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즐거움은 계속된다
2006/2006년 06월 :
2006/06/01 00:00
이제 곧 월드컵이다. 4년의 순환, 그러나 새로운 지형이다. 2002년의 4강 체험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욱 각별하다. 조별 리그를 통과하면 단판 승부의 토너먼트가 벌어지기 때문에 우리 대표팀으로서는 16강에서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이는 스페인이나 우크라이나와 멋진 경기를 기대해 볼 만하다. 그러나 4년의 순환을 그저 단순한 응원의 반복으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더욱이 거의 모든 기업과 미디어가 ‘애국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마당에 새로운 시선으로 월드컵을 상상하는 것은 그 뜻이 깊은 일이다.
우선 그 유명한 3S 정책부터 짚고 넘어가자. 본격적으로 월드컵 열기가 끓어오르면서 일부에서는 3S 정책의 관점에서 축구와 월드컵이 대중의 건강한 판단력을 흐리는 장해물이 될 수 있다고 염려한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지방선거, 사회 전 분야의 양극화 등 어느 때보다 뜨거운 현안을 안고 있는 지금 축구와 월드컵이 빚어내는 엄청난 열기에 자칫 이 많은 문제들이 묻혀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월드컵 열정은 문화민주주의의 에너지
그러한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축구와 월드컵에 대한 열정을 잘 다스리고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적극적인 문화 민주주의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1930년대부터 등장한 군부 세력이 아르헨티나의 20세기를 피로 얼룩지게 하였는데 특히 1976년에는 각 군 사령관으로 이뤄진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여 폭압적인 정치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1978년 월드컵이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다. 개막을 앞두고 여러 나라가 아르헨티나의 정치 상황을 우려하며 개최국 변경을 요구하기도 했고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을 비판하면서 대회 참가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정대로 대회는 개최되었으며 육군 중장 출신의 비델라 대통령은 이 대회를 통해 정치적인 선전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이는 무솔리니에 의한 1934년 월드컵 대회와 히틀러에 의한 1936년의 올림픽과 함께 스포츠 대회가 정치적인 목적에 악용당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로써 3S 정책의 효과가 검증된 셈인데 그 이후로도 세계의 많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허약한 지지 기반을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 개최로 반전하려고 하였다. 아프리카의 군사 정권 나라에서 이는 자주 반복되었고 우리의 기억으로는 1988년의 올림픽 대회에 그러한 요소가 있었으니 3S 정책의 악의적 효과는 지구 곳곳에서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3S 정책이란 실패하기 마련이다. 3S, 즉 스포츠, 섹스, 스크린(영화)을 끊임없이 제공할수록 대중의 문화적 욕망, 억압 없는 삶에 대한 꿈은 더욱 커진다고 생각한다. 3S에 의하여 대중은 권력자들의 의도대로 바보가 되는 듯이 보이지만 바로 그 속에서 자유와 쾌락의 욕망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저렇게 자유롭게 살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결국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 때문에 결국 권력자들은 3S 정책을 포기하게 되며 심지어 자신의 통제선 바깥으로 끓어 넘치는 대중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차단하기 위해 문화적 탄압과 검열을 휘두르는 것이 그 다음 순서였다.
이렇게 3S 정책 이야기를 풀어 본 것은 지난 2002년 월드컵 광장에서 시작하여 요즘까지 이어지는 월드컵 열기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도모해 보기 위해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2002년 월드컵은 자유와 민주에 대한 열망, 그리고 삶의 질을 고양시키기 위한 공동체의 아름다운 합창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대다수 미디어가 사용한 단어는 ‘애국’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보건대 2002년의 ‘애국’은 맹목의 충성이 강요되는 애국, 저돌적 근대화의 집단주의적 애국, 동원된 군중이 부르는 애국과는 달랐다. 2002년 월드컵 광장의 합창은 해방 직후 김수영 김경린 박인환 등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시화집으로 열렬히 부르고자 했던 노래, 그러나 좌우 대립과 남북 분단으로 더 이상 부르지 못했던 노래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4·19 직후 그야말로 ‘감수성의 혁명’으로 불리며 등장한 김승옥의 소설이 보여준 창의와 상상의 세계, 그러나 오랜 군사독재로 좌절된 꿈의 세계가 이제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87년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 그리고 90년대 문화 대중화에 의하여 새롭게 형성된 지평 위의 노래였으며 월드컵이라는 계기에 의하여 열렬히 외칠 수 있었던 시민 합창이었다. 20세기 한국 소설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최인훈의 장편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꿈꿨던 개인의 밀실과 공동체의 광장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의 가능성을 2002년 월드컵에서 열렬히 실천했던 것이다.
