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대 신임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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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대 참여연대 신임대표를 위해 처음 준비한 질문은 이러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게 된 계기, 참여연대의 구체적인 사회양극화 관련 정책, 현 정권의 사회복지 정책에 대한 평가, 신임대표로서 회원들에게 한 말씀…. 그런데, 미리 질문 사항을 전하자 임 대표는 손사래를 치며 어려운 질문에는 대답 안 하겠단다. 듣고 보니, 틀에 박힌 안이한 질문들이라 잠시 머쓱해졌다. 작심하고 즉흥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학생운동, 수배

1960년대 말에 대학에 들어간 임 대표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는 경제개발과 성장주의를 찬미하는 ‘보통사람’의 길을 가지 않았다. 일찍부터 개발과 성장의 그늘 극복에 눈길을 돌린 그는 서울대 사회사업학과(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임 대표에게는 신입생 시절 특별한 기억이 있다. 정신지체 고아들을 보호하던 국립각심학원(현 국립재활원)을 방문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단다.

신체도 정신도 자유롭지 못한 그들과 함께 미래를 꾸려갈 자신이 없어져 동기생들과 술을 마시며 전공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한없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고 그들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좌절하는 장면,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에 눈을 떴지만 “아직 의식수준은 낮았던” 당시 엘리트 대학생의 일면이다.

임 대표가 입학한 그 해, 대학가에선 삼선개헌 반대투쟁이 한창이었다. 그도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2학년 때 학생운동그룹이 학생회를 장악하게 되는데, 그 때 임 대표는 총무를 맡게 된다. 그러나, 개강하자마자 전국을 떠도는 수배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그 해에 잡혀 군대에 끌려간 그에게 다시 큰 시련이 닥쳐온다.

1974년에 터진 민청학련 사건이다. 임 대표는 군복무 중이었는데, 그의 동기인 이철과 선배인 유인태가 수배되면서 형사들이 집을 들락거렸다. 그는 보안대 감찰대상인 자신이 이 사건에 엮여 군법재판에 회부될 것을 걱정해야 했다.

임 대표는 민청학련과 무관했을까? 이철과 유인태, 두 사람은 면회까지 오면서 조직원(?) 관리를 했고, 사건이 터진 그 해 봄 임 대표가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 유인태로부터 모임 참석을 권유받고 약속장소에 나갔으나 만나지 못해 화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홍글씨를 달고 학문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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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하고 요행히 제적을 면한 채 대학을 졸업한 임 대표는 요주의 인물로 취업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시절 원로교수의 배려로 조교생활을 했으나, 그의 이력서에는 조교 경력이 없다. 총장이 발령장을 내주지 않아 다른 후배 이름으로 조교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유신 말기, 유학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신분이 보장되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들어갔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는 유네스코를 통해 외국 시찰을 가려는 그에 대해 신원보증을 거부한다. 난감한 지경에 빠진 임 대표가 여권을 손에 쥔 것은 10·26사건 때문이었다. 이후 선배의 갑작스런 추천으로 성심여대 전임강사로 잠시 있다 ‘제대로’ 공부해 보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났다.

영어 회화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시작된 유학생활은 고달팠다. 그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은 장애아를 입양하려고 경쟁하는 미국인 부모들을 현장실습에서 만난 일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이를 입양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열심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아이들한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고 싶다고 저한테 얘기하는 거예요. 이미 입양한 장애아를 휠체어에 태워 데리고 와서 장애아를 또 입양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사회사업을 전공하는 실습생이지만 세상 살아가는 기준이 다른 그들의 모습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친부모와 다름없는 수고와 애정으로 입양아들을 키우는 그들에게서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본 거죠.”

운동판으로의 귀환

임 대표는 한국에 돌아와 박사논문을 쓸 결심을 하고 89년 귀국했다. 한신대에 교편을 잡은 그를 기다린 건 교수운동단체인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이었다.

90년부터 민교협의 대외협력위원, 사무처장, 경기인천지회장으로 활동한 그는 민족민주운동과의 연대활동을 위해 전국을 돌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민교협 교수들과 함께 전교조 내 대학위원회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실천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십분 발휘했던 당시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제일 든든한 자산이었다고 말한다.

“그 때만 하더라도 같이 일하는 민교협 분들에 대한 신뢰가 있었지, 국내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없었어요.”

이렇게 “길바닥”에서 4년을 보낸 임 대표는 보직을 맡으며 잠시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미완의 학위논문을 매듭지으려던 그에게 지도교수와 그의 비서의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는 비보가 전해졌다. 박사학위가 “공중분해”된 것이다.

“하지만 (학위도 마치지 않고)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해 후회는 조금도 안 했어요. 나로서는 한국사회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했으니까요.”

대단한 사람도 아니니 학교생활을 충실히 하자는 생각에 운동권 은퇴를 결심한 그를 다시 끌어낸 것은 경기복지시민연대였다. 전공분야에 걸맞는 실천이라고 생각한 그는 경기복지시민연대의 공동대표직을 수락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발돋움

2000년, 임 대표는 “후배의 권유로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된 줄 모르고 왔다가” 갑자기 위원장이 되었다. 사회복지위원장으로서 그의 고민은 감시활동을 주로 하는 참여연대의 다른 기구들과 달리 사회복지위원회는 사회복지 정책의 입안과 제도 개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꿈꾸는 복지국가는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와 그에 따른 사회적 합의 및 연대의 결과이고, 복지 프로그램과 서비스는 이에 대응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니, 국가의 복지 정책과 제도화에 대한 개입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이 “참여연대가 갖고 있는 원칙이나 조직의 운동방식과 잘못하면 어긋날 가능성이 있음”을 그는 우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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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 사람의 시민운동가로서, “대안을 제시하고 정책을 개발해서 운동화하고 이어 제도화시키는 원론적인 시민운동 방식조차 제도적 민주화의 진척과 함께 점차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개인 혹은 조직이 시민운동가나 시민운동단체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자각하면서 활동하기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도 한 달 간의 숙고 끝에 대표직을 수락한 그는 참여연대가 복지 전문가인 그를 선택한 것은 “복지 분야에서의 비전 제시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그는 지금도 대표란 자리가 낯설고 두렵다. 사회복지위원회에 들락거릴 때는 같이 웃고 떠들던 간사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 그것이 우선 낯설다. 이젠 다른 자리엘 가도 사람들이 그를 참여연대 대표로 ‘의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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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참여연대의 향배가 한국사회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면 그 막중한 책임감에 두렵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자신을 대표로서 “준비 안 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임 대표는 부탁한다.

회원과, 간사, 임원 모두가 참여연대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적극 동참해 줄 것을. 앞으로 간사들을 만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찾아보겠다는 50대 후반의 최연소 공동대표를 만나 ‘오빠의 탄생’을 떠올려보았다.

참여연대 식구들을 다독이며 그간 ‘오빠’의 지위를 누렸던 몇은 긴장해야 할 듯하다.

“…지난 십여 년에 걸쳐 회원들의 기대와 뜻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참여연대의 성과를 생각해 볼 때, 저는 우리 참여연대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상과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의 조언은, ‘격과 그릇’이라는 잣대를 놓고서 다른 분들과 비교하지 말고, 참여연대가 ‘할 일’을 먼저 생각하라는 주문뿐이었습니다. 참여연대가 창립 13년을 지나고 있는 만큼, 조직내부에서 공동대표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내부 역량이 축적되었다는 측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정인 「참여사회」 편집위원,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2006/04/01 00:00 2006/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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