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민사회의 역사적 전망
2005/2005년 05월 :
2005/05/01 00:00
중국에 시민사회는 있는가? 원래 시민사회란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이어야 한다. 이런 서구식 분류법에 따르면 중국에 시민사회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중국의 NGO는 예외 없이 반관반민(半官半民) 단체이며, 국가권력과 완전히 분리된 비정부기구는 비합법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중국의 사례를 국가권력이 민간사회에 보다 잘 침투하기 위해 국가 주도 아래 민간사회를 직능, 성(젠더) 등으로 조직하고 통제하는 조합주의(Cooperatism) 모델로 설명하기도 한다.
중국 중간계층의 이중성
한편, 역사적으로 접근할 때에는, 농촌사회를 지배했던 과거(科擧) 학위 소지자층(紳士, gentry), 근대 도시의 동향단체와 직업별 조직 등 중간계층의 역할을 중국 NGO의 성격 및 존재방식에 투영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중간계층은 인민과 국가권력을 이어주는 존재로서 국가권력을 지역사회에 침투시키기도 하고, 지역사회의 여론을 만들고 국가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던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 가능성, NGO의 성격을 살펴볼 때에도 국가권력에 대한 종속적 성격과 기층의 대변인으로서 자율적 성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환경, 교육, 국가발전 불균형 문제 등에서 자율적 목소리가 커지는 경향에서 시민사회의 발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중간계층이 국가권력을 타도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선 적은 없었다.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1905년 청조가 과거시험제도를 폐지하자,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지역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중국의 신사층은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더 이상 제공해 주지 않는 청조에 과감하게 등을 돌릴 수 있었다. 과거를 열어주지 않는 정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권력에 대항한 것은 누구였는가? 그것은 광대한 농민대중이었고, 형태는 반란이었다.
5·4운동의 성공과 중간계층의 참여
신해혁명 이후 과거가 없는 세상에서 중간계층에 대한 포섭 노력을 포기한 중국에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의 21개 조약 요구에 대한 거부와 매국관료 처벌을 주장하며 일어난 1919년 5·4 운동이 그것이다. 5·4운동의 획기성은 중간계층에 포섭되어야 할 지식인집단이 반일운동을 매개로 노동자, 상인 등 일반 도시대중과 결합했고, 반란이 아닌 방식으로 국가권력에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5·4운동은 거리의 기습적인 대중선동, 대자보, 노동야학 등 중국에 전혀 없었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5·4운동은 국공(國共) 양당의 창당과 노동, 농민, 도시민중 운동의 본격적 고조에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일반적으로 1989년 천안문시위를 중국 시민사회의 단초를 보여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천안문시위는 사실상 학생 위주의 시위였다. 이에 반해, 5·4 운동은 중간엘리트층이 대중과 광범하게 결합, 여론을 형성하고,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공했다. 당시 여러 계층을 묶어준 구심점은 반일 민족주의였다.
5·4 운동 이후 근대 중국의 도시개항장을 중심으로 서구적 의미의 시민사회, 공공영역과 근접한 공간이 형성됐다. 그러나 1949년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에는 20세기 초에 있었던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시민사회나 비정부조직이나마 존재하지 않는다. 혹자는 개혁개방 이후 자율적인 시민사회 성장의 가능성이 1989년 천안문사태로 좌절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21세기의 ‘5·4’는 언제 올 것인가? 그 점에서 작금의 반일시위가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5·4운동과 반일시위의 닮은 점과 차이점
5·4운동이 조선의 3·1만세 운동에 자극받은 바가 적지 않았던 것처럼, 독도와 일본교과서 문제로 촉발된 한국의 대규모 반일 시위 이후인 4월 9일 중국 베이징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청두(成都)의 폭력 시위를 기폭제로 4월 16일과 17일에는 상하이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반일시위가 확산됐다. 이 시위는 5·4운동과 유사성과 차별성을 다 가지고 있다. 우선 반일민족주의가 시위를 촉발시켰다는 점, 학생시위가 대중시위로 확산됐다는 점,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 유사하다.
