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 진해원 회원] “가야곡 사람들 덕택에 건강해졌어요”
2005/2005년 05월 :
2005/05/01 00:00
야트막한 산을 병풍 삼아 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충남 논산 가야곡의 작은 마을. 열 두 집이 사는 삼전리에 자리잡은 희문당(喜聞堂)을 찾았다. ‘기쁜 소리가 들리는 집’이란 근사한 이름을 가진 이 집에 사는 진해원(53세) 회원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집 어귀에는 자잘한 하얀 꽃송이를 매단 살구나무가 손님을 반긴다. 집 주위에 자라는 푸른 대나무는 싱그럽다. 분위기에 젖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다람쥐와 새들의 친구가 되기까지
12년 전 아픈 몸을 이끌고 이곳에 온 진해원 씨는 지금 많이 건강해졌다고 한다. 그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자연치유법을 선택했다. 까다로울 만큼 몸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몸을 편하게 하려고 애쓴다는 그는 물을 많이 마시는 것과 적게 먹는 것을 강조한다.
“약은 독이고, 먹는 것은 병입니다. 12년 전 간경화 진단을 받은 뒤 한번도 병원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선친과 선친의 세 형제분 모두 간경화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편찮으실 때 약을 구하기 위해 각방을 뒤졌지만 쓸데없다는 것을 체험했지요. 현대 의학은 치료라는 명분으로 아픈 사람을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집안의 내력이 그런지라 간경화 진단은 죽음의 선고나 다름없었어요. 나의 건강을 병원에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에 도시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혼자 이곳으로 내려와 투병을 시작했습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먹고 살아가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처음 시작한 농촌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닭 치고 농사짓고, 나무를 재배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실패하기 일쑤였다. 몸을 혹사할 수 없는 처지라 더 어려웠다. 그래도 그는 태평하기만 하다. 가끔 절집 일을 도와주고, 마을 주민들 돕는 것만으로도 혼자 먹고살기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경쟁과 시간에 쫓기던 도시의 긴장에서 벗어나 자연에 순응하는 지금의 생활이 기쁘고 감사하기만 하다.
“이 집엔 여러 생명들이 함께 삽니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마당에는 지렁이가 많아서, 지렁이를 잡아먹으러 두더지가 들락거립니다. 땅을 다 파서 잔디를 망쳐놓는 게 문제지만요. 땅강아지와 도마뱀은 또 얼마나 많은데요. 매일 다람쥐가 오고, 여름엔 산토끼도 내려와 놀지요. 목욕탕에 뱀이 나온 적도 있어요. 문을 열어 놓고 나갔다 나중에 들어와 보니 사라졌더라고요. 언젠가는 못 쓰는 신발장을 마당에 내놨더니 새들이 집을 지었어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산토끼와 새를 반기고 하잘 것 없는 미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열린 감성을 가진 그도 알고 보니 병이 나기 전에는 치열하게 사회운동을 하면서 보람만큼이나 상처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노동상담소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활동에 앞장섰던 수원지역 변혁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86년 5·3인천사태가 있은 얼마 후였을 거예요. 버스를 타고 가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어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단순히 사용자나 정권의 문제만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이며 배후에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 때의 강렬한 자각이 저를 운동에 전념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본이고 기득권층이었어요.”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일 때 그는 카메라를 들고 투쟁의 현장을 찾아다녔다.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였다.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노동자 지원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파업 이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는 노동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1987년 9월 수원 노동상담소를 열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엔 노동상담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지역 민청련을 조직해 수원 민청련 초대위원장이 되었어요. 기층민중이 중심이 된 지역조직이 수원에서도 생겨난 거죠.”
