 통해 헌법소원의 대상에서 ‘법원의 재판’을 제외하는 규정을 최초의 헌법재판소법에 집어 넣게 함으로써,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심판권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갖은 우여곡절 끝에 1988년 9월 14일 헌법재판소가 출범했다.

입법, 행정, 사법의 견제 및 국민기본권 수호

16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제1기 재판부(1988년-1994년), 제2기 재판부(1994년-2000년)를 거처 제3기 재판부(2000년부터)가 활동하고 있다. 그간, 헌법재판소는 재판소 설립에 부정적이던 이들이 내놓았던 냉소적 전망들이 한낱 근거없는 기우 내지는 의도적 폄하에 불과했음을 보여주었다. 1989년 1월 ‘구(舊) 소송촉진 등에 관한 법률’ 제6조 1항 단서조항의 ‘국가에 대한 가집행금지규정’을 합리적 이유없이 국가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위헌결정한 것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법률들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선언과 함께 휴지조각으로 변해갔다. 국민의 기본권이 공익상의 이유 등으로 법률에 의해 제한될 수는 있으나 과잉 제한은 위헌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기본권의 제한에도 한계가 있음을 위정자들에게 각인시켰다. 1989년 7월, 일정한 요건이 갖추어지면 재범의 개연성과는 무관하게 판사로 하여금 반드시 감호처분을 하게 한 ‘구(舊) 사회보호법’ 제5조 1항의 ‘필요적 보호감호제도’를 위헌이라 선고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결정은 국가가 국민의 신체 자유를 제한함에 있어 넘지 말아야할 한계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었다. 기존의 관습이 현재 상황에 맞지 않게 되었을 때, 한국사회의 변화를 현실 속에서 읽어내면서 그 관습을 폐지해 가는 사법 적극주의적인 모습도 여러 번 보여주었다. 동성동본간의 혼인을 금하고 있던 민법 제809조 1항에 대한 1997년의 헌법불합치결정이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결정들 중의 하나이다. 여성이나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보호에 있어서도 헌법재판소는 넓은 가슴을 갖고 있었다. 1999년의 제대군인 가산점제도에 대한 만장일치의 위헌결정이 그 예이다. 날치기 통과된 법안의 절차적 유효성을 권한쟁의심판을 통해 따진다거나 선거법상의 국회의원선거구획정에 대해 평등원칙을 깨지 않는 선거구간 인구편차가 어느 정도까지인지를 판결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입법부를 충실히 견제해왔고, 검사의 자유재량 영역으로 인식되어 오던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해서도 헌법적 잣대를 들이대어 이를 규율함으로써 행정부 견제의 역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법무사법 시행규칙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하는 명령 규칙에 대해서는 일반사법부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에서 이에 대한 위헌성을 다툴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같은 사법부내의 다른 법원들에 대한 견제역할도 충실히 해왔다.

헌법재판소의 위상은 헌법이 인정하고 있듯이, 대법원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사법기관 중의 하나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헌법해석이나 헌법재판과 관련해서는 어느 기관보다도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법이 부여한 위상 못지 않게 현실 속에서도 대체로 꽤 높은 실질적인 위상을 유지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것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용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우리 헌법재판소는 사법적극주의에 입각한 적극적인 판결들로, 국민 기본권 보장의 확대를 이루어왔고, 한국사회의 변화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도해 왔으며, '사회적 약자보호'라는 사법부 본연의 역할 수행도 게을리 하지 않아 왔다고 필자는 믿는다.

임지봉
2004/05/01 00:00 2004/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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