그러나 차이도 적지 않다. 먼저 정부의 태도이다. 5·4 운동에 대해 중국정부는 강경진압 입장을 고수했고, 그 결과 시위를 더 키웠다. 그러나 현 중국공산당은 대외와 대내에 다른 두 얼굴을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외신을 공급하는 국영통신사인 신화사가 초기 상하이 시위대 숫자를 10만 명으로 부풀려 보도했으나, 대내적으로는 시위가 격화되기 전인 4월 15일 이미 보도통제 및 시위 규제에 들어갔다. 특히 시위가 전국적으로 파급된 직후인 19일에는 중국공산당 선전부가 나서서 베이징에서 대형보고회를 열고 시위 불허와 본격적인 치안단속을 선포했다. 21일에는 다시 공안성(公安省)이 데모규제의 공식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반일 시위 수습 서두른 중국 당국의 속내
중국의 강대국화, 일본의 전후 체제 탈각 및 ‘보통국가’화, 미국의 태평양정책 변화라는 21세기 초의 완전히 새로운 국제정세에서, 중국은 아시아 주변국을 고려하지 않는 일본의 질주를 제어하기 위해 반일시위를 초기에 묵인한 측면이 있었다. 사실상 정부의 허가 없는 시위란 중국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진압하지 않는 것은 일본 언론 말대로 방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위가 과격해지고 전국으로 번져 가자 중국정부는 시위 불허 조치를 강화했다. 현재 중국의 미디어에서는 반일데모가 보도되지 않고 있다. 인터넷에도 “반일시위 해악론”, “대학생, 더 이상 맹목적으로 일본상품 배척하지 않는다”, “분을 푸는 것은 쉽지만, 분을 인내하는 것이 어렵다”, “경제가 없으면 외교도 없다” 등 반일시위를 자제하자는 목소리를 담은 기사만이 떠 있다. 중국정부의 대일 자세가 시위로 인한 손실 보상 등 유화적으로 바뀌면서, 현재 시위는 진정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5·4와 달리 통제 기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정부의 대내적 태도는 반일시위를 매개로 한 민간사회의 조직화가 민주주의의 결핍, 경제적 불평등, 지역격차, 도농갈등 등 잠재돼 있는 불만들이 터져 나오는 계기로 연결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5·4운동에는 베이징이 중심이 되었지만, 이번 시위는 4월 9일의 베이징 시위가 발단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17일의 전국적 시위에서 베이징은 제외됐다.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시위 불허 방침은 참여단체들이 인터넷을 통해 시위를 취소하게 했던 것이다.
5·4는 대자보, 가두연설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어냈지만, 이번 시위에는 인터넷과 휴대폰 문자서비스가 동원 매체로 등장했다. 비정부조직이 자율적이지 못한 중국사회에서 익명의 무수한 대중에 대한 얼굴 없는 선동이 유일하게 여론을 조직화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 학생운동세대인 한국의 10대와 20대가 월드컵으로 광장에서의 ‘축제’와 ‘선동’을 경험하고, 인터넷을 통해 반미 민족주의를 급속히 공유하면서 촛불시위로, 다시 탄핵반대시위로 조직화되어갔던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이번의 반일시위에 대해서도 서둘러 수습국면으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없다.
대입 특혜로 중간계층 재생산 돕는 중국정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정부는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베이징과 상하이 도시민과 중산계층에 수많은 특혜를 주었다. 1990년대 초 12억 중국의 대학생수는 200만 명으로, 당시 총인구가 중국의 3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한국의 대학생 수보다 겨우 30만 명 가량 많았을 뿐이다(청말[淸末] 중국인구 4억 여 명중에 과거학위소지자는 135만여 명이었다). 현재 대학생 정원을 늘리고 있지만, 중국 사회에서 대학입학, 특히 베이징, 상하이의 명문대학 졸업증은 전통시대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유일한 ‘성공의 사다리’이다. 두 도시에 호구(戶口)를 가지고 있는 도시민들은 자녀들의 대학 입학에서 현지 지역할당제의 특혜를 누리며, 중산계층의 재생산을 국가를 통해 이루고 있다. 과거가 사라진 뒤 5·4가 일어날 수 있었던 텅 빈 공간은 지금은 없다. 5·4에서 이뤄진 중간계층과 일반대중의 광범위한 결합을 기대하기에는 현재의 중국 중산계층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북경시위의 불발은 중국 시민사회의 역사적 종속성을 증거한다.
국가권력과 중간계층 이어주는 ‘강력하고 부유한 중국’이데올로기
앞으로 중국에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도시중산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 있을지, 혹은 심각해지고 있는 농촌 지역의 모순이 전통적인 반란의 형태로 폭발할 지는 쉽사리 점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국사회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것은 후자가 국가권력에 대해 홀로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다소 종속적이나마 자율성을 추구하면서 각 분야에서 내적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의 국가 대 사회의 이분법적 공식에 너무 젖어있지는 않은가? 수천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중국의 국가권력과 중간계층은 일방적 종속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면서 중국사회의 질서를 조정해왔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전통사회에서 이들이 공유한 이데올로기가 과거를 통해 재생산되는 조화로운 유교적 사회질서였다면, 지금은 강력하고 부유한 중국이다. 중국의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간다면, 그것은 ‘강력하고 부유한 중국’이 더 이상 공산당이 제시한 모델이 아닐 때일 것이다.
