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실험 논란에서 생략된 것들
2006/2006년 11월 :
2006/11/01 00:00
북한의 핵실험 이후 우리 사회는 북한 처지를 이해하자는 쪽과 무조건 제재와 보복을 해야 한다는 쪽과 중간에서 적절한 제재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어 거센 논란을 벌이고 있다.
북한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쪽은 북의 핵무기가 자위적인 수단 또는 협상용이라고 말한다. 자위적이라 함은 한미동맹의 군사력 특히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가하는 미국의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협상용이라 함은 북한의 모든 요구를 무시하는 이른바 미국의 대북 ‘무시정책’에 대응하여 ‘날 좀 보소’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 제재로 응수하면 협상으로 가는 판이 깨질까 걱정한다.
북한을 강력하게 제재해야 한다는 쪽은 북의 핵무기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북의 핵실험은 북한의 군사력 우위를 가져왔으며 핵무기 확산을 금지하려는 국제적 노력을 붕괴시키고 동북아의 안정을 결정적으로 해친다는 것이다.
적절한 제재를 주장하는 쪽은 협상을 통해 남북한의 비핵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며 제재는 협상을 해치지 않는 적절한 수준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언로를 통해 대략 이러한 세 가지 논지를 매일같이 듣고 있다. 여기서 생략된 것 또는 침묵된 것을 찾아보자. 어떤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생략-침묵은 그 자체로 메시지를 갖고 있으며 한 사회의 정신을 장악하려는 주류적 사고방식의 핵심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군사적 긴장 높이는 한미동맹
먼저 노무현 정부는 적절한 제재를 통해 북한을 6자회담으로 이끌고 남북한 비핵화는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가 말로는 자주국방을 내세우면서도 오히려 한미동맹 강화를 통해서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을 높여간 점이 아주 편리하게 생략되고 있다. 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10월호에서 이혜정 교수가 훌륭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자주국방을 통해 높아진 한국의 군사력을, 세계 어느 곳에든지 신속하게 일방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려는 핵선제공격국가 미국과의 동맹에 더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보통 생략되는 이 거대한 위험을 이 교수는 잘 지적하고 있다.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자는 쪽이 생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최고의 생략은 핵무기를 자위 또는 협상의 수단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과연 “핵무기가 다른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되기에 정당한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핵무기는 다른 재래식 무기와 달리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할 수 있는 반인도적 무기이며 현재의 국제법상으로도 불법무기이다. 핵무기는 무고한 사람들을 대규모로 잔인하게 살해할 뿐만 아니라 더 잔인한 고통을 후손과 환경에 대대로 남긴다. 이 비참을 생략하는 것은 의미가 크며 그 의도가 크다. 이 생략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표적으로 하는 무기가 정당한 자위 또는 협상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러한 인간애와 그러한 비참을 제기하는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열등한 것으로 차별화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핵무기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나
이쯤 되면 대북제재론자들이 편리하게 생략하는 것이 드러난다. 북의 핵무기를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북한이 강해지기 때문이지 핵무기가 반인도적 무기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에게 미국의 핵무기, 그리고 미국이 한국에게 제공하는 핵우산은 문제도 아니다. 정당하고 필요하기까지 하다. 우리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대량으로 사멸시키는 것으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군사적 방법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대북제재론자는 북한이해론자와 무기와 살인에 대한 철학이 거의 같다. 서로 비난하지만 출발점이 같은 것이다.
대북제재론자들에게는 ‘made in US’핵무기의 선함을 믿는 광적인 미국 숭배가, 대북이해론자들에게는 ‘북조선 산’ 핵무기의 선한 목적을 믿는 숭배가 조금 다를 뿐이다. 양자가 모두 열등하게 격하시키려고 하는 것은 최근 국회에서 ‘평화’를 부르짖는 세력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며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훈계하는 야당의원들의 목소리에서도 확인된다.
