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 송대헌 회원] 꽃을 가꾸며 아이들을 기다리는 선생님
2005/2005년 04월 :
2005/04/01 00:00
“15년 만에 처음 담임을 맡아서 너무 좋았는데……. 애들도 나를 좋아했고, 이번엔 정말 폼 나게 할 수 있었는데……. 아이들과 잘 지낼만하면 꼭 잘리곤 한단 말야. 좋은 선생이 되고 싶어 시작한 길인데 번번이 퉁겨 나오는 게 운명인지 뭔지…….”
2003년 마지막으로 해직됐을 때를 회고하는 그에게서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뒤로 23년 동안 세 번이나 교단을 떠나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있었던 시간이 10년이 안 된다. 그래도 교사가 되었을 때의 첫 마음을 잊지 못하는 송대헌 회원(경북 영주· 47세)을 만나 곡절 많은 인생을 들어보았다.
“좌절 속에도 희망이 숨어 있어요”
수학을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이던 그의 삶이 바뀐 건 5·18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부터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생기면서 사회의식도 같이 커갔다. 야학 활동을 하면서 교직의 꿈을 키웠던 그는 82년 영주 부석중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교사가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다.
“85년 문학 교사 20여 명이 모여 교육잡지를 낸 것이 발단이었죠. ‘민중교육’이라는 제목의 교육 무크지였는데, 전두환 정권이 이 책을 용공으로 몰아 발행 3개월 만에 나를 포함해 20여명 모두 파면시켰어요. 그때 처음 해직된 거죠.”
대도시에서 근무하던 다른 해직교사들과 달리 그는 혼자 경북지역이었다. 홀로 2년 반 동안 교육청을 상대로 외로운 소송을 벌여야 했다. 결국 그는 승소했다. 관련자 중 유일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걸까?
“모르니까 공부하면서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죠. 자연히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고, 특히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전향적인 결과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88년 복직하면서 그간 못 받은 월급을 한꺼번에 받아 지금 사는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직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교직원 노조 활동으로 또다시 해직됐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것은 98년. 오랜 시간이 걸려 돌아온 교단이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2002년 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새로운 흐름이 분출될 때, 그런 변화의 물결에 동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온라인 공간에서 글도 쓸며 활동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사이버수사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100만 원의 벌금형을 받곤 별 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몇 달 뒤 선거법 226조 공무담임권 조항에 대한 논란이 일더니 2003년 9월 또 한 번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안 해서 평생 후회할 것 같으면 하고 본다”는 신조를 가진 그는 지금도 그 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택의 대가로 치러야 할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해고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죠. 엄청난 좌절감을 느낍니다. 해고당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도 생각보다 크고요. 물론 경제적인 부분은 가장 사람을 지치게 하는 어려움이죠. 저도 89년 해직되고 나서 전교조에서 월 15만 원을 받으며 상근했었어요. 쉽지 않은 시간이었죠.”
다행히 그에겐 그를 믿고 이해하는 가족이 있어 큰 힘이 된다.
“우리는 부부교사인데, 같은 조합원인 아내와 전 서로를 잘 이해합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힘이 되고요. 고등학생인 딸이 절 자랑스러운 아빠, 훌륭한 아빠로 생각해 주는 것도 다행입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아들을 신뢰해 주는 것도 큰 용기와 힘을 주지요.”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남들은 내가 아무 걱정 없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다만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에서 항상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죠. 좌절할 때도 언제든 희망은 발견할 수 있어요. 왜냐면 좌절 속에도 꼭 배우는 것이 있거든요. 시련을 통해 나를 채워 가는 뭔가가 있는 겁니다. 그걸 잘 찾는 게 중요하죠. 예를 들어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소송하면서 배운 법률지식은 89년 전교조를 구성할 때 교사들을 돕는 힘이 되었어요. 또 2002년 100만 원 벌금형으로 해직된 나의 사례는 2004년 총선 당시 정치참여 문제로 송사에 휘말린 다른 교사들이 해직을 피하는 좋은 선례가 되었거든요. 어쩌면 내가 이거 하려고 잘렸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시련의 의미를 재해석해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 그것이 번번이 그를 내팽개치는 세상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설 수 있었던 그만의 비결인 것이다.
