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규명, 살아남은 자의 몫
2006/2006년 05월 :
2006/05/01 00:00
통한의 그날, 1975년 4월 9일은 국제법학자협회가 정한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인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은 사형선고가 확정된 지 하루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재완 선생의 시신에서 나온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날의 강대국 수뇌들이 저희끼리 제멋대로 삼팔선을 긋지만 않았어도 우리국토 우리겨레는 오늘의 불행을 겪지 않았다. 지금쯤 오붓한 살림의 자족을 누린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분단과 전쟁과 독재의 시대를 분노하며 통일을 염원했던 한 혁신계 인사의 죽음이었다. 그는 “하느님은 절대 당신과 나 사이를 갈라놓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절규하던 아내와 3남 2녀를 남기고 떠났다. 가족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상처를 서로 보듬으며 살았고, 부인 이영교 씨(71)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국가폭력에 의한 ‘학살’이라 믿으며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잔인한 세월의 시작
75년 4월 8일, 그날 법정에는 피고인도, 변호사도 없었다. 대법관들만이 배석하여 사형확정을 언도한 뒤 10분 만에 퇴장했다. “그 자리에서 펄펄 뛰고 울고불고 난리인 우리를 장정들이 차에 실어가 내려준 곳이 서대문 경찰서였어요.” 바로 변호사를 만났고 명동성당에 집결해 날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 면회가 가능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갔지만, 가족들은 다시는 남편의, 아버지의,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재완 선생의 시신은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는 당국에 의해 화장된 뒤, 한줌의 재가 되어 가족들에게 건네졌다. 그 끔찍한 시간을 혼절을 거듭하며 견뎌 낸 그녀는 불귀의 객이 된 남편을 대구 부근에 묻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큰아들은 장례식 날짜를 묻는 형사에게 “아버지의 혐의가 풀릴 때까지 장례를 지낼 수 없다”고 했단다.
“하늘이 꺼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마음을 말로 다 어떻게 해. 내가 끓여준 미음이라도 먹고 가지 하는 마음도 잠깐, 자식들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 하는 것도 잠깐의 마음이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 왜 내가 이렇게 슬픔을 겪어야 하나 생각하니 또 눈물나고…….” 현실은 그저 막막했지만 그녀는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자식들 때문에. 그들의 고통 또한 자신의 그것만큼 처절했기에. 큰아들은 1년 새 세 번이나 전학을 가야 했다. 인혁당 관련 기사나 아버지 사진이 실려 친구들이 놀려대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러 치료비도 많이 물어줘야 했다. “몸으로 저항하고 마음으로 저항하다 보니까…….” 아들은 괴로울 때면 아버지 산소에 가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어머니는 강하다
이영교 씨는 홀로 남겨진 세월을 참으로 용기 있게 살아냈다. 친정과 시댁이 모두 유복해서 고생 없이 생활해왔던 그녀였지만 곤경이 닥치니까 어떤 일도 하겠더란다. 값나가는 세간을 팔아 마련한 밑천으로 깨소금 장사도 하고 전기밥솥이나 보온병 같은 가전제품을 팔러 다녔다. 옷 고르는 안목이 뛰어났던 그녀는 옷가지를 떼어다 팔기도 했고, 맵시에 실용성까지 갖춘 바지를 고안해서 팔기도 했다. 시댁에서 보내준 물건도 팔고, 손님들이 들고 온 선물은 먹거리 등으로 바꿨다. 그런 일들에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아 울면서도 그녀는 독하게 마음 다져먹고 살았다. “집에 들어갈 때 먹을 것을 사가 버릇하면 애들이 그걸 기대하는 습관이 생길까봐 한번도 안 샀어요.” 일가친척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아이들을 키웠던 그녀는 막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막내는 슬픈 경험을 많이 한 애예요.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날 수 있지만 동네 아이들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올가미를 씌워 끌고 다닌 끔찍한 일을 당한 아이예요.” 놀아주는 친구가 없어 만화나 소설책을 보며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낸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은 잘 자라준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잘 키운 엄마의 긍지로도 극복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와의 백년연분
그녀의 집 거실에는 하재완 선생의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백범 김 구 선생을 가장 존경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남자, 하재완 선생은 4·19 당시 집에 있던 돈을 들고 서울로 가 부상자들에게 나눠주고 온 뒤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에는 양조장 주인이었지만 술을 못했던 그가 술을 마시며 덩실덩실 춤을 췄단다.
