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까지는 참 힘이 든다. 기성 사회는 어린이들을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의 경쟁 논리를 강요하다 보니 어린이들의 생활도 어른들 못지 않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들이 삼십 사십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원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인권운동가 방정환 선생의 글이다. ‘어린이는 어른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가 아닌 온전한 삶의 주체’로 존재해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

어린이는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기성사회의 주문품도 아닌데,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하도록 두지 않는 사회가 과연 어린이를 위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편집자주

아침 등교 시간에 6학년 현우가 이불 속에서 방금 빠져 나온 듯 헝클어진 머리를 푹 숙이고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기에 얼른 뒤따라가 어깨동무를 하면서 말을 걸었다.

“현우구나. 그런데 왜 아침부터 이렇게 힘없이 걸어 가냐?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이런, 밤새 컴퓨터 게임을 했나보구나. 잠을 제대로 못 잔 걸 보니.”

“아니요. 컴퓨터 게임 못하게 해요. 공부하느라 못 잤어요.”

“무슨 공부를 잠도 못 자면서 했어? 어제 학교 숙제가 많았나?”

“아니요. 우리 선생님은 숙제 잘 안 내줘요. 학원 숙제 하느라 그래요.”

오늘,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잠 잘 시간도 부족하고, 놀 시간도 없는 어린이들이 많다. 학교 수업 끝나면 쉴 틈도 없이 학원으로 가야 하고, 한 학원이 끝나면 다음 학원으로 달려가야 하고, 끝나면 또 다른 과외 수업을 받으러 가야 한다. 이렇게 눈 뜨면서 잠 잘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면 차라리 모든 과외와 학원을 없애고, 그런 사교육비를 강제로 국가에서 교육세로 징수해서 모든 아이들을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아니 그러면 기숙학교가 아니라 감옥이나 어린이 수용소로 그 이름을 바꿔야 되겠지.

사실 오늘, 우리 사회 구조는 어른들이 입맛에 따른 온갖 감옥을 만들어 그 속에 어린이들을 가두고 사육하는 동물농장이라는 비판을 피할 도리가 없다. 어른들 눈에는 어린이들이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받는데 필요한 존재, 더 많은 재화 가치를 생산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빨리 키워야 할 가축, 유전자 조작을 해서라도 다른 집보다 더 크고, 더 빠르게 키워야 할 가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또는 ‘애완용’으로 생각하고 있는 어른들도 꽤 많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어린이들을 이렇게 말도 배우기 전부터 무슨 지식이든지 쑤셔 넣으려 하고, 한창 우리말을 배워야 할 유아들의 여린 혀에 칼을 대면서라도 외국어를 가르치려 하고, 열 살 안팎의 어린이들을 학원이나 과외 공부로 잠도 제대로 못 자게 할 수 있겠는가.

미래를 위해 오늘을 빼앗긴 어린이들

우리나라 어른들이 어린이들 앞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는 꿈이란 것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실상 어린이들은 먼 훗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오늘을 살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산다. 어린이가 청년이 되면 그때는 먼 앞날을 생각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참고 살겠지. 어린이들은 먼 훗날을 위해 오늘을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가 없고, 그렇게 살아도 안 된다.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 먼 훗날 행복해 지는 것이 어린이들이다. (이오덕, 참교육으로 가는 길, 한길사, 서울, 1990, 53쪽.)

어린이들은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 그 힘으로 평생을 즐겁게 일하면서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본다. 어린이가 해야 할 일이 공부라면, 그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어야 나중에 자라서 하게 될 그 어떤 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사람이 일하는 것 못지않게 즐겁게 놀거나 쉴 수 있어야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듯이 어린이들은 공부하는 것 못지않게 동무들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편안한 시간에 즐겁게 놀 수 있어야 한다.

곰곰이 돌아보면, 어린 시절에 아무런 조건 없이 즐겁고 신나게 놀았던 경험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에 부대낄 때마다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한테 ‘고향의 봄’을 선물한 동화작가 이원수는 해방 후 새로 세워야 할 이상국가로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참여해서 건설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인 ’숲 속 나라‘를 쓰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어른은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는 어른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던 것이다. 부모건 교사건 대통령이건 어린이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지는 말아야 어른들 가치에 얽매여 어린이들을 사랑 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어린이들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은 피해갈 수 있겠다 싶다.

유년의 정원에서 쫓겨난 아이들

어른들의 이기심 때문에 즐겁게 놀면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고,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이 아니라 오직 다음 사회를 위해 둘러친 철조망 안에 유폐당한 오늘의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83년 전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조선의 어린 민중은 이민족 통치세력과 어른들한테 이중으로 억압받는 가장 불쌍한 민중이라면서 어린이 해방의 깃발을 올렸던 어린이 운동가들의 외침이 들린다. “어린이를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1923년 5월 1일 조선소년운동협회), (정인섭, 색동회 어린이 운동사, 학원사, 서울, 1975, 53쪽.)

이런 구호가 아니더라도 어린이가 고요히 공부하고 즐거이 놀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권리는 누구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아니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다. 그런데 8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는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알맞은 사회가 되었는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누가 힘쓰고 있는가, 아니, 우리 사회에 어린이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는가. 그들한테 ‘어린이’가 눈에 보이기는 하는 걸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사회에는 어린이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자신들의 거짓과 욕심 때문에 ‘피리 부는 사나이’한테 어린이들을 다 빼앗긴 어른들만 남아있는, 미래가 없는 마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주영 서울송파초등학교 교사,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사무총장
2006/05/01 00:00 2006/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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