집단주의적 구호에서 벗어나야
이제 곧 월드컵이다. 우리가 16강 진출에 대하여 사회적 열망까지 투영하고 있듯이 32개 출전국 역시 월드컵을 계기로 저마다의 역사적 상흔과 사회적 고통을 치유하는 제의로 삼을 것이다. 자유와 민주는 세계인 누구나 꿈꾸는 가치이며 그 가치를 위해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는 대립과 차별을 뛰어 넘어 진정한 화해와 발전으로 전진하려는 드라마가 매일 펼쳐지고 있다. 2002년을 체험한 우리는 세계인과 더불어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꿈’을 함께 꿔야 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계화가 아닌, ‘월드’컵에서 느낄 수 있는 열정과 상상의 세계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희망일 뿐이다. 각종 기업과 방송은 연일 ‘하나 되는 한국인’에 철지난 ‘애국심’ 타령을 쏟아내고 있어서 흡사 시계가 거꾸로 도는 느낌마저 든다. 새로운 시대의 시민적 감수성에 어울리지 않는 집단주의적 광고와 구호 때문에 혹시 3S 정책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든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2002년 좀 더 싱싱하고 창의적인 사회를 만났으며 월드컵에서의 승리와 그 재미에 열광했다. 다만 그것이 지난 4년 동안 유보되었거나 더디게 진행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새로운 시민적 감성에 맞는 언어를 찾아내지 못하여 ‘애국’이란 단어에 사로잡혀 있지만 2006 독일 월드컵을 즐기며 이것을 계기로 더 많은 상상과 창의와 열정을 갈망하게 될 것이며 이는 결국 문화 민주주의의 확대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번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이뤄야 할 ‘16강’일는지 모른다. 2002년의 즐거움과 열광은 계속된다.
우선 그 유명한 3S 정책부터 짚고 넘어가자. 본격적으로 월드컵 열기가 끓어오르면서 일부에서는 3S 정책의 관점에서 축구와 월드컵이 대중의 건강한 판단력을 흐리는 장해물이 될 수 있다고 염려한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지방선거, 사회 전 분야의 양극화 등 어느 때보다 뜨거운 현안을 안고 있는 지금 축구와 월드컵이 빚어내는 엄청난 열기에 자칫 이 많은 문제들이 묻혀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월드컵 열정은 문화민주주의의 에너지
그러한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축구와 월드컵에 대한 열정을 잘 다스리고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적극적인 문화 민주주의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1930년대부터 등장한 군부 세력이 아르헨티나의 20세기를 피로 얼룩지게 하였는데 특히 1976년에는 각 군 사령관으로 이뤄진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여 폭압적인 정치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1978년 월드컵이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다. 개막을 앞두고 여러 나라가 아르헨티나의 정치 상황을 우려하며 개최국 변경을 요구하기도 했고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 요한 크루이프는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을 비판하면서 대회 참가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정대로 대회는 개최되었으며 육군 중장 출신의 비델라 대통령은 이 대회를 통해 정치적인 선전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이는 무솔리니에 의한 1934년 월드컵 대회와 히틀러에 의한 1936년의 올림픽과 함께 스포츠 대회가 정치적인 목적에 악용당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로써 3S 정책의 효과가 검증된 셈인데 그 이후로도 세계의 많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허약한 지지 기반을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 개최로 반전하려고 하였다. 아프리카의 군사 정권 나라에서 이는 자주 반복되었고 우리의 기억으로는 1988년의 올림픽 대회에 그러한 요소가 있었으니 3S 정책의 악의적 효과는 지구 곳곳에서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3S 정책이란 실패하기 마련이다. 3S, 즉 스포츠, 섹스, 스크린(영화)을 끊임없이 제공할수록 대중의 문화적 욕망, 억압 없는 삶에 대한 꿈은 더욱 커진다고 생각한다. 3S에 의하여 대중은 권력자들의 의도대로 바보가 되는 듯이 보이지만 바로 그 속에서 자유와 쾌락의 욕망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저렇게 자유롭게 살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결국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 때문에 결국 권력자들은 3S 정책을 포기하게 되며 심지어 자신의 통제선 바깥으로 끓어 넘치는 대중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차단하기 위해 문화적 탄압과 검열을 휘두르는 것이 그 다음 순서였다.