중국 중간계층의 이중성
한편, 역사적으로 접근할 때에는, 농촌사회를 지배했던 과거(科擧) 학위 소지자층(紳士, gentry), 근대 도시의 동향단체와 직업별 조직 등 중간계층의 역할을 중국 NGO의 성격 및 존재방식에 투영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중간계층은 인민과 국가권력을 이어주는 존재로서 국가권력을 지역사회에 침투시키기도 하고, 지역사회의 여론을 만들고 국가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던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 가능성, NGO의 성격을 살펴볼 때에도 국가권력에 대한 종속적 성격과 기층의 대변인으로서 자율적 성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환경, 교육, 국가발전 불균형 문제 등에서 자율적 목소리가 커지는 경향에서 시민사회의 발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중간계층이 국가권력을 타도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선 적은 없었다. 단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1905년 청조가 과거시험제도를 폐지하자,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지역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중국의 신사층은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더 이상 제공해 주지 않는 청조에 과감하게 등을 돌릴 수 있었다. 과거를 열어주지 않는 정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권력에 대항한 것은 누구였는가? 그것은 광대한 농민대중이었고, 형태는 반란이었다.
5·4운동의 성공과 중간계층의 참여
신해혁명 이후 과거가 없는 세상에서 중간계층에 대한 포섭 노력을 포기한 중국에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의 21개 조약 요구에 대한 거부와 매국관료 처벌을 주장하며 일어난 1919년 5·4 운동이 그것이다. 5·4운동의 획기성은 중간계층에 포섭되어야 할 지식인집단이 반일운동을 매개로 노동자, 상인 등 일반 도시대중과 결합했고, 반란이 아닌 방식으로 국가권력에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5·4운동은 거리의 기습적인 대중선동, 대자보, 노동야학 등 중국에 전혀 없었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5·4운동은 국공(國共) 양당의 창당과 노동, 농민, 도시민중 운동의 본격적 고조에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일반적으로 1989년 천안문시위를 중국 시민사회의 단초를 보여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천안문시위는 사실상 학생 위주의 시위였다. 이에 반해, 5·4 운동은 중간엘리트층이 대중과 광범하게 결합, 여론을 형성하고,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공했다. 당시 여러 계층을 묶어준 구심점은 반일 민족주의였다.
5·4 운동 이후 근대 중국의 도시개항장을 중심으로 서구적 의미의 시민사회, 공공영역과 근접한 공간이 형성됐다. 그러나 1949년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에는 20세기 초에 있었던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시민사회나 비정부조직이나마 존재하지 않는다. 혹자는 개혁개방 이후 자율적인 시민사회 성장의 가능성이 1989년 천안문사태로 좌절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21세기의 ‘5·4’는 언제 올 것인가? 그 점에서 작금의 반일시위가 시사하는 바는 결코 적지 않다.
5·4운동과 반일시위의 닮은 점과 차이점
5·4운동이 조선의 3·1만세 운동에 자극받은 바가 적지 않았던 것처럼, 독도와 일본교과서 문제로 촉발된 한국의 대규모 반일 시위 이후인 4월 9일 중국 베이징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청두(成都)의 폭력 시위를 기폭제로 4월 16일과 17일에는 상하이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반일시위가 확산됐다. 이 시위는 5·4운동과 유사성과 차별성을 다 가지고 있다. 우선 반일민족주의가 시위를 촉발시켰다는 점, 학생시위가 대중시위로 확산됐다는 점,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 유사하다.