“좋다고 ‘고향의 봄’을 부르고 녹음도 했어요. 그런 걸 보면 남편은 통일을 지향했던 사람인 건 맞아요.”
그는 또한 강직한 사람이었다. 곧 감옥에서 나올 줄 알았던 그는 “정치적인 문제니까 절대로 남의 말 듣지 말고 돈 쓰지 말라”고 당부했단다. 그녀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법정에서도 당당했던 남편의 목소리다. “상당히 아팠을 텐데 용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족들한테 보이려는 자신감인지 꼭 나 들으라고 그랬던 거 같아요.” 당시 하재완 선생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폐농양증과 탈장으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그가 유신독재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중앙정보부의 과잉 충성의 희생양이라고 항거할 때, 그녀는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녀는 경북 달성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이봉로 선생은 3·1운동 당시 유림계가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했던 ‘파리장서’를 가지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남편은 그런 장인을 존경했다. 하재완 선생은 감옥에서 “우리 장인도 이 옷(수의)을 입고 돌아가셨는데, 나도 이 옷을 입고 죽게 생겼다”고 했단다. 그녀는 “삼엄한 법정에서 하얀 이를 보이며 의연히 웃던” 남편의 모습을 아이들한테 꼭 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녀는 수줍게 덧붙인다. “아직도 인터뷰 한다고 하면 그 양반을 생각해야 하고, 글을 써야 할 때도 생각해야 하고.이리 가도, 저리 가도, 돌아누워도 따라오는 남편과 나를 가리켜 누군가 백년연분이라고 하더군요.”
가닥 잡혀가는 30년 진실게임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작된 사건이라 발표했고, 2005년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가 다시 한번 이를 확인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지금 재심이 진행되고 있고 검찰은 전면 재조사를 천명했다. 진상 규명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녀의 감회는 새롭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데 하는 독한 심정으로 변호사에게 길을 찾아야 한다고 얼마나 달려들었는지……. 그랬더니 용하게 길이 열렸잖아요. 나마저 없으면 재판이 안 되고 인혁당의 진실을 못 밝히게 될 줄 알고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당연히 눈물을 머금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으니 언젠가는 빛이 보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죠.” 지나온 가시밭길을 돌이켜보면 재심 결정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법도 하건만 뜻밖에도 “재심은 법의 정의가 바로 서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차분한 반응이다. “이젠 민주화도 반은 됐고 통일도 반은 되어가니까 그 양반들 생각이 나는 거야.”하고 한마디 덧붙였을 따름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을 다하다
이제 막 시작된 재심을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의 명예가 회복되고, 남은 가족에게 배상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금전적 ‘사과’가 이루어진다 해도 가족들의 “생각만 해도 가슴에 피가 맺히는 세월”까지 보상받을 수 있을까. 30여 년에 걸친 지난한 진실게임의 진정한 승자인 이영교 씨는 “늦게나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억울한 죽음과 고통스런 세월에 제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들었을 유족들에게 진상 규명이라는 무거운 짐까지 지운 죄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씻을 수 있을지. “이제 당신은 저희들의 당신이기보다 이 민족의 당신이 되었습니다. 여보, 믿어 주세요. 당신의 집념과 염원은 이 민족의 역사에 길이길이 화려하게 빛날 것입니다. 언제인가 그날에……. 1976년11월 당신의 아내가” 이영교 씨가 남편을 떠나보내고 쓰라린 심정으로 기록한 독백 한 구절이다. 그녀는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평범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불굴의 투지로 오해와 편견에 맞서 싸움으로써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분단과 전쟁과 독재의 시대를 분노하며 통일을 염원했던 한 혁신계 인사의 죽음이었다. 