치열했던 운동이 남긴 상처를 다스리며
그러나 운동의 보람과 기쁨은 잠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노동상담소를 할 때 정말 힘들었어요. 밤잠 못 자면서 했죠. 진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때 다 늙었어요. 흰머리도 그 때 났어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만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매향리 사건, 박창수 열사 사건, 교직원노조 대책위 등……. 그러면서 1991년 몸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도저히 일할 수 없을 지경이 된 거죠. 간경화 진단을 받고는 이러고 있으면 죽겠다 싶어 도망치다시피 내려왔습니다.”
처음엔 딱 5년만 몸을 돌보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안해했다.
“그 때의 삶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하고 싶어요.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요. 거기 가면 다시 병이 나요. 지금도 피곤하면 견뎌내질 못하거든요.”
온 열정을 쏟았던 운동을 후회하지 않지만 운동은 그에게서 건강뿐 아니라 감성도 앗아갔다는 것을 이곳에 내려와 알았다.
“유행가요를 듣지 못할 정도였어요. 다방 같은 데서 음악이 나오는데 고문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사랑타령 같은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었던 거죠. 철저히 각인돼 있었나 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일이 무겁기도 했고요. 제가 몸담고 있었던 곳은 그야말로 철의 규율을 가진 강고한 조직이었거든요.”
12년이 지난 지금도 감성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며 웃는 그에게선 슬픔이 전해진다. 그에게 잃어버린 것들을 조금씩 되살려 주는 건 투박하지만 인정 넘치는 마을 주민들이다.
“처음 여기 와서 잠만 내리 자면서 열흘 동안 꼼짝도 안 했던 적이 있어요. 그 때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고 깨웠던 일을 잊을 수 없어요. 제가 안 보인다 싶으면 와 보고 걱정해주시는 마음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 뒤론 아침에 일어나 내려가 인사하고 올라와 다시 자곤 했어요. 생명점 찍는 거죠.”
그도 동네에서 좋은 이웃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녁이면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랑방을 열어 말벗도 되고 음식도 대접한다. 여름엔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와 야채와 라면까지 넣고 한 들통 끓여 이웃들 새참으로 내가는 그다. 이곳에 와 변변한 일을 한 적도 없지만 쌀 한 번 안 사먹어 본 건 모두 주민들 덕이다.
시골에 들어박혀 생활하고 있지만 사회를 완전히 못 본 척하고 살지는 못해 참여연대 회원이 되었다는 그는 참여연대가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활동해 달라고 당부했다.
다람쥐와 새들의 친구가 되기까지
12년 전 아픈 몸을 이끌고 이곳에 온 진해원 씨는 지금 많이 건강해졌다고 한다. 그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자연치유법을 선택했다. 까다로울 만큼 몸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몸을 편하게 하려고 애쓴다는 그는 물을 많이 마시는 것과 적게 먹는 것을 강조한다.
“약은 독이고, 먹는 것은 병입니다. 12년 전 간경화 진단을 받은 뒤 한번도 병원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선친과 선친의 세 형제분 모두 간경화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편찮으실 때 약을 구하기 위해 각방을 뒤졌지만 쓸데없다는 것을 체험했지요. 현대 의학은 치료라는 명분으로 아픈 사람을 너무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집안의 내력이 그런지라 간경화 진단은 죽음의 선고나 다름없었어요. 나의 건강을 병원에 맡길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에 도시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혼자 이곳으로 내려와 투병을 시작했습니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먹고 살아가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처음 시작한 농촌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닭 치고 농사짓고, 나무를 재배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실패하기 일쑤였다. 몸을 혹사할 수 없는 처지라 더 어려웠다. 그래도 그는 태평하기만 하다. 가끔 절집 일을 도와주고, 마을 주민들 돕는 것만으로도 혼자 먹고살기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경쟁과 시간에 쫓기던 도시의 긴장에서 벗어나 자연에 순응하는 지금의 생활이 기쁘고 감사하기만 하다.
