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평화군축센터 공성경 간사
2006/2006년 06월 :
2006/06/01 00:00
덤으로 주어진 삶이라면, 비록 고난이 따르더라도 좀더 의미있게
“참여연대에 온 걸 엄청 후회하고 있습니다. 좋은 직장을 버리고 온 대가로 궁색한 현실때문에 아기를 낳는 것도 미루고 있는 판에, 매일 야근으로 혹사당하는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평화적인 시위 도중에 부상까지 입어 심신이 지쳐 있습니다.”
평택에서의 연좌농성 도중 옆사람이 연행되는 것을 막느라 밀고 당기다가 허리를 삐끗하여 다리를 질질 끌며다니는 공성경 간사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그가 이렇게 대답을 하면 어쩌나 싶었다. 첫마디에 참여연대에 온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곳이 저를 필요로 하고 제가 할 일이 많아서 참 좋습니다. 제 ID가 tongil35(통일사모)일 정도로 통일과 평화에 관심이 많아 제가 평화군축팀에 지원을 했지요. 마침 경쟁자가 없어 쉽게 갔는데 알고 보니 밤낮없이 일하는 야간부서 더라구요. 오늘 아침에도 아내가 언제 오냐고 물어서 이제 그런 말 안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멋쩍게 대답했답니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운동으로 때론 주말도 반납하고 있어요. 그런 열심 덕분이었는지 몰라도 참여연대가 평택문제에 시민사회의 중지를 모아내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보람을 느꼈습니다. 일종의 마중물 역할이었다고나 할까요!”
그가 단지 평택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평택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령의 어르신들이 정부로부터 국민대접도 제대로 못 받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삶터에서 쫓겨나가야 하는 사회적 현실에 가슴 아파서 연대의 필요성을 느꼈고, 평택의 금싸라기 논이 더 이상(전체 수용예정 285만평 중 210만여 평은 이미 협의매수 완료) 미군기지로 확장되는 것도 차마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한 미군의 전체 병력 규모가 감축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할 때 평택미군기지에 그렇게 많은 부지가 필요할까. 공간사는 특유의 차분하고 진중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간다.
“실제로 평택으로 전환 배치될 최대 5천명 수준의 미군 병력의 규모로 볼 때 150만여 평의 기존 평택기지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이미 협의 매수한 210만평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남은 70만여 평만이라도 평생 땅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에게 남겨주어 그들이 평화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온화한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낮아도 그에 담긴 진심의 힘은 강하다. “이 사태에는 전략적 유연성(주한미군을 차출하여 한국 외로 편입이나 투입이 가능하다)으로 한미동맹 재편이 가져오는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안보위협의 문제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추리만이 아닌 우리 국민 아니 아시아인의 문제일지 모릅니다.”
병원에서는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던데, ‘야간부서 평화군축팀’에서 그가 해야할 일들은 목록은 ‘제목’만 나열해도 이정도. 만 3년째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에 휘말려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의 완전철수를 올해 내로 관철시키기 위한 운동, 한국형 헬기사업을 비롯하여 방위사업청의 조기경보통제기 도입 사업 등과 관련된 무기체계 모니터링을 통하여 불요불급한 국방예산에 대해 감시하는 등 국방개혁 활동… ‘절대안정’은 커녕 ‘절대과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시위현장으로 향한다고 했다.
그가 처음부터 평화군축팀에 있었던 건 아니다. 첫 일년은 시민참여팀에서 일했는데 그때 각종 회원행사의 진행을 도맡았고, 그가 진행했던 회원인터뷰에서는 필자를 가장 화사한 5월의 회원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년 후, 역할을 바꾸어 필자가 이달의 상근자로 그를 인터뷰 하게 되었다.
“첫사랑과 결혼하신거네요?”
본인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지만, 그는 참여연대의 얼짱이며 몸짱이다. 그의 연애담과 결혼까지의 과정이 더욱 궁금하다. 대학 2학년 때 교회에서 처음 만난 아가씨와 10년간이나 연애를 하고 결혼하였는데, 예쁘고 이해심이 많으며 자기주관도 뚜렷한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참여연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뒷심도 그의 아내가 보여준 이해심이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참여연대라는 일터에 그는 얼마나 만족할까. 선한 표정으로 흠을 들춰보라는 나의 채근에, 그는 ‘눈앞의 모니터에 갖혀 있는 간사들의 현실’을 꼽는다. 자기 부서 일에만 매몰되어, 그에만 열중하다 보니 참여연대의 기본 기조인 참여와 연대에 소홀한 면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일수록 냉철한 이성만큼 따뜻한 가슴과 끈끈한 인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참여연대에 들어오게 된 계기에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the Christ)'도 있다. 그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예수의 생으로 치자면 이제 덤으로 주어진 삶은 비록 고난이 따를지라도 좀 더 의미있게 살고 싶었다. 그가 33살이던 해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터졌고, 업무상 자주 마주치던 미군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분노에 대하여 미안해하기는커녕 왜들 저러나 하는 식으로 태연하고 오히려 뜨악하게 생각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싶어 잘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이미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던 참여연대의 상근자 모집에 응했다. 그렇게 그는 ‘참여연대 상근활동가’이자 ‘평화 마중물’인 공성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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