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시설에서 살고 싶은가?
2006/2006년 07월 :
2006/07/01 00:00
여기서 시설이라 함은, 사회복지시설 중 생활시설에 한정해서 이야기한다. 편집자주
지난 겨울, 경남의 한 농촌에서 근육장애를 가지고 있던 조 모씨 집의 보일러가 터져 방안과 이불이 물에 젖었지만, 조 씨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동사했다. 중증장애인으로서 이동권과 교육권, 자립생활을 위해 열심히 싸워온 박기연 씨가 6월 2일 인천 간석역에서 철로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용변, 식사 등 일상생활에도 도움이 필요했던 박씨는 활동보조인이 없이 꽤 오랫동안 혼자 생활을 해야 했다. 중증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을 쓰는 것은 ‘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주변의 ‘도움’이 없을 때는 모든 일상생활을 참아야 했다.
두 사람을 놓고 웬만한 사회복지 한다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은 혀를 찬다. “어휴, 안타까워라.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면 시설에나 들어가지…….”
중증장애인은 우리와 함께 살 수 없나?
우리는 쉽게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복지시설로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중증장애인들은 서울시청 앞을 점거하고, 삭발을 하고, 노숙을 하고, 휠체어에서 내려 한강 다리를 기어가면서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와 ‘자립생활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시설에 보내느니 차라리 죽여라’며 ‘사육’당하기 싫다고 절규한다.
중증장애인이라 하더라도, 빈곤하다 하더라도 주거와 소득,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활동보조를 이용할 권리)를 보장한다면 이들은 굳이 시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이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며, 이를 보장받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그러나 정부는 빈곤한 중증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를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저비용의 복지시설에 이들을 대거 수용해 버림으로써, 이들의 권리를 외면하고 있다. 노골적인 감금과 폭행, 성폭행이 자행됐던 시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러한 노골적인 문제가 없는 시설이라 하더라도, 집단생활에서 오는 규율과 통제, 사회적 배제, 자기결정권의 박탈, 존중감의 박탈은 당사자에게 ‘시설병 증후군 1)’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시설이 인권침해의 온상이었음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시설운영자, 장애인의 가족, 국민 등 4자간의 ‘침묵의 카르텔’ 때문이었다. 정부는 거액의 예산을 들이거나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지 않고서도 장애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시설의 인권침해를 외면했다. 국민은 손쉽게 별다른 부담도 없이 장애인들을 주변으로부터 격리할 수 있기 때문에 침묵하였다. 시설운영자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관심과 지원이 없는 어려운 상태에서 그나마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동정론에 기대며, 장애인들을 영리의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장애인의 가족은 국가의 지원이나 보조가 없는 상태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장애인가족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침묵한 것이다2).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이 중증장애인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시설로 가야 한다는 명제를 만들었고, 우리는 이 불합리한 명제를 의심하지 않고 따라왔던 것이다.
미신고시설, 도대체 뭔데?
이렇게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시설’은 크게 신고시설과 미신고시설로 나뉜다. 신고시설은 또 법인신고시설과 개인운영신고시설로 나뉘는데, 앞의 것은 사회복지법인에서 비영리로 운영하는 시설을 말하고, 뒤의 것은 최근 정부의 미신고시설 종합관리대책에 의해 개인이 운영하던 미신고시설 중 복권기금을 받아 신고 전환된 시설을 말한다. 미신고시설은 신고하지 않고 시설을 운영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회복지사업법에 의하면 불법이다. 미신고시설은 2005년 1,200여 개에 달했으나 복권기금 등을 쏟아 부어 건물을 신·증축해준 결과 현재 578개가 남아있다. 이나마도 종교시설의 외피를 쓴 미신고시설은 제외한 숫자이다.
정부는 양성화정책의 결과로 미신고시설 수가 줄고 있으니 복지시설의 인권침해도 없어질 것처럼 떠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복지시설의 인권침해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양지마을, 유부도 섬 사건, 에바다, 구 소쩍새마을, 성실정양원, 은혜사랑의집, 옥천 사랑의집, 지인언어치료원, 바울선교원, 인제수양원, 성람재단, 청암재단, 김포 사랑의집 기도원 등 굳이 미신고시설을 따로 분류하지 않더라도 복지시설의 인권침해사례는 이성 가진 사람을 충격과 경악 속에 빠뜨린다.
정부의 미신고시설 양성화 정책은 본래 ‘당근과 채찍으로 미신고시설의 옥석을 가리겠다’는 취지였으나 실제 그 과정에서 옥석을 가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문제시설을 지원해서 양성화를 부추기기도 했다. 옥석을 가리는데 있어서도 ‘생활인의 인권’은 신고기준에 들어가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더 근본적으로 당사자인 장애인들은 시설이 아닌 자립생활 지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는 수용 일변도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누구를 위한 미신고시설 양성화인가, 누구를 위한 시설 정책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사회 속으로의 독립을 원한다
잊을 만 하면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복지시설의 인권침해 사건. 폭행 뿐 아니라 생활전반의 광범위한 인권유린이 가능한 ‘복지시설’ 뒤에는 항상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현재의 법과 정책대로라면 시설내 인권유린이 얼마든지 가능한 구조임을 알면서도 과거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중앙정부, 관리감독 은 소홀히 하고 시설운영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지자체는 분명 책임이 있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조 씨와 박 씨는 감금과 폭행이 없는 시설로 가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한 사람의 독립적 인격체로 존중받으며 살고 싶어 했다. 아무리 중증의 가난한 장애인이다 할지라도 그가 원한다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 그런 사회를 기대하는 것이 욕심일까?
