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게 노동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다
2006/2006년 03월 :
2006/03/01 00:00
우리는 노동자다!
특수고용직.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법적 올가미로 인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보험설계사, 방송작가, 학습지 교사, 레미콘 기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대리운전기사, 간병인 등이 그들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에 이어 제3의 고용형태로 부상한 특수고용직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이가 100만 명을 육박한다고 한다. 기억을 되살려보자.
2005년, 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집단시위 등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요구했다. 레미콘 기사들의 시위를 지원하던 한국노총 간부는 현장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들의 절절한 외침과 희생으로 특수고용직 문제는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정부에서 특수고용직 관련 입법안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 2월 제정된 제1회 김진균상 운동 부문은 특수고용직에 해당하는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조 위원장 정금자 씨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단지 일터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고, 싸우다 보니 앞장서게 되었고, 앞장서다 보니 끝장을 봐야겠다고 작정하고 몸을 던져 싸웠을 뿐”이라고 회상하며 “차별 없는 평등 세상”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유쾌한’ 투쟁
정금자 씨는 97년 서울대병원에서 운영하는 간병인 무료소개소의 공채를 거쳐 일을 시작했다. 여고 졸업 후 독일을 가기 위해 간호조무사 자격을 땄으나 좌절되고 잠시 병원에 근무한 경력이 인연이 되었다. 그러나 99년 병원 측이 무료소개소를 없애고 간병인 공급권을 용역업체에 맡긴다는 소문이 돌자 그이는 ‘이대로 앉아서 손놓고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뜻을 같이하는 간병인들과 상조회를 결성했다.
“유료 소개소는 사적 영리를 추구하면서 회비를 걷거나 물건을 강매하는 중간착취가 엄존하는 일종의 기업이죠. 간병인들은 늘 심리적으로 압박 당하고 ‘간병’ 의식도 희미해져 환자에게도 안 좋은 환경이 되는 거죠. ”
정 씨는 민주노총 등을 찾아다니며 노동조합 설립의 가능성을 타진했고 2001년 비밀리에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10명으로 출발한 노조는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간병인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80명의 조합원을 자랑했었지요.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병원 측의 압력으로 8명만 남게 됐어요.”
2003년 무료소개소는 갑작스레 문을 닫고 간병인들에게는 이를 알리는 한 장의 통지서가 날아온다. 이 때부터 보건의료노조 산하 서울대병원노조의 지원을 받으며 간병인노조의 투쟁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100명 가량의 간병인이 참여했으나, 유료 소개소가 들어오면서 병원 측의 적극적인 회유로 대부분 떨어져 나갔어요. 남은 10여 명은 굴하지 않고 병원 로비와 원장실 등에서 투쟁을 계속했는데,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 병원 밖으로 밀려나게 됐어요.” 이들 투쟁단이 국가인권위원회로 옮겨가 농성하면서 비로소 이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2004년 유료소개소의 자격 문제가 불거지자, 무료소개소의 도입을 요구하며 서울지방노동청을 점거했다.
“좋은 소식만 있는 게 아니고 피가 마르는 싸움이었거든요. 다른 데서는 몇 시간 지나면 다 쫓겨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3일을 버텼지요. 그만큼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찰들이 매일 와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8층에서 줄줄이 뛰어 내릴 테니까 알아서 해’라고 강경하게 나가니 꼼짝 못하는 거죠.
유서를 품고 투쟁하던 동료가 경찰이 들어오면 옷을 벗자고 하더라구요. 모두 밤새 웃고 떠들며 연습했어요. 노동청장 일 못하라고 일부러 책상 치고 억지로 웃고 떠들었어요. 그러다가 경찰이 쳐들어왔어요. 그이가 1등으로 옷을 벗고 우리도 벗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다 끌려나갔지요. 아, 유치장 가서도 조용했나요? 웃고 떠들고 그랬죠.”
농성은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몸이 붓기도 하고, 입이 돌아가기도 하고, 후유증으로 신부전증을 앓은 이도 많았다.
“힘들었지만 우린 뭉쳐서 잘했어요. 선하고 의로운 마음이 발동한 거 같아요.”
