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 평화중재자로 화려하게 복귀한 온건 이슬람국가
2006/2006년 07월 :
2006/07/01 00:00
유도요노의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몇 가지 기본통계만 보아도 엄청난 나라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세계최대의 군도국가이자 세계 4위의 인구대국으로 250개 이상의 지방어가 통용되고 1,000개가 넘는 종족 가운데 100만 명이 넘는 종족도 15개나 되는 다원적 국가이다. 인구의 88%가 무슬림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신도를 가진 국가이지만, 기독교(8.9%), 힌두교(1.8%), 불교(1% 미만)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의 신자들이 부대끼며 살고 있다. 이번에 터진 족자카르타의 머라피 화산을 포함하여 75개의 화산이 열도의 곡선을 따라 줄지어 있어서 지질학적으로 ‘불의 반지’라고도 일컬어진다.
제3세계 외교 강국 인도네시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 자본투자지, 천혜의 관광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와 지역분쟁과 각종 재난으로 고통 받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가 외교 강국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 외교원칙을 건국 시기부터 천명하고 있는 나라다. ‘독립적-적극적(Bebas-Aktif)’ 외교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미소냉전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신생독립국으로서 강대국들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감과 주체성을 갖고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각오를 담은 것이다.
이러한 외교원칙은 언술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실천되고 지금까지도 정치가들의 신념처럼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 수카르노 대통령 시대에는 반둥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정상회의를 개최하여 비동맹운동의 물꼬를 텄다. 수하르토 대통령 시대에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의 창설에 기여하고 ‘큰 형’처럼 동남아 지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왔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여의도에 대사관 부지로 할애한 넓은 대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인도네시아를 외교적으로 중시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의 아시아 경제위기에 더해 수하르토 사임으로 시작된 민주화로 32년 간 권위주의적으로 억눌렸던 문제들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인도네시아는 국내문제가 해결되기까지 국제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을 낳았다. 그런데 올해 인도네시아 외교는 비상한 행보를 보이면서 국제무대로의 화려한 복귀를 추진하고 있다.
거인의 귀환?
인도네시아 역사상 첫 번째 직선대통령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는 2004년 10월의 취임사에서 당분간 국내문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임박했던 모라토리엄(외채 지불유예) 위기나 연말에 밀어닥친 쓰나미의 막대한 피해를 감안한다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해 4월에 반둥 아시아 아프리카정상회의 5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108개 국 정부 대표단을 초청하여 인도네시아의 세계적 위상을 과시하면서 국제무대로의 복귀를 위한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그러더니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의 포문을 여는 동시에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국제적 사안에 대한 중재를 시도하고 있다.
4월에 유도요노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정부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과 유럽이 취한 재정지원 중단 조치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재정적으로 원조할 뜻을 밝혔다. 5월에는 이란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의 예방을 받고 이란의 평화적 핵사용권을 지지해주었다. 외무장관 하산 위라유다도 미국과 유럽에게 이란에 대한 제재는 성공할 수 없을 터이니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것을 주문하여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더욱 선명히 하였다. 이어 6월에는 국방장관 유워노 수다르소노가 미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에게 미국이 추진하는 테러대항방식은 세계사회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분노만 유발하므로 그런 정책을 다른 나라에 강요해서는 안 되며, 테러와의 전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해당국가에서 자율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면서 인도네시아가 독자노선을 취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아세안 회원국인 버마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유도요노 대통령이 버마를 방문하여 아웅 산 수치의 석방과 민주화 일정을 가속시킬 것을 권고한 바 있으며 외무장관은 버마에 대한 3대 투자국인 중국, 태국, 한국이 버마의 민주화도 함께 신경 써 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유도요노 대통령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깊은 관심을 표하면서 이를 돕기 위해 오늘 7월 말에 북한과 한국의 동시방문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렇게 인도네시아가 미국이 ‘악의 축’으로 지목한 나라들에 대한 평화적 중재자로 나서자 중동과 미국의 고위관료들이 인도네시아를 연이어 방문하는 비상한 양태가 나타나고 있다.
인도네시아 외교의 최대 자원, 민주주의와 평화
요즘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약진은 과거와 전혀 다른 기반 위에서 추진되고 있다. 수카르노 시대의 외교가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2차 대전 승전국을 상대로 군사작전과 외교전을 벌여서 승리한 혁명적 업적을 바탕으로 강력한 반제 민족주의를 표방하였다면 수하르토 시대의 외교는 정치적 안정 속의 급속한 경제성장이라는 반공주의와 발전주의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네시아 외교는 민족주의나 발전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자원으로 삼는 외교라는 점에서 과거와 대별된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퇴진이후 6년간 정치개혁을 추진하여 2004년 정·부통령과 모든 의원을 직접선거로 선출함으로써 민주주의 이행을 종결지었으며, 지방자치단체장 직선과 부패와의 전쟁을 추진함으로써 민주주의 공고화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또한 20여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쓰나미 이후 2005년 말 아체해방운동 측과 헬싱키에서 평화협약을 맺는 데 성공하여 29년에 걸친 무장투쟁을 종결시키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쓰나미 덕분에 위수령으로 봉쇄되었던 아체의 대지가 세계를 향해 개방되었고 아체의 보통사람들이 재건의 주체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며, 아체해방운동의 무장력이 크게 손실되었기 때문에 평화협상을 위한 호조건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외교관들과 언론은 민주선거와 평화협정 덕분에 인도네시아의 이미지가 ‘정신없는 나라’에서 ‘진지한 민주국가’로 전환될 수 있었으며 이 새로운 이미지가 외교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대통령도 신국제주의의 바탕으로서 “재난을 극복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함께 “민주적 인도네시아”의 이력을 거론하였다. 그러면서 미국에게는 물리력의 사용이 아니라 “마음을 사로잡고 무장을 해제시키는” “소프트 파워”의 사용을 요구했고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한다면 단순한 자유가 아니라 관용과 인내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앞마당인 아세안의 지역협력에 대해서는 이른바 ‘아세안공동체’에 대한 ‘민주적 구상’을 제시하면서 민중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고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국제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외교적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무슬림이 가장 많고 그 대다수가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온건한 무슬림인 나라에서 시행하는 민주주의이고, 아체해방운동으로 대표되는 강성 이슬람 분리주의세력과 대화를 통해 평화를 달성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온건한 이슬람 국가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테러와의 전쟁 시기에 미국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고 이런 형세를 활용하여 ‘악의 축’들도 인도네시아를 발언과 협상의 우회로로 삼고자 하면서 인도네시아가 중재자로서 기동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게 된 것이다. 한국 정부도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4대 강국에만 의존하지 말고 인도네시아 같은 우회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외교적 유연성과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 인도네시아 외교 변화 주목하고 활용해야
민주주의와 평화를 자원으로 삼는 인도네시아의 외교정책은 중요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우선 국내적으로 시민사회의 발언권 신장에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민주적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내 인권 상황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파푸아의 분리주의에 대해서도 물리력보다는 대화가 우선되고 인권문제에 관한 시민사회의 비판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둘째로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전환은 아시아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에게도 유리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아시아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발전주의적 엘리트 주도의 ‘동아시아공동체’ 추진에 우려를 표하고 시민사회의 입장이 반영되는 지역협력방안을 모색하고 버마의 민주화와 함께 지역내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희구하고 있다. 개발연대에 맞서 민주연대를 모색하는 아시아의 시민사회단체들에게 인도네시아의 외교정책 변화는 전략적으로 활용할만한 중요한 변화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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