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독재시대 정경유착 등 특혜를 기반으로 성장한 재벌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 한국 재벌의 특성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한국식 성장 모델은 고도의 특혜와 집중의 경제라는 파행적 불균형 체질을 가지고 있다. 개발 연대에 형성된 이 고질병은 민주화 시기를 경제적 자유화와 규제 완화의 시기로 왜곡되게 만들었고, 구제금융체제(IMF) 위기 이후 전면 개방과 규제 완화의 시대에 진입하면서 경제 구조의 양극화와 두 국민으로의 분열상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재생산되고 있다. 이 문제의 중심에 재벌이 존재한다.

개발주의와 재벌



국가가 기업의 투자를 자유 시장에 맡기기 않고 전략 산업의 육성을 위해 유도하는 것은 개발국가 모델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주로 투자를 담당하는 것은 기업이기 때문에 기업 체제의 차이는 개발 모델의 성격에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한국의 개발 모델은 재벌이 경제 성장의 대표 주자가 되고, 국민 경제 성장과 국민 대중의 살림살이가 소수 재벌 집단의 성장 성과에 매이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국유 기업과 중소 기업의 병행 발전 방식을 취한 대만 모델과는 크게 달랐다. 불균형방식이라 해도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시대적 성취이며, 여기에는 재벌의 기여도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다. 세계경제사는 심각한 불균형과 특혜로도 국민경제 수립에 실패한 경우를 많이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의 빛과 그늘을 함께 살피는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하며, 97년 위기는 그런 반성적 재조명의 기회를 주었다.

군사정부는 은행을 국유화하여 정책 금융과 차관의 지불 보증을 통해 재벌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었고, 국가- 재벌의 지배 연합이 성장을 선도했다. 한국 개발 경제의 빛과 그림자는 이 국가-재벌의 지배 연합, 국가-재벌-은행의 삼각 밀착체제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 성장의 중심에는 재벌의 고도 성장이 있었고 성장의 주된 과실은 재벌이 독차지했다. 반면 재벌의 손실은 전체 사회와 전국민에게 전가되었다. 노동 대중은 병영적 통제의 억압속에서 ‘선성장 후분배’성장 시스템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또한 재벌이 비대해지는 만큼 중소 기업은 저발전되었다.

민주화, IMF 위기와 재벌



그러나 국가의 특혜와 국민 대중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선성장 이후 후분배는 허구적 구호로 끝났다. 파행적 불균형은 재생산되었고, 총수가 전제권을 행사하는 무책임하고 불투명한 족벌 지배 = 황제경영과 고부채 외형 확장주의 등 근본적인 문제점은 지속되었다. 민주화의 시대에는 이에 부응하여 성장 모델의 발본적 전환이 요구되었다. 시대는 자본과 노동의 두 발로 걷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공생의 협력관계에 들어가는 이해 당사자 복지 자본주의, 그리하여 공정한 규칙에 기반을 둔 동반 - 균형 성장 모델,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모델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를 배반했다.

87년을 전환점으로 한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이중의 의미에서 혼성적(hybrid) 체제다. 이 민주주의는 당면 4대 개혁 입법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에서 보듯이 정치적으로 여전히 낡은 구체제의 유산에 짓눌려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에 경제적 자유주의가 동행하면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게 되었다. 민주화 시대에 경제적 자유화, 규제 완화와 유연화의 기조가 우세한 것은 커다란 역설이다. 경제적 자유화는 국가의 연성화와 강한 재벌로의 권력 이동, 그리하여 ‘재벌 전횡 시장경제’를 낳았다. 재벌 자신이 국가의 통제와 규율에 저항하면서 무분별한 자유화를 요구하고 세계 경영의 길로 나섰다. 국가 후퇴 후 재벌을 규율할 수 있는 기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재벌체제를 현대적으로 재구축할 수 있는 내적 규율 능력을 갖지 못한 데서 민주화 10년의 딜레마 - 더 소급하여 개발주의 체제의 딜레마 - 가 존재한다.