농성투쟁단이 8개월 만인 2004년 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병원노조의 도움이 컸다. 협상력이 없는 간병인 노조를 대신해 병원과 적극적으로 교섭해주었다. 지금 서울대 병원에는 유료소개소, YWCA, 약손엄마회 등을 통해 250여 명의 간병인이 조달된다.
약손엄마회 가운을 입은 80여 명이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무료소개소 소속이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8개월 간의 투쟁을 성공적으로 마친 덕분에 간병인에 대한 사회인식도 적잖이 바뀌었다.
24시간 노동에 5만 원, 최저임금도 멀다
요즘, 환자가 생기면 가족들이 24시간 옆에서 간호하기 곤란한 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경제적 부담을 무릅쓰고 간병인을 얻는다.
일정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 간병인은 꼭 필요한 직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는 살인적인 노동으로 몸이 망가지는” 간병인에게 돌아가는 대가는 하루 24시간 노동에 5만원이 고작이다.
환자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금액이지만, 1일 8시간 노동으로 환산하면 1만 6,600원으로 최저임금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간병인들은 남편이 죽거나 일자리가 없어 생계를 위해 뛰어든 여성이 대부분인데, 매일 24시간, 매주 6일을 근무하고 한 달에 120만 원 정도 받아 가족을 부양하는 현실입니다.”
사실 간병은 원칙적으로 간호사의 몫일 수 있다. 그러나 병원이 수익을 위해 최소한의 간호 역량을 유지하면서, 환자들에게 간병인을 권장하는 풍토가 정착된 지 오래다. 마땅히 공공의료 영역에 포함되어야 할 간병을 개인적 선택에 내맡기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간병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 사회,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라
정금자 씨의 투쟁은 남다른 이력을 가진 남편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야당 정치인의 아내였다. 80년 소위 ‘동교동계’의 일원이던 남편은 고향인 전남 고흥으로 피신해 어려운 여건에서도 정치활동을 계속했고 그녀는 기독교농민운동을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부부는 축산업에 뛰어들었다가 파산하고 빈털터리가 된다. 그녀의 남편은 다시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어 상경했으나 실직과 좌절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암담하고 혹독했던 그 시절을 벗어나려고 제가 간병인으로 나선 거지요. 남편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살다가 스스로를 낮추고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자기 사업을 하게 됐어요.”
그녀는 자신의 노조활동을 적극 후원하는 남편을 ‘보좌관’이라고 부른다.
역사는 움직여야 변한다
정금자 씨는 요사이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각종 노동 집회나 농성에 참여해 연대를 넓혀가고 있다. 그녀는 노동운동 판에서는 자신이 아직 ‘어린이’라고 생각한단다.
“나는 가는 곳마다 어린애처럼 행동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못 하는 이야기를 내가 할 수가 있어요.”
나이도 많고 두려운 사람도 없으니 ‘당신 운동 잘못한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주저 없이 말한단다. 그녀는 “노동운동은 언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회사보다 노동운동조직에서 견디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벌써 간파하고 있다.
올해도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주체역량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대정부 투쟁에서는 공공의료 차원에서 건강보험급여로 간병인의 월급을 최저임금 기준에 맞춰 지급할 것과 특수고용에서 ‘특수’ 자 빼고, 노동3권 보장하고 똑같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려고 합니다. 청소를 하든, 간병을 하든, 대학교수를 하든, 모든 사람이 자기 능력에 맞게 마음놓고 일 할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올해도 공공의료 확대와 비정규직·특수고용직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의 장에서 그녀를 쉽게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가만히 있어서는 역사가 변화되지 않거든요.”
* 간병인 투쟁가 (‘님과 함께’ 개사곡)
짓밟힌 자존심을 찾고 싶어 찾고 싶어
아줌마의 부대들은 이 나라의 기둥일세
나가자 함성소리 깃발 들고 피켓 들고
두산그룹 막내아들(당시 병원장)
똥고집 좀 그만 부려
간병인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쟁 쟁취 오뉴월 서릿발을 왜 몰랐냐
어서 빨리 해결하고 우리 소원 들어주소
우리 모두 다같이 손잡고 웃어보세