“새로운 도전과 비전 보여주는 참여연대가 되기를”
그가 참여연대를 만난 건 96년 전교조 서울본부에서 교권국장으로 일할 때다. 전교조가 참여연대와 함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에 관한 공동사업을 벌인 것이 계기였다.
“두 달 동안 전국 30개 지역을 돌며 학교운영위원회 참여를 독려하는 교육을 실시할 때였죠. 그때 처음 접한 참여연대 활동가에게서 운동의 진정성과 연대감을 발견했어요. 공동사업의 과정에서 참여연대가 운동을 독점하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죠. 교육 관련단체가 부각돼야 한다며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한발 물러서는 겸손한 태도를 보면서 후원을 시작했어요.”
당시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참여의 역동성’은 이후 그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그때 스스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봤어요. 한 사람이 주도하지 않아도 되는, 마당만 열어주면 사람들 스스로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죠.” 그래서일까. 그는 아래로부터의 참여, 생활현장에서의 소통을 강조한다. 전교조에서도 분회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참여연대가 달라진 세상에 새로운 도전과 비전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어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은 세대와 지금의 ‘촛불세대’는 다릅니다. 변화되는 세상에 걸맞는 새로운 방향이 제시돼야 합니다. 90년대 중반 참여연대가 세상에 던졌던 신선한 문제제기와 접근방식들처럼, 이제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그는 교권에 대해 강의하러 전국을 누비고, 교육혁신위원회 비상임 전문위원으로서 농어촌교육과‘작은 학교’에 대해 연구하는 틈틈이 교사들과 함께 온라인사랑방을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매일 빠뜨리지 않는 일과가 있다. 꽃 가꾸기이다. 꽃씨를 심고, 싹 틔운 화초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베란다에 70∼80개의 화분을 늘어놓고“요 녀석들이 지금 우리 반 애들”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선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가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꽃을 가꾸며, 나눔의 기쁨을 홀씨처럼 퍼뜨리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2003년 마지막으로 해직됐을 때를 회고하는 그에게서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뒤로 23년 동안 세 번이나 교단을 떠나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있었던 시간이 10년이 안 된다. 그래도 교사가 되었을 때의 첫 마음을 잊지 못하는 송대헌 회원(경북 영주· 47세)을 만나 곡절 많은 인생을 들어보았다.
“좌절 속에도 희망이 숨어 있어요”
수학을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이던 그의 삶이 바뀐 건 5·18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부터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생기면서 사회의식도 같이 커갔다. 야학 활동을 하면서 교직의 꿈을 키웠던 그는 82년 영주 부석중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교사가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다.
“85년 문학 교사 20여 명이 모여 교육잡지를 낸 것이 발단이었죠. ‘민중교육’이라는 제목의 교육 무크지였는데, 전두환 정권이 이 책을 용공으로 몰아 발행 3개월 만에 나를 포함해 20여명 모두 파면시켰어요. 그때 처음 해직된 거죠.”
대도시에서 근무하던 다른 해직교사들과 달리 그는 혼자 경북지역이었다. 홀로 2년 반 동안 교육청을 상대로 외로운 소송을 벌여야 했다. 결국 그는 승소했다. 관련자 중 유일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걸까?
