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개혁을 믿는가
2004/2004년 06월 :
2004/06/01 00:00
17대 국회 개혁가능성 전망
대폭적인 물갈이, 보수세력의 독점구조의 파괴, 진보정당의 원내진출 등 17대 국회는 많이 바뀌었다. 과연 이러한 변화가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편집자 주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말은 17대 국회에서도 일정한 진실을 반영한다. 정치지형이 바뀌었으되, 거대한 산맥에 도랑 하나 판 셈이다. 이게 계곡이 되고 폭포가 되어 큰 줄기를 이루려면 아직도 아득하다. 정치인들의 면면이 바뀌었다지만, 기회주의적 속성은 오늘의 그들을 있게 한 근본동력이다. 척박한 정치지형을 ‘상황논리’ 삼아 개혁의 반대편으로 도망쳐 가는 고질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이념형 정당분립은 여전히 진행형
많은 정치학자들은 이번 17대 총선을 ‘정초선거(critical election)’라 평한다. 집 지을 기초를 이제야 닦았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진보-중도보수-수구보수 등 이념형 정당들의 경쟁구조가 마련됐다. 적어도 영남당-호남당과 같은 구분은 이제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상대를 비난할 지언정, 그것은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며 그 효력도 미미할 것이 분명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냉전반공주의, 지역주의로 영화를 누렸던 ‘수구보수 정당의 독점구조’가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하게도, 독점의 붕괴 자체가 정치‘시장’의 합리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우선 정초선거라는 평가의 주요한 근거가 되는 ‘이념형 정당분립’은 여전히 ‘진행형’의 과정일 뿐, 한국정치 토양에 뿌리내린 안정적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입으로부터 파생된 ‘효과’의 성격이 강하다.
구체적으로 열린우리당의 실용주의파와 한나라당의 신보수파는 무엇이 다른가. 한나라당의 이른바 신보수파는 도대체 수구와 단절을 이룰 수 있긴 한가. 지금 당장은 논점의 핵심이 될 수는 없겠지만,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농민의 상충되는 이해를 어떻게 대변할 것인가.
그리고 ‘발전담론’을 중심으로 ‘분배-성장’의 가치에서만 서로 대립하는 17대 국회의 정당구조는 여전히 제도정치 외곽에 머물러 있는 또 다른 가치와 사회적 요구(예컨대 녹색정치적 지향 등)를 어떻게 대표할 수 있는가.
이렇듯 각 당 내부의 ‘갈등’과 제도정당과 시민사회 간에 존재하는 ‘균열’은 이념형 정당분립의 정초를 다시 한 번 뒤흔들어 놓을 ‘위기’를 그 안에 품고 있다. 기초를 닦았으되 현재의 그 기초는 새로 지어올릴 집 전체의 모양새와는 별 관계 없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착화된 이념정당이 온전한 정책경쟁(또는 개혁경쟁)을 벌이기보다는, 여전히 ‘인큐베이터’ 속에서 성장을 기다리는 각 정당 및 계파들이 또 다른 방향의 ‘재정립’을 향해 정치적 각축을 벌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자 이제부터 정책경쟁이다’라며 탁탁 손을 털고 나서는 일을 17대 국회에 기대하는 것은 다분히 (시민사회의) 주관적 열망이다.
무엇보다 전체로서의 한국 정당지형 구조 앞에 거대한 댐처럼 버티고 서있는 세계질서가 도랑을 계곡으로 옮겨 도도한 강물을 이루게 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시장근본주의와 미국의 패권질서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앞에서 한국 시민사회는 ‘저항’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구체적인 정책경쟁의 심급에서 대기업, 재벌 위주의 경제재편으로 경도되는 ‘외길’을 예고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구보수’ 정당 내부의 경쟁을 수구로 기울게 하고, ‘중도보수’를 보수로, ‘진보’를 보수화 시키는 근본적 한계로 작용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개혁의 암초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그런 조짐은 가시화되고 있다.
한나라당 쇄신의 주역처럼 거론되고 있는 신보수론자들은 실상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세련된’맹신을 유포시키는 역할을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일보, 각종 국책연구소, 서울대와 미국 명문대 등을 둥지 삼아 한국 보수세력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던 주역이다. 신보수 세력은 얼핏 냉전, 지역주의, 부패를 비판하며 수구세력을 견제하는 듯 하지만, 수구의 핵심인 이승만의 친일과 박정희 독재에 대해 오히려 적극 해석하고 수용하려는 ‘도발’을 기획하고 있다. 그들의 이른바 ‘합리성’이란 일종의 허구적 신화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들은 친일과 독재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훼손되는 위기가 생길 때마다 수구와 손잡고 과거로 회귀할 심산이다. 신보수가 원하는 것은 수구보수 정당 내부의 헤게모니이지, 그것의 쇄신이 아니다.