보험설계사, 방송작가, 학습지 교사, 레미콘 기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대리운전기사, 간병인 등이 그들이다. 정규직, 비정규직에 이어 제3의 고용형태로 부상한 특수고용직으로 생계를 연명하는 이가 100만 명을 육박한다고 한다. 기억을 되살려보자.
2005년, 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집단시위 등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요구했다. 레미콘 기사들의 시위를 지원하던 한국노총 간부는 현장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들의 절절한 외침과 희생으로 특수고용직 문제는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정부에서 특수고용직 관련 입법안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 2월 제정된 제1회 김진균상 운동 부문은 특수고용직에 해당하는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조 위원장 정금자 씨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단지 일터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고, 싸우다 보니 앞장서게 되었고, 앞장서다 보니 끝장을 봐야겠다고 작정하고 몸을 던져 싸웠을 뿐”이라고 회상하며 “차별 없는 평등 세상”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유쾌한’ 투쟁

“유료 소개소는 사적 영리를 추구하면서 회비를 걷거나 물건을 강매하는 중간착취가 엄존하는 일종의 기업이죠. 간병인들은 늘 심리적으로 압박 당하고 ‘간병’ 의식도 희미해져 환자에게도 안 좋은 환경이 되는 거죠. ”
정 씨는 민주노총 등을 찾아다니며 노동조합 설립의 가능성을 타진했고 2001년 비밀리에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10명으로 출발한 노조는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간병인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80명의 조합원을 자랑했었지요.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병원 측의 압력으로 8명만 남게 됐어요.”
2003년 무료소개소는 갑작스레 문을 닫고 간병인들에게는 이를 알리는 한 장의 통지서가 날아온다. 이 때부터 보건의료노조 산하 서울대병원노조의 지원을 받으며 간병인노조의 투쟁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100명 가량의 간병인이 참여했으나, 유료 소개소가 들어오면서 병원 측의 적극적인 회유로 대부분 떨어져 나갔어요. 남은 10여 명은 굴하지 않고 병원 로비와 원장실 등에서 투쟁을 계속했는데,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 병원 밖으로 밀려나게 됐어요.” 이들 투쟁단이 국가인권위원회로 옮겨가 농성하면서 비로소 이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2004년 유료소개소의 자격 문제가 불거지자, 무료소개소의 도입을 요구하며 서울지방노동청을 점거했다.
“좋은 소식만 있는 게 아니고 피가 마르는 싸움이었거든요. 다른 데서는 몇 시간 지나면 다 쫓겨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3일을 버텼지요. 그만큼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찰들이 매일 와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8층에서 줄줄이 뛰어 내릴 테니까 알아서 해’라고 강경하게 나가니 꼼짝 못하는 거죠.
유서를 품고 투쟁하던 동료가 경찰이 들어오면 옷을 벗자고 하더라구요. 모두 밤새 웃고 떠들며 연습했어요. 노동청장 일 못하라고 일부러 책상 치고 억지로 웃고 떠들었어요. 그러다가 경찰이 쳐들어왔어요. 그이가 1등으로 옷을 벗고 우리도 벗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다 끌려나갔지요. 아, 유치장 가서도 조용했나요? 웃고 떠들고 그랬죠.”
농성은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몸이 붓기도 하고, 입이 돌아가기도 하고, 후유증으로 신부전증을 앓은 이도 많았다.
“힘들었지만 우린 뭉쳐서 잘했어요. 선하고 의로운 마음이 발동한 거 같아요.”
농성투쟁단이 8개월 만인 2004년 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병원노조의 도움이 컸다. 협상력이 없는 간병인 노조를 대신해 병원과 적극적으로 교섭해주었다. 지금 서울대 병원에는 유료소개소, YWCA, 약손엄마회 등을 통해 250여 명의 간병인이 조달된다.
약손엄마회 가운을 입은 80여 명이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무료소개소 소속이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8개월 간의 투쟁을 성공적으로 마친 덕분에 간병인에 대한 사회인식도 적잖이 바뀌었다.
24시간 노동에 5만 원, 최저임금도 멀다

일정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 간병인은 꼭 필요한 직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는 살인적인 노동으로 몸이 망가지는” 간병인에게 돌아가는 대가는 하루 24시간 노동에 5만원이 고작이다.
환자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금액이지만, 1일 8시간 노동으로 환산하면 1만 6,600원으로 최저임금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간병인들은 남편이 죽거나 일자리가 없어 생계를 위해 뛰어든 여성이 대부분인데, 매일 24시간, 매주 6일을 근무하고 한 달에 120만 원 정도 받아 가족을 부양하는 현실입니다.”
사실 간병은 원칙적으로 간호사의 몫일 수 있다. 그러나 병원이 수익을 위해 최소한의 간호 역량을 유지하면서, 환자들에게 간병인을 권장하는 풍토가 정착된 지 오래다. 마땅히 공공의료 영역에 포함되어야 할 간병을 개인적 선택에 내맡기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간병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 사회,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라

전두환 정권 시절, 부부는 축산업에 뛰어들었다가 파산하고 빈털터리가 된다. 그녀의 남편은 다시 국회의원 보좌관이 되어 상경했으나 실직과 좌절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암담하고 혹독했던 그 시절을 벗어나려고 제가 간병인으로 나선 거지요. 남편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살다가 스스로를 낮추고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자기 사업을 하게 됐어요.”
그녀는 자신의 노조활동을 적극 후원하는 남편을 ‘보좌관’이라고 부른다.
역사는 움직여야 변한다
정금자 씨는 요사이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각종 노동 집회나 농성에 참여해 연대를 넓혀가고 있다. 그녀는 노동운동 판에서는 자신이 아직 ‘어린이’라고 생각한단다.
“나는 가는 곳마다 어린애처럼 행동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못 하는 이야기를 내가 할 수가 있어요.”

올해도 그녀에게는 할 일이 많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주체역량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대정부 투쟁에서는 공공의료 차원에서 건강보험급여로 간병인의 월급을 최저임금 기준에 맞춰 지급할 것과 특수고용에서 ‘특수’ 자 빼고, 노동3권 보장하고 똑같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려고 합니다. 청소를 하든, 간병을 하든, 대학교수를 하든, 모든 사람이 자기 능력에 맞게 마음놓고 일 할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올해도 공공의료 확대와 비정규직·특수고용직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의 장에서 그녀를 쉽게 만날 수 있을 듯하다.
“가만히 있어서는 역사가 변화되지 않거든요.”
* 간병인 투쟁가 (‘님과 함께’ 개사곡)
짓밟힌 자존심을 찾고 싶어 찾고 싶어
아줌마의 부대들은 이 나라의 기둥일세
나가자 함성소리 깃발 들고 피켓 들고
두산그룹 막내아들(당시 병원장)
똥고집 좀 그만 부려
간병인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투쟁 쟁취 오뉴월 서릿발을 왜 몰랐냐
어서 빨리 해결하고 우리 소원 들어주소
우리 모두 다같이 손잡고 웃어보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