“이 집엔 여러 생명들이 함께 삽니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마당에는 지렁이가 많아서, 지렁이를 잡아먹으러 두더지가 들락거립니다. 땅을 다 파서 잔디를 망쳐놓는 게 문제지만요. 땅강아지와 도마뱀은 또 얼마나 많은데요. 매일 다람쥐가 오고, 여름엔 산토끼도 내려와 놀지요. 목욕탕에 뱀이 나온 적도 있어요. 문을 열어 놓고 나갔다 나중에 들어와 보니 사라졌더라고요. 언젠가는 못 쓰는 신발장을 마당에 내놨더니 새들이 집을 지었어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산토끼와 새를 반기고 하잘 것 없는 미물에도 감사할 줄 아는 열린 감성을 가진 그도 알고 보니 병이 나기 전에는 치열하게 사회운동을 하면서 보람만큼이나 상처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노동상담소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활동에 앞장섰던 수원지역 변혁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986년 5·3인천사태가 있은 얼마 후였을 거예요. 버스를 타고 가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어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단순히 사용자나 정권의 문제만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이며 배후에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 때의 강렬한 자각이 저를 운동에 전념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본이고 기득권층이었어요.”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일 때 그는 카메라를 들고 투쟁의 현장을 찾아다녔다.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였다.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노동자 지원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파업 이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방황하는 노동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1987년 9월 수원 노동상담소를 열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엔 노동상담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지역 민청련을 조직해 수원 민청련 초대위원장이 되었어요. 기층민중이 중심이 된 지역조직이 수원에서도 생겨난 거죠.”
치열했던 운동이 남긴 상처를 다스리며
그러나 운동의 보람과 기쁨은 잠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노동상담소를 할 때 정말 힘들었어요. 밤잠 못 자면서 했죠. 진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때 다 늙었어요. 흰머리도 그 때 났어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만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매향리 사건, 박창수 열사 사건, 교직원노조 대책위 등……. 그러면서 1991년 몸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도저히 일할 수 없을 지경이 된 거죠. 간경화 진단을 받고는 이러고 있으면 죽겠다 싶어 도망치다시피 내려왔습니다.”
처음엔 딱 5년만 몸을 돌보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안해했다.
“그 때의 삶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할 수만 있다면 다시 하고 싶어요.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요. 거기 가면 다시 병이 나요. 지금도 피곤하면 견뎌내질 못하거든요.”
온 열정을 쏟았던 운동을 후회하지 않지만 운동은 그에게서 건강뿐 아니라 감성도 앗아갔다는 것을 이곳에 내려와 알았다.
“유행가요를 듣지 못할 정도였어요. 다방 같은 데서 음악이 나오는데 고문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사랑타령 같은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었던 거죠. 철저히 각인돼 있었나 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일이 무겁기도 했고요. 제가 몸담고 있었던 곳은 그야말로 철의 규율을 가진 강고한 조직이었거든요.”
12년이 지난 지금도 감성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며 웃는 그에게선 슬픔이 전해진다. 그에게 잃어버린 것들을 조금씩 되살려 주는 건 투박하지만 인정 넘치는 마을 주민들이다.
“처음 여기 와서 잠만 내리 자면서 열흘 동안 꼼짝도 안 했던 적이 있어요. 그 때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고 깨웠던 일을 잊을 수 없어요. 제가 안 보인다 싶으면 와 보고 걱정해주시는 마음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 뒤론 아침에 일어나 내려가 인사하고 올라와 다시 자곤 했어요. 생명점 찍는 거죠.”
그도 동네에서 좋은 이웃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녁이면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랑방을 열어 말벗도 되고 음식도 대접한다. 여름엔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와 야채와 라면까지 넣고 한 들통 끓여 이웃들 새참으로 내가는 그다. 이곳에 와 변변한 일을 한 적도 없지만 쌀 한 번 안 사먹어 본 건 모두 주민들 덕이다.
시골에 들어박혀 생활하고 있지만 사회를 완전히 못 본 척하고 살지는 못해 참여연대 회원이 되었다는 그는 참여연대가 스스로를 조직화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활동해 달라고 당부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