지난 겨울, 경남의 한 농촌에서 근육장애를 가지고 있던 조 모씨 집의 보일러가 터져 방안과 이불이 물에 젖었지만, 조 씨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동사했다. 중증장애인으로서 이동권과 교육권, 자립생활을 위해 열심히 싸워온 박기연 씨가 6월 2일 인천 간석역에서 철로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용변, 식사 등 일상생활에도 도움이 필요했던 박씨는 활동보조인이 없이 꽤 오랫동안 혼자 생활을 해야 했다. 중증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을 쓰는 것은 ‘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주변의 ‘도움’이 없을 때는 모든 일상생활을 참아야 했다.
두 사람을 놓고 웬만한 사회복지 한다는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은 혀를 찬다. “어휴, 안타까워라.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면 시설에나 들어가지…….”
중증장애인은 우리와 함께 살 수 없나?
우리는 쉽게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복지시설로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중증장애인들은 서울시청 앞을 점거하고, 삭발을 하고, 노숙을 하고, 휠체어에서 내려 한강 다리를 기어가면서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와 ‘자립생활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시설에 보내느니 차라리 죽여라’며 ‘사육’당하기 싫다고 절규한다.
중증장애인이라 하더라도, 빈곤하다 하더라도 주거와 소득,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활동보조를 이용할 권리)를 보장한다면 이들은 굳이 시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이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며, 이를 보장받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다. 그러나 정부는 빈곤한 중증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를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저비용의 복지시설에 이들을 대거 수용해 버림으로써, 이들의 권리를 외면하고 있다. 노골적인 감금과 폭행, 성폭행이 자행됐던 시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러한 노골적인 문제가 없는 시설이라 하더라도, 집단생활에서 오는 규율과 통제, 사회적 배제, 자기결정권의 박탈, 존중감의 박탈은 당사자에게 ‘시설병 증후군 1)’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시설이 인권침해의 온상이었음에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시설운영자, 장애인의 가족, 국민 등 4자간의 ‘침묵의 카르텔’ 때문이었다. 정부는 거액의 예산을 들이거나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지 않고서도 장애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시설의 인권침해를 외면했다. 국민은 손쉽게 별다른 부담도 없이 장애인들을 주변으로부터 격리할 수 있기 때문에 침묵하였다. 시설운영자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관심과 지원이 없는 어려운 상태에서 그나마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동정론에 기대며, 장애인들을 영리의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장애인의 가족은 국가의 지원이나 보조가 없는 상태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장애인가족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침묵한 것이다2).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이 중증장애인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시설로 가야 한다는 명제를 만들었고, 우리는 이 불합리한 명제를 의심하지 않고 따라왔던 것이다.
미신고시설, 도대체 뭔데?
이렇게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시설’은 크게 신고시설과 미신고시설로 나뉜다. 신고시설은 또 법인신고시설과 개인운영신고시설로 나뉘는데, 앞의 것은 사회복지법인에서 비영리로 운영하는 시설을 말하고, 뒤의 것은 최근 정부의 미신고시설 종합관리대책에 의해 개인이 운영하던 미신고시설 중 복권기금을 받아 신고 전환된 시설을 말한다. 미신고시설은 신고하지 않고 시설을 운영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회복지사업법에 의하면 불법이다. 미신고시설은 2005년 1,200여 개에 달했으나 복권기금 등을 쏟아 부어 건물을 신·증축해준 결과 현재 578개가 남아있다. 이나마도 종교시설의 외피를 쓴 미신고시설은 제외한 숫자이다.
정부는 양성화정책의 결과로 미신고시설 수가 줄고 있으니 복지시설의 인권침해도 없어질 것처럼 떠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복지시설의 인권침해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양지마을, 유부도 섬 사건, 에바다, 구 소쩍새마을, 성실정양원, 은혜사랑의집, 옥천 사랑의집, 지인언어치료원, 바울선교원, 인제수양원, 성람재단, 청암재단, 김포 사랑의집 기도원 등 굳이 미신고시설을 따로 분류하지 않더라도 복지시설의 인권침해사례는 이성 가진 사람을 충격과 경악 속에 빠뜨린다.
정부의 미신고시설 양성화 정책은 본래 ‘당근과 채찍으로 미신고시설의 옥석을 가리겠다’는 취지였으나 실제 그 과정에서 옥석을 가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문제시설을 지원해서 양성화를 부추기기도 했다. 옥석을 가리는데 있어서도 ‘생활인의 인권’은 신고기준에 들어가 있지도 않은 실정이다. 더 근본적으로 당사자인 장애인들은 시설이 아닌 자립생활 지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는 수용 일변도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누구를 위한 미신고시설 양성화인가, 누구를 위한 시설 정책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사회 속으로의 독립을 원한다
잊을 만 하면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복지시설의 인권침해 사건. 폭행 뿐 아니라 생활전반의 광범위한 인권유린이 가능한 ‘복지시설’ 뒤에는 항상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현재의 법과 정책대로라면 시설내 인권유린이 얼마든지 가능한 구조임을 알면서도 과거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중앙정부, 관리감독 은 소홀히 하고 시설운영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지자체는 분명 책임이 있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조 씨와 박 씨는 감금과 폭행이 없는 시설로 가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한 사람의 독립적 인격체로 존중받으며 살고 싶어 했다. 아무리 중증의 가난한 장애인이다 할지라도 그가 원한다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 그런 사회를 기대하는 것이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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