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 씨를 뿌린다. 콧숨 한 줄기에도 훅 날아가버릴 것 같은 상추씨를 뿌린다. 붉은 상추, 푸른 상추 고루 뿌린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알타리무 씨도 뿌린다. 이토록 화사한 연보랏빛 씨앗에서 어떻게 초록 이파리가 열리고 흰 무가 달리는 것인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내처 시금치, 부추 씨앗 봉투도 집어든다. 벌써 이랑 속에서는 감자 싹이 땅을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을 것이다. 겨울을 난 파도 새파랗게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뿌리고 심는 계절이다.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손바닥만한 텃밭도 그러하다. 우리 동네에선 4월 전후 씨앗을 뿌리고, 모종은 5월 들어 심는다. 고추, 고구마, 오이, 토마토, 가지, 들깨 이런 것들은 모종으로 심을 것이다. 모종만 심다가 처음으로 씨앗을 뿌릴 때의 감동은 지금도 선하다. 신의 조수가 되어 창조의 영역에 한 발 들이민 것처럼 거룩한 기분마저 들었다. 잘못 해서 싹이 안 나면 어쩌나 조심스런 손길로 씨앗을 뿌리고 가만히 흙을 덮어주곤 했다. 그게 엊그제 일 같은데, 이제는 농사에 이골난 농부처럼 조금은 무심한 손길로 씨를 뿌리는 제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난다.

뭐 심었나, 뭐는 언제 심나, 화초에 꽃이 피었나, 나무에 싹이 텄나 어쨌나……. 이맘때 이웃들과 주고받는 이야기는 대개 이런 것들이다. 씨 뿌릴 때를 놓쳐 아쉬워하는 이웃에게 모종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한다. 생명의 안부를 묻고 생명을 나누는 우리들의 싱그러운 아침 마당이다.

묵은 김치와 장아찌에 물릴 때, 산과 들로 나간다. 살랑거리는 바람도 좋지만 실비를 맞으며 나물 캐는 기분은 끝내준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향긋한 국을 끓이고, 입맛 돌게 하는 나물을 조물조물 무치고, 달래부추전도 부친다. 쑥버무리, 홋잎나물밥을 안치고 돌나물 물김치도 담가둔다. 냉이를 캐는 데는 30분이면 되지만 다듬고 씻는 데 두 시간이 걸린다. 어느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손수 캐어 정갈하게 무친 냉이 한 보시기가 상에 올랐다 하면 나는 그 집 안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더 이상 재보고 달아보지 않는다.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해도 도시에 살 때처럼 마트로 냉큼 달려가지는 않는다. 산과 들, 텃밭이 온통 내 시장이다. 소박한 밥상을 차려놓고 묻지 않는데도 거둔 것, 캐온 것 밥상의 내력을 신이 나서 읊어댄다. 누군가는 난생 처음 제 손으로 농사지은 쌀로 모락모락 김 나는 밥을 지어놓고는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고 했다. 언젠가는 나도 몸소 논 갈아 따순 밥 한 그릇 지어보리라. 돈으로 사서 쓰는 생활만 하다가 내 손으로 생산하는 재미가 이렇게 오지다. 한동안 너나 없이 웰빙을 외치더니 요즘은 좀 잠잠하다. 돈으로 사는 웰빙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그것이 진정한 웰빙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미심쩍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웰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겨울에는 부리 마저 꽁꽁 얼었던 것인지, 날씨 풀리니 입 풀린 새들이 앞다퉈 지저귄다. 사람보다 휘파람을 잘 부는 새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꿩꿩거리는 새도 있다. 모내기가 끝나면 개구리 합창을 들으며 잠을 이루거나 설칠 것이다. 눈과 입만 아니라 귀도 호사다. 오감으로 자연을, 봄을 만끽한다. 시골 사는 불편 잊어버릴 만 하지 않은가.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2005/05/01 00:00 2005/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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