1997년 IMF 위기는 국내적으로는 재벌에 깊숙이 발목잡힌 무책임 시장 경제의 모순이 누적된 결과라 할 것이며 이것이 대기업의 연쇄 부도와 도산으로 나타 났다. 여기에 미국-국제금융자본-IMF 복합체가 주도하는 개방의 외압이 결합되었고 그리하여 금융 자유화와 개방은 내외 압력의 합력으로 초래되었던 것이다.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와 재벌



민주화 시대에 재벌 개혁은 IMF 관리체제의 등에 올라탄 김대중 정부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추진되었다. 재벌 개혁의 ‘5+3 원칙’은 분명 개혁적 의미를 가진 정책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는 중도 반절로 끝났고, 특히 3대 보완 원칙은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집권 후반기 경기 침체와 이를 틈탄 재벌의 규제 완화 공세에 밀려 개혁 기조는 급속히 후퇴했다. 30대 대기업 기업집단지정제도와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유명무실화, 재벌소속 금융기관의 계열사 주식보유한도 및 의결권제한 완화 등 총수의 계열사 지배권을 강화하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 원칙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반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규칙 기반 시장경제로 간다고 하면서도 개혁이 엄정한 법적 규칙과 절차에 의거하기 보다는 주로 대통령의 자의적 재량에 의존하여 이루어졌고, 이것이 개혁의 공정성, 일관성, 안정성에 큰 손상을 주었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개혁 기조다. 재벌 개혁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 패러다임 속에서 추진된 것이지만, 어떠한 시장, 어떠한 민주주의인가가 문제다. 이해당사자의 참여와 민주적 감시 기제는 배제되었고, 이는 ‘디제이노믹스’에 이어 참여를 내세운 ‘노노믹스’에서도 다를 바 없다. 이것이 재벌 개혁의 성격과 효과를 결정적으로 규정했다. 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모범으로 하는 전면 개방된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격변하고 있다. 시장 논리가 기업 경영을 규율하고 노동의 배제적 유연화를 부르는 모델이 출현했다. 시스템의 관제 고지는 금융시장이 차지하고, 재벌은 국제금융자본과 ‘적응적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있다. 구조조정이 한국의 사회경제에 가져온 최대의 결과는 국제금융자본과 재벌의 자본 지배연합의 결정적 주도권이며, 규제 완화와 유연화의 요구에서 재벌은 국제 금융 자본과 한패가 되고 있다. 개방경제로 가더라도 그 충격을 최소화하고 국민경제의 안정적 균형 성장 나아가 ‘비교제도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대내적 조절 장치와 제도적 보완 기제를 마련해야 할 것인가 하는 사고는 처음부터 완전 실종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책임 없는 통제권의 과잉과 ‘역차별’, 국적 자본의 경영권 위기라는 ‘구조 개혁의 딜레마’ 상황에 빠진 것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97년 위기와 IMF 관리 체제를 거치면서 책임성과 투명성, 시장 규율,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 등이 새 시대의 표어가 되었다. 다시 현 정부는 참여, 통합이라는 새 표어를 내세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실질적 내용이다. 어떠한 책임성과 투명성인가, 어떠한 시장, 어떠한 민주주의인가. 현 정부는 참여, 국민 통합, 사회 통합 그리고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의 구호에 부합하는 어떤 실질적 내용을 구현하였는가. 오히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무분별한 자유화와 규제 완화, 유연화의 강행, 그리하여 앞문으로 추진한 책임성과 투명성 증대를 훨씬 압도하여 뒷문으로 불러 들인 투기적 시장과 내외 자본의 무책임성의 증대, 그리고 그와 대조를 이루는 국민경제 구조적 불균형의 심화, 두 국민으로의 분열과 서민 대중의 삶의 피폐의 양상이다. 여기에 내수 침체의 구조적, 계급적 기초가 있다. 이런 파행 경제를 끌고 과연 국민 소득 이만불의 선진국 또는 동북아 중심국가로 갈 수 있을지, 또 설사 간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 무슨 정당성이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한국경제는 다시 진로 전환의 기로에 섰다.

이병천 참여사회연구소 운영위원,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2004/11/01 00:00 2004/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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