그는 “하느님은 절대 당신과 나 사이를 갈라놓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절규하던 아내와 3남 2녀를 남기고 떠났다. 가족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상처를 서로 보듬으며 살았고, 부인 이영교 씨(71)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국가폭력에 의한 ‘학살’이라 믿으며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잔인한 세월의 시작
75년 4월 8일, 그날 법정에는 피고인도, 변호사도 없었다. 대법관들만이 배석하여 사형확정을 언도한 뒤 10분 만에 퇴장했다. “그 자리에서 펄펄 뛰고 울고불고 난리인 우리를 장정들이 차에 실어가 내려준 곳이 서대문 경찰서였어요.” 바로 변호사를 만났고 명동성당에 집결해 날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 면회가 가능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갔지만, 가족들은 다시는 남편의, 아버지의,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재완 선생의 시신은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는 당국에 의해 화장된 뒤, 한줌의 재가 되어 가족들에게 건네졌다. 그 끔찍한 시간을 혼절을 거듭하며 견뎌 낸 그녀는 불귀의 객이 된 남편을 대구 부근에 묻었다. 당시 중학생이던 큰아들은 장례식 날짜를 묻는 형사에게 “아버지의 혐의가 풀릴 때까지 장례를 지낼 수 없다”고 했단다.
“하늘이 꺼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마음을 말로 다 어떻게 해. 내가 끓여준 미음이라도 먹고 가지 하는 마음도 잠깐, 자식들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 하는 것도 잠깐의 마음이고. 많은 사람들 중 하필 왜 내가 이렇게 슬픔을 겪어야 하나 생각하니 또 눈물나고…….” 현실은 그저 막막했지만 그녀는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자식들 때문에. 그들의 고통 또한 자신의 그것만큼 처절했기에. 큰아들은 1년 새 세 번이나 전학을 가야 했다. 인혁당 관련 기사나 아버지 사진이 실려 친구들이 놀려대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러 치료비도 많이 물어줘야 했다. “몸으로 저항하고 마음으로 저항하다 보니까…….” 아들은 괴로울 때면 아버지 산소에 가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어머니는 강하다
이영교 씨는 홀로 남겨진 세월을 참으로 용기 있게 살아냈다. 친정과 시댁이 모두 유복해서 고생 없이 생활해왔던 그녀였지만 곤경이 닥치니까 어떤 일도 하겠더란다. 값나가는 세간을 팔아 마련한 밑천으로 깨소금 장사도 하고 전기밥솥이나 보온병 같은 가전제품을 팔러 다녔다. 옷 고르는 안목이 뛰어났던 그녀는 옷가지를 떼어다 팔기도 했고, 맵시에 실용성까지 갖춘 바지를 고안해서 팔기도 했다. 시댁에서 보내준 물건도 팔고, 손님들이 들고 온 선물은 먹거리 등으로 바꿨다. 그런 일들에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아 울면서도 그녀는 독하게 마음 다져먹고 살았다. “집에 들어갈 때 먹을 것을 사가 버릇하면 애들이 그걸 기대하는 습관이 생길까봐 한번도 안 샀어요.” 일가친척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아이들을 키웠던 그녀는 막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막내는 슬픈 경험을 많이 한 애예요.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날 수 있지만 동네 아이들이 빨갱이 자식이라고 올가미를 씌워 끌고 다닌 끔찍한 일을 당한 아이예요.” 놀아주는 친구가 없어 만화나 소설책을 보며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낸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은 잘 자라준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잘 키운 엄마의 긍지로도 극복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와의 백년연분
그녀의 집 거실에는 하재완 선생의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백범 김 구 선생을 가장 존경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남자, 하재완 선생은 4·19 당시 집에 있던 돈을 들고 서울로 가 부상자들에게 나눠주고 온 뒤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날에는 양조장 주인이었지만 술을 못했던 그가 술을 마시며 덩실덩실 춤을 췄단다.