그러나 차이도 적지 않다. 먼저 정부의 태도이다. 5·4 운동에 대해 중국정부는 강경진압 입장을 고수했고, 그 결과 시위를 더 키웠다. 그러나 현 중국공산당은 대외와 대내에 다른 두 얼굴을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외신을 공급하는 국영통신사인 신화사가 초기 상하이 시위대 숫자를 10만 명으로 부풀려 보도했으나, 대내적으로는 시위가 격화되기 전인 4월 15일 이미 보도통제 및 시위 규제에 들어갔다. 특히 시위가 전국적으로 파급된 직후인 19일에는 중국공산당 선전부가 나서서 베이징에서 대형보고회를 열고 시위 불허와 본격적인 치안단속을 선포했다. 21일에는 다시 공안성(公安省)이 데모규제의 공식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반일 시위 수습 서두른 중국 당국의 속내
중국의 강대국화, 일본의 전후 체제 탈각 및 ‘보통국가’화, 미국의 태평양정책 변화라는 21세기 초의 완전히 새로운 국제정세에서, 중국은 아시아 주변국을 고려하지 않는 일본의 질주를 제어하기 위해 반일시위를 초기에 묵인한 측면이 있었다. 사실상 정부의 허가 없는 시위란 중국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진압하지 않는 것은 일본 언론 말대로 방조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위가 과격해지고 전국으로 번져 가자 중국정부는 시위 불허 조치를 강화했다. 현재 중국의 미디어에서는 반일데모가 보도되지 않고 있다. 인터넷에도 “반일시위 해악론”, “대학생, 더 이상 맹목적으로 일본상품 배척하지 않는다”, “분을 푸는 것은 쉽지만, 분을 인내하는 것이 어렵다”, “경제가 없으면 외교도 없다” 등 반일시위를 자제하자는 목소리를 담은 기사만이 떠 있다. 중국정부의 대일 자세가 시위로 인한 손실 보상 등 유화적으로 바뀌면서, 현재 시위는 진정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5·4와 달리 통제 기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정부의 대내적 태도는 반일시위를 매개로 한 민간사회의 조직화가 민주주의의 결핍, 경제적 불평등, 지역격차, 도농갈등 등 잠재돼 있는 불만들이 터져 나오는 계기로 연결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5·4운동에는 베이징이 중심이 되었지만, 이번 시위는 4월 9일의 베이징 시위가 발단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17일의 전국적 시위에서 베이징은 제외됐다.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시위 불허 방침은 참여단체들이 인터넷을 통해 시위를 취소하게 했던 것이다.
5·4는 대자보, 가두연설이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어냈지만, 이번 시위에는 인터넷과 휴대폰 문자서비스가 동원 매체로 등장했다. 비정부조직이 자율적이지 못한 중국사회에서 익명의 무수한 대중에 대한 얼굴 없는 선동이 유일하게 여론을 조직화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포스트 학생운동세대인 한국의 10대와 20대가 월드컵으로 광장에서의 ‘축제’와 ‘선동’을 경험하고, 인터넷을 통해 반미 민족주의를 급속히 공유하면서 촛불시위로, 다시 탄핵반대시위로 조직화되어갔던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이번의 반일시위에 대해서도 서둘러 수습국면으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없다.
대입 특혜로 중간계층 재생산 돕는 중국정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정부는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베이징과 상하이 도시민과 중산계층에 수많은 특혜를 주었다. 1990년대 초 12억 중국의 대학생수는 200만 명으로, 당시 총인구가 중국의 3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한국의 대학생 수보다 겨우 30만 명 가량 많았을 뿐이다(청말[淸末] 중국인구 4억 여 명중에 과거학위소지자는 135만여 명이었다). 현재 대학생 정원을 늘리고 있지만, 중국 사회에서 대학입학, 특히 베이징, 상하이의 명문대학 졸업증은 전통시대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유일한 ‘성공의 사다리’이다. 두 도시에 호구(戶口)를 가지고 있는 도시민들은 자녀들의 대학 입학에서 현지 지역할당제의 특혜를 누리며, 중산계층의 재생산을 국가를 통해 이루고 있다. 과거가 사라진 뒤 5·4가 일어날 수 있었던 텅 빈 공간은 지금은 없다. 5·4에서 이뤄진 중간계층과 일반대중의 광범위한 결합을 기대하기에는 현재의 중국 중산계층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북경시위의 불발은 중국 시민사회의 역사적 종속성을 증거한다.
국가권력과 중간계층 이어주는 ‘강력하고 부유한 중국’이데올로기
앞으로 중국에 자율적인 시민사회가 도시중산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될 수 있을지, 혹은 심각해지고 있는 농촌 지역의 모순이 전통적인 반란의 형태로 폭발할 지는 쉽사리 점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국사회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것은 후자가 국가권력에 대해 홀로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다소 종속적이나마 자율성을 추구하면서 각 분야에서 내적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의 국가 대 사회의 이분법적 공식에 너무 젖어있지는 않은가? 수천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중국의 국가권력과 중간계층은 일방적 종속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면서 중국사회의 질서를 조정해왔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전통사회에서 이들이 공유한 이데올로기가 과거를 통해 재생산되는 조화로운 유교적 사회질서였다면, 지금은 강력하고 부유한 중국이다. 중국의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간다면, 그것은 ‘강력하고 부유한 중국’이 더 이상 공산당이 제시한 모델이 아닐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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