이렇게 3S 정책 이야기를 풀어 본 것은 지난 2002년 월드컵 광장에서 시작하여 요즘까지 이어지는 월드컵 열기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도모해 보기 위해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2002년 월드컵은 자유와 민주에 대한 열망, 그리고 삶의 질을 고양시키기 위한 공동체의 아름다운 합창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대다수 미디어가 사용한 단어는 ‘애국’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보건대 2002년의 ‘애국’은 맹목의 충성이 강요되는 애국, 저돌적 근대화의 집단주의적 애국, 동원된 군중이 부르는 애국과는 달랐다. 2002년 월드컵 광장의 합창은 해방 직후 김수영 김경린 박인환 등이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시화집으로 열렬히 부르고자 했던 노래, 그러나 좌우 대립과 남북 분단으로 더 이상 부르지 못했던 노래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4·19 직후 그야말로 ‘감수성의 혁명’으로 불리며 등장한 김승옥의 소설이 보여준 창의와 상상의 세계, 그러나 오랜 군사독재로 좌절된 꿈의 세계가 이제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87년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 그리고 90년대 문화 대중화에 의하여 새롭게 형성된 지평 위의 노래였으며 월드컵이라는 계기에 의하여 열렬히 외칠 수 있었던 시민 합창이었다. 20세기 한국 소설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최인훈의 장편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꿈꿨던 개인의 밀실과 공동체의 광장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의 가능성을 2002년 월드컵에서 열렬히 실천했던 것이다.
집단주의적 구호에서 벗어나야
이제 곧 월드컵이다. 우리가 16강 진출에 대하여 사회적 열망까지 투영하고 있듯이 32개 출전국 역시 월드컵을 계기로 저마다의 역사적 상흔과 사회적 고통을 치유하는 제의로 삼을 것이다. 자유와 민주는 세계인 누구나 꿈꾸는 가치이며 그 가치를 위해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는 대립과 차별을 뛰어 넘어 진정한 화해와 발전으로 전진하려는 드라마가 매일 펼쳐지고 있다. 2002년을 체험한 우리는 세계인과 더불어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꿈’을 함께 꿔야 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세계화가 아닌, ‘월드’컵에서 느낄 수 있는 열정과 상상의 세계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희망일 뿐이다. 각종 기업과 방송은 연일 ‘하나 되는 한국인’에 철지난 ‘애국심’ 타령을 쏟아내고 있어서 흡사 시계가 거꾸로 도는 느낌마저 든다. 새로운 시대의 시민적 감수성에 어울리지 않는 집단주의적 광고와 구호 때문에 혹시 3S 정책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든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2002년 좀 더 싱싱하고 창의적인 사회를 만났으며 월드컵에서의 승리와 그 재미에 열광했다. 다만 그것이 지난 4년 동안 유보되었거나 더디게 진행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새로운 시민적 감성에 맞는 언어를 찾아내지 못하여 ‘애국’이란 단어에 사로잡혀 있지만 2006 독일 월드컵을 즐기며 이것을 계기로 더 많은 상상과 창의와 열정을 갈망하게 될 것이며 이는 결국 문화 민주주의의 확대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번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이뤄야 할 ‘16강’일는지 모른다. 2002년의 즐거움과 열광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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