“좋다고 ‘고향의 봄’을 부르고 녹음도 했어요. 그런 걸 보면 남편은 통일을 지향했던 사람인 건 맞아요.”
그는 또한 강직한 사람이었다. 곧 감옥에서 나올 줄 알았던 그는 “정치적인 문제니까 절대로 남의 말 듣지 말고 돈 쓰지 말라”고 당부했단다. 그녀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법정에서도 당당했던 남편의 목소리다. “상당히 아팠을 텐데 용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가족들한테 보이려는 자신감인지 꼭 나 들으라고 그랬던 거 같아요.” 당시 하재완 선생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폐농양증과 탈장으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그가 유신독재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중앙정보부의 과잉 충성의 희생양이라고 항거할 때, 그녀는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녀는 경북 달성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이봉로 선생은 3·1운동 당시 유림계가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했던 ‘파리장서’를 가지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남편은 그런 장인을 존경했다. 하재완 선생은 감옥에서 “우리 장인도 이 옷(수의)을 입고 돌아가셨는데, 나도 이 옷을 입고 죽게 생겼다”고 했단다. 그녀는 “삼엄한 법정에서 하얀 이를 보이며 의연히 웃던” 남편의 모습을 아이들한테 꼭 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녀는 수줍게 덧붙인다. “아직도 인터뷰 한다고 하면 그 양반을 생각해야 하고, 글을 써야 할 때도 생각해야 하고.이리 가도, 저리 가도, 돌아누워도 따라오는 남편과 나를 가리켜 누군가 백년연분이라고 하더군요.”
가닥 잡혀가는 30년 진실게임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작된 사건이라 발표했고, 2005년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가 다시 한번 이를 확인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지금 재심이 진행되고 있고 검찰은 전면 재조사를 천명했다. 진상 규명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그녀의 감회는 새롭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데 하는 독한 심정으로 변호사에게 길을 찾아야 한다고 얼마나 달려들었는지……. 그랬더니 용하게 길이 열렸잖아요. 나마저 없으면 재판이 안 되고 인혁당의 진실을 못 밝히게 될 줄 알고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당연히 눈물을 머금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으니 언젠가는 빛이 보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죠.” 지나온 가시밭길을 돌이켜보면 재심 결정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법도 하건만 뜻밖에도 “재심은 법의 정의가 바로 서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차분한 반응이다. “이젠 민주화도 반은 됐고 통일도 반은 되어가니까 그 양반들 생각이 나는 거야.”하고 한마디 덧붙였을 따름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을 다하다
이제 막 시작된 재심을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의 명예가 회복되고, 남은 가족에게 배상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금전적 ‘사과’가 이루어진다 해도 가족들의 “생각만 해도 가슴에 피가 맺히는 세월”까지 보상받을 수 있을까. 30여 년에 걸친 지난한 진실게임의 진정한 승자인 이영교 씨는 “늦게나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억울한 죽음과 고통스런 세월에 제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들었을 유족들에게 진상 규명이라는 무거운 짐까지 지운 죄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씻을 수 있을지. “이제 당신은 저희들의 당신이기보다 이 민족의 당신이 되었습니다. 여보, 믿어 주세요. 당신의 집념과 염원은 이 민족의 역사에 길이길이 화려하게 빛날 것입니다. 언제인가 그날에……. 1976년11월 당신의 아내가” 이영교 씨가 남편을 떠나보내고 쓰라린 심정으로 기록한 독백 한 구절이다. 그녀는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평범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불굴의 투지로 오해와 편견에 맞서 싸움으로써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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