“모르니까 공부하면서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죠. 자연히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고, 특히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전향적인 결과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88년 복직하면서 그간 못 받은 월급을 한꺼번에 받아 지금 사는 집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직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교직원 노조 활동으로 또다시 해직됐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것은 98년. 오랜 시간이 걸려 돌아온 교단이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2002년 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새로운 흐름이 분출될 때, 그런 변화의 물결에 동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온라인 공간에서 글도 쓸며 활동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사이버수사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100만 원의 벌금형을 받곤 별 생각 없이 넘어갔는데 몇 달 뒤 선거법 226조 공무담임권 조항에 대한 논란이 일더니 2003년 9월 또 한 번 학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안 해서 평생 후회할 것 같으면 하고 본다”는 신조를 가진 그는 지금도 그 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택의 대가로 치러야 할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해고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죠. 엄청난 좌절감을 느낍니다. 해고당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도 생각보다 크고요. 물론 경제적인 부분은 가장 사람을 지치게 하는 어려움이죠. 저도 89년 해직되고 나서 전교조에서 월 15만 원을 받으며 상근했었어요. 쉽지 않은 시간이었죠.”
다행히 그에겐 그를 믿고 이해하는 가족이 있어 큰 힘이 된다.
“우리는 부부교사인데, 같은 조합원인 아내와 전 서로를 잘 이해합니다. 경제적으로도 큰 힘이 되고요. 고등학생인 딸이 절 자랑스러운 아빠, 훌륭한 아빠로 생각해 주는 것도 다행입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이 아들을 신뢰해 주는 것도 큰 용기와 힘을 주지요.”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남들은 내가 아무 걱정 없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다만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에서 항상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죠. 좌절할 때도 언제든 희망은 발견할 수 있어요. 왜냐면 좌절 속에도 꼭 배우는 것이 있거든요. 시련을 통해 나를 채워 가는 뭔가가 있는 겁니다. 그걸 잘 찾는 게 중요하죠. 예를 들어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소송하면서 배운 법률지식은 89년 전교조를 구성할 때 교사들을 돕는 힘이 되었어요. 또 2002년 100만 원 벌금형으로 해직된 나의 사례는 2004년 총선 당시 정치참여 문제로 송사에 휘말린 다른 교사들이 해직을 피하는 좋은 선례가 되었거든요. 어쩌면 내가 이거 하려고 잘렸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시련의 의미를 재해석해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 그것이 번번이 그를 내팽개치는 세상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설 수 있었던 그만의 비결인 것이다.
“새로운 도전과 비전 보여주는 참여연대가 되기를”
그가 참여연대를 만난 건 96년 전교조 서울본부에서 교권국장으로 일할 때다. 전교조가 참여연대와 함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에 관한 공동사업을 벌인 것이 계기였다.
“두 달 동안 전국 30개 지역을 돌며 학교운영위원회 참여를 독려하는 교육을 실시할 때였죠. 그때 처음 접한 참여연대 활동가에게서 운동의 진정성과 연대감을 발견했어요. 공동사업의 과정에서 참여연대가 운동을 독점하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죠. 교육 관련단체가 부각돼야 한다며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한발 물러서는 겸손한 태도를 보면서 후원을 시작했어요.”
당시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참여의 역동성’은 이후 그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그때 스스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봤어요. 한 사람이 주도하지 않아도 되는, 마당만 열어주면 사람들 스스로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죠.” 그래서일까. 그는 아래로부터의 참여, 생활현장에서의 소통을 강조한다. 전교조에서도 분회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참여연대가 달라진 세상에 새로운 도전과 비전을 보여주기를 바랐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어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은 세대와 지금의 ‘촛불세대’는 다릅니다. 변화되는 세상에 걸맞는 새로운 방향이 제시돼야 합니다. 90년대 중반 참여연대가 세상에 던졌던 신선한 문제제기와 접근방식들처럼, 이제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그는 교권에 대해 강의하러 전국을 누비고, 교육혁신위원회 비상임 전문위원으로서 농어촌교육과‘작은 학교’에 대해 연구하는 틈틈이 교사들과 함께 온라인사랑방을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매일 빠뜨리지 않는 일과가 있다. 꽃 가꾸기이다. 꽃씨를 심고, 싹 틔운 화초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베란다에 70∼80개의 화분을 늘어놓고“요 녀석들이 지금 우리 반 애들”이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선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가 학교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꽃을 가꾸며, 나눔의 기쁨을 홀씨처럼 퍼뜨리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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