열린우리당 내부의 이른바 ‘386사단’은 아예 난도질당할 가능성이 있다. 전대협 간부 등 80년대 운동권 출신이 핵심을 이룬 이들은 일종의 ‘노무현이즘’의 신봉자다. 노무현 대통령이 상징하는 바, 구 정치질서의 ‘정치적 해체 및 재구성’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열망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정치구조의 혁신에 필수불가결한 (시민)사회 및 경제구조의 재구성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전망을 갖고 있지 않다. 이는 한국 시민사회 전반의 한계와도 연관된 것이기에 그 책임을 온전히 그들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그런 전망의 마련과 집행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담론은 한나라당 신보수파들의 ‘경제담론’의 홈통으로 빨려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그들이 둥지를 튼 열린우리당 내부에도 이들의 정치개혁 일정에 딴지를 걸거나, 심지어 이들 운동권 출신들을 (경제안정이라는 이름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재편의 들러리로 세우려는 세력이 상당하다. 그 ‘대안없음’의 실력으로 보건데, 386사단의 미래는 대단히 불투명하다.
민주노동당은 한국 사회 전체가 그들에게 보내는 ‘호감’ 앞에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이때의 겸손이란 ‘분수를 알라’는 말이 결단코 아니니, 오해 없기를. 자칭 진보주의자는 물론 심지어 수구적인 인사들까지도 어느날 갑자기, 민주노동당의 존재를 긍정평가하고 추켜올리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강력한 지지그룹과 반대그룹을 동시에 거느린 열린우리당, 한나라당과 달리, 민주노동당이 광범위한 우호세력을 형성하는 듯한 기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다. 제도정당 전반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대중으로 거듭나려는 신호탄이거나, 출구를 찾지 못했던 정치냉소가 ‘정세적’으로만 작동할 위기징후다. 후자의 가능성에 대해 겸손해질 수 있다면, 민주노동당은 (우경화되고 있는) 시민사회 전체와 함께 진보세력의 미래와 동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성, 현실성’이 아니라 오히려 ‘전망’이다. 그들이 만들려는 국가정체와 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길게 보고 세심하게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개혁정국’에 대한 그들의 기여 또한 ‘정세적’인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개혁의 조타수가 되어야 할 시민사회
17대 국회는 각종 개혁과제의 제도화를 통한 한국 사회의 ‘재구성(restructuring)’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일단 비관적이다. 17대 국회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진흙탕에 발을 딛고서 이 화두를 받았다. 70, 80년대 변혁운동의 각 부문을 일정하게 대변하는 ‘인물’들이 곳곳에 자리 잡았지만, 문제는 그들을 둘러싼 ‘구조’에 있다. 그 구조는 진흙탕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력한 경로로 ‘기존의 지배질서’라는 잘 닦여진 길을 보여주며 이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새로운 질서’의 길을 개척하려는 용기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각종 ‘개악과 미봉’을 목도할 것이다.
그러나 낙관적 전망을 손에서 놓아 버릴 필요 또한 없다. 다시 문제는 ‘인물’과 ‘구조’다. 유혹 앞에 선 17대 국회의 ‘인물’들은 그들의 장기적 정치전망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선례’를 따라 언제든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고 봐야 한다. 자신의 팔을 내주고 상대의 목을 따오는 무림고수의 지혜는, 노 대통령이 정치 후배들에게 남긴 거의 유일한 덕목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눈앞의 정치적 이해를 눈감고 내주면, 그 뒤를 따라 더 큰 정치적 전망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가슴깊이 체득한 ‘17대 국회 세대’에게 시민사회가 든든한 후원과 전망제시의 몫을 해주는 일이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시민사회는 국가와 시장을 견제하고 견인할 유일한 지평이다. 한국사회가 개혁과 개조의 길로 나아가는 일은 거의 전적으로 시민사회의 역량에 달려 있다. 역설적이게도 ‘제도정치의 합리화’가 진행될수록 ‘비제도 정치’로서의 시민사회 진영의 의무는 깊어 간다. 지겹도록 계속 되는 이 고단한 책무를 짊어진 사람들의 중단 없는 건투를 빌며, 심심한 위로와 측은지심도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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