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꿈길을 돌아 온 느낌이다. 비정규 고용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등장한 지 벌써 4년 남짓 흘렀으나, 비정규 노동자의 고통과 비애를 덜어 줄 실질적인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숱한 집회장과 길거리에서 외친 우리의 절박한 요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4년의 기억마저 멍하게 만들었다.

비정규고용문제, 외면 속에 사회적 의제로도 안돼

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연구와 토의를 진행하는 동안, 한 편에서는 정리해고에 맞서 길거리를 전전하던 7000명의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생계 때문에 상처를 안고 뿔뿔이 흩어졌다.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인 노동3권을 요구하던 건설운송노동자에게 돌아간 것은 구속뿐이었다. 이러한 모멸과 냉대가 결국 근로복지공단의 이용석,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의 박일수, 두 명의 비정규노동자를 분신으로 몰아간 것이다.

2000년 10월, 26개 시민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국회에 청원한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위한 법개정안’은 노동.사회운동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듯, 어느 정당, 어느 국회의원 하나 거들떠보지 않은 채 먼지 속에 묻혀졌다 16대 국회와 함께 사라질 판이다. 2003년 7월 노사정위원회 ‘비정규근로자대책 특별위원회’에서는 2년 간의 논의를 거쳐 공익위원안이 나왔으나, 그 내용은 매우 실망스럽다. 행정부는 이마저도 크게 훼손하면서 파견허용 업무를 대폭 확대하는 쪽으로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비정규 고용문제를 노사정위위원회에서 다룸으로써 가장 편하게 된 것은 국회와 행정부이다. 두 기관은 입법 발의의 권한과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도 아직 노사정위원회 내에서 노사합의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식의 수수방관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고서는 막상 입법단계에서는 마치 자신들이 ‘둥근 네모’라도 만들 능력이 있는 것처럼, ‘유연적 안정성’이라는 사기논리를 들이대며 칼질을 해댄다. 엄밀히 말해서, 비정규 고용문제는 아직까지 사회적 의제로서도 완전한 지위를 얻지 못한 셈이다.

그나마 2000년부터 실시된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를 통해 알게 된 비정규 노동자의 실태는 우리가 짐작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2003년 현재 비정규노동자의 규모가 전체 임금노동자의 55.4%에 해당하는 780만 명에 이르며, 여성노동자의 경우 이미 70%가 비정규노동자로 일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이 201만 원인데, 비정규직은 그것의 51%에 불과한 103만 원을 받는 반면 주당 2~3시간 더 일한다. 특히 심각한 것은 복지에서의 차별이다. 기업복지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는 퇴직금, 상여금 등에서 90% 이상의 적용을 받는 반면, 비정규직은 15%만이 혜택을 받고 있으며,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사회복지의 경우도 정규직은 90% 내외의 적용을 받는 반면, 비정규직은 25%로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시장에 대항한 평등과 연대의 문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비정규 고용문제가 비정규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점이다. 첫째, 차별(Discrimination)의 문제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없는 차별은 평등권 침해로서, 국가 기구의 폭압과 더불어 인권침해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산업화, 근대화 이후 성별 또는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한 봉건적 차별이 고용형태를 이유로 한 근대적 차별로 대체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명문화되어야 한다. 둘째, 성(Gender) 문제이다. 이미 여성노동자의 70%가 이미 비정규 노동자라는 사실은 비정규 고용문제가 성차별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용형태를 이유로 한 차별이 일차적으로는 여성을 주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미 그 프로젝트가 성공(?)했음을 뜻한다. 비정규 고용이 ‘남녀고용평등보장법’, ‘남녀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면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간접차별의 통로로 악용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노동기본권(Trade Union Rights) 문제이다. 노동기본권은 사회권으로 인권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러나 보험설계사, 골프경기장 도우미, 지입차주,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행정부 또는 법원에 의해 단결권마저 부인되고 있다. 공무원과 교수의 단결권이 논의되는 마당에 오로지 노무제공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이 배제되고 있다. 끝으로 소득불평등(Income Inequality)의 문제이다. 임금노동자가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정규노동자의 증가로 노동소득분배율이 악화되고 있다. 생산된 부가가치 중에서 노동의 몫은 1996년도 64.2%(자본의 몫35.8%)에서 2002년도에는 60.9%(자본의 몫 39.1%)로 하락했다. 이렇듯 비정규 고용의 문제는 시장에 대항하는 사회정의(Social Justice)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제 곧 17대 국회가 개원된다. 그리고 50년만에 처음으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등원한다. 그러나 저 한 편에서는 유연화를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시장으로 사회를 대체하려는 인격화된 신자유주의가 존재하는 한, 사회분열을 극복하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회통합을 위해 절실한 것은 이러저러한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권력에 맞서 사회를 옹호하고, 사회의 유지발전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절대다수의 노동자를 지지하는 시민사회의 평등.연대의 가치와 운동이다. 이제까지 어려운 고비를 넘어 왔듯이 또 한 번 신발 끈을 단단히 맬 때이다

조진원
2004/05/01 00:00 2004/05/01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Magazine/trackback/1135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