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三伏)에 찾아오는 손님은 범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다. 강원도 정선의 유학수(39세) 회원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 날은 말복이었다. 전날이 입추였지만 절기의 의미는 땡볕 앞에 무색했고 예정된 인터뷰는 더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범보다 더 무서운 손님이 된다 할지라도.

정선 가는 길은 TV 화면에서 보았던 수해 현장보다 더 처참했다. 평창군 진부로 들어서자 유실된 도로를 복구하기 위한 공사차량들이 곳곳에서 줄을 이었고, 산들은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무심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밀려오고 쓸려온 흙더미 곳곳에선 풀꽃들이 또 한세상을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자연을 망각의 광물이라 하지 않으랴. 우리 또한 그들의 일부로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잊고 산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수해의 악몽만 하더라도 언제나 그때 뿐.

단정한 차림의 그에게선 소년 같은 수줍음이 엿보였다. 하기야 불혹이지만 ‘농촌총각’인 그에게 낯가림은 당연한 첫인사이리라. 그렇지만 한 번 말문을 트자 상기된 표정으로 술술 이어간다.

“참여연대요, 회원이 되는 거 정말 기분 좋더라고요. 2000년이라요. 박원순 변호사님을 TV에서 보았거든요. 토론을 어찌나 잘 하시던지 그냥 회원 가입했지요. 휴대전화 요금인하운동,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될 땐 뛸 듯이 기뻤어요. 정말로 약자의 입장에 서는 시민단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유의 말투에서 구수한 강냉이 냄새가 났다. 요즘이 한창 옥수수철이라 더 그런지 몰라도 분명 그에겐 ‘강원도의 힘’이 있었다.

“정선 5일장을 보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잖아요. 일종의 관광상품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약초 재배지를 주말농장처럼 꾸리고 싶어요. 여유가 있으면 한우도 제대로 한번 길러 보고 싶고요. 우리 강원도 산은요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줘요. 가시오가피나무 있죠, 산삼 캐게 해주지요, 송이 따게 해주지요.”

연신 자랑을 늘어놓으면서도 얼굴엔 그림자가 짙게 내비친다.

“근데요, 세상에 공짜가 없드래요. 사람들이 쉽게 돈을 버니 또 쉽게 다 써버려요. 목돈 들고 카지노 가서 다 잃고 오는 거예요. 저도 한 번 갔었죠. 비싼 수업료 낸 셈 치고 발길을 끊었는데 패가망신한 사람들 많아요. 자살한 사람도 있고. 이건 신용카드 남발하는 것보다 더 문제가 심각해요.”

이미 이곳 정선에서 많은 사람 곯게 한 게임도박이 요즘 시끌벅적한 사행성 성인 오락게임으로 몸을 바꾼 게 아닐까. 불과 몇 년 사이 시장규모가 100배로 급팽창 했다고 하니 그 폐해를 짐작할 수 있을 게다.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도박성 게임에 중독된 중증환자들이 널려있음이 분명하다.

뒤란의 옥수수 밭에 바람 한 줄기 서걱거리며 지나갔다. 평상 위에는 감자, 옥수수, 수박이 잔칫상을 벌이고 손님을 불러댄다. 지역에서 드물게 뜻을 같이 한다는 이상교(52세)씨가 친구 몇을 데리고 왔다. 몇 해 전 태풍 루사 때 집단소송문제에 앞장을 섰던 이라 이런 자리가 반가웠던 모양이다. 이번 수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입에 거품을 문다.

“이럴 줄 알았어요. 강가에 공설운동장이다, 아우라지 공원이다 별의별 걸 다 만들었으니 물의 흐름이 더딜 수밖에요. 댐 개방은 원인 제공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책상에 앉아 있는 양반들은 우리 소리를 듣지 않아요.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도 우리하고는 관점이 달라요. 한 예를 들면 빗물에 모래가 쓸려 내려오면 우리는 걷어내어야 한다 하고 그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하니…….”

곁에 있던 칠순의 어머니도 거든다.

“멧돼지, 고라니 같은 짐승 때문에 농사를 못 짓겠는데 잡았다 하면 무조건 벌금이 300만원이니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벌금을 물어. 짐승을 위한 정치지 어디 사람을 생각해?”

현장의 생생한 집단 민원이다. 들어 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난감했다. 참여연대에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유학수 회원에게로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초심을 잃지 않는 거라요. 이렇게 우리의 소리에 귀 기울여주고요.”

가슴이 뭉클해지고 어깨가 무거웠다. 참여연대가 대안인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이.

자리를 일어서며 결혼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 희미하게 웃는다.

“안 해요. 우리 같은 사람은 대부분 국제결혼을 하는데 애들을 어떻게 해요? 미국 같은 나라도 인종 차별이 심한데 우리나라처럼 제 핏줄 찾는 나라가 오죽하겠어요? 나중에 더 늙으면 친구같이 함께 늙어갈 사람이나 찾아야지요.”

그야말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의 집합체가 농촌인 셈이다. 환경, 인권, 교육, 문화……. 산천은 비옥한데 논밭은 베팅 머신으로 채워지니 팍팍한 삶 이겨낼 재간이 있으랴.

이경휴 참여연대 회원 mairim@hanmail.net
2006/09/01 00:00 2006/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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