국민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안보전문가’들
생략을 통해 말하는 것은 그 생략을 말할 때 보복이 따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눈에 띄지 않는, 언급되지 않는 보복이 있는 것일까? 나는 더 큰 침묵을 강요하는 보복문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이른바 안보전문가들이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 정부의 국방·안보 정책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국방·안보 정책을 논의할 때 ‘누가 너희보고 그런 식으로 보호해달라고 했나?’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 핵무기를 통해서 남한까지 보호할 수 있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서도, 미국의 핵우산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동맹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난 그런 식의 보호 필요 없는데’, ‘어차피 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는 진짜 안보의 주인들의 목소리는 주류 언론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침묵당하는 것이다. 보호(안전)의 문제를 당사자가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사자의 문제를 대리인들이 가로채서 제기하기 때문이며 이들 대리인들, 즉 자칭 안보전문가들이 보호(안전)의 문제를 주인들로부터 도둑질했기 때문이다. 안보 전문성의 세계에서는 거대하고 복잡하며 국제정치적인 핵문제를 아무나 말해서는 곤란해진다. 더구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런 사안을 개인의 가치로 재단하여 말하는 것은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이렇듯 안보전문성의 세계는 자칭 보호자들이 원치 않는 사람들을 피보호자로 만들며 동시에 침묵을 강요하는 세계이다.
이렇게 하여 북 핵실험 논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략되는 것은 ‘과연 핵무기가 군사 문제인가?’라는 당연한 질문이다. 이 질문이 생략되어야만 자칭 안보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군사·안보 문제로 재생산해낼 수 있으며, 동시에 핵무기를 생활의 문제, 삶의 가치의 문제로, 인간의 문제로, 가부장제의 문제로, 남성성의 문제로 말하고자 하는 진짜 안보의 주인들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침묵시킬 수 있다.
대량 살상이 어떤 목적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그런 상태가 ‘자연스런’ 상태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광기로 흐르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북한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쪽은 북의 핵무기가 자위적인 수단 또는 협상용이라고 말한다. 자위적이라 함은 한미동맹의 군사력 특히 북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가하는 미국의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협상용이라 함은 북한의 모든 요구를 무시하는 이른바 미국의 대북 ‘무시정책’에 대응하여 ‘날 좀 보소’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 제재로 응수하면 협상으로 가는 판이 깨질까 걱정한다.
북한을 강력하게 제재해야 한다는 쪽은 북의 핵무기를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북의 핵실험은 북한의 군사력 우위를 가져왔으며 핵무기 확산을 금지하려는 국제적 노력을 붕괴시키고 동북아의 안정을 결정적으로 해친다는 것이다.
적절한 제재를 주장하는 쪽은 협상을 통해 남북한의 비핵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며 제재는 협상을 해치지 않는 적절한 수준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언로를 통해 대략 이러한 세 가지 논지를 매일같이 듣고 있다. 여기서 생략된 것 또는 침묵된 것을 찾아보자. 어떤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생략-침묵은 그 자체로 메시지를 갖고 있으며 한 사회의 정신을 장악하려는 주류적 사고방식의 핵심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군사적 긴장 높이는 한미동맹
먼저 노무현 정부는 적절한 제재를 통해 북한을 6자회담으로 이끌고 남북한 비핵화는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가 말로는 자주국방을 내세우면서도 오히려 한미동맹 강화를 통해서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을 높여간 점이 아주 편리하게 생략되고 있다. 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10월호에서 이혜정 교수가 훌륭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자주국방을 통해 높아진 한국의 군사력을, 세계 어느 곳에든지 신속하게 일방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려는 핵선제공격국가 미국과의 동맹에 더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보통 생략되는 이 거대한 위험을 이 교수는 잘 지적하고 있다.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자는 쪽이 생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최고의 생략은 핵무기를 자위 또는 협상의 수단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 속에 있을 것이다. 과연 “핵무기가 다른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되기에 정당한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핵무기는 다른 재래식 무기와 달리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할 수 있는 반인도적 무기이며 현재의 국제법상으로도 불법무기이다. 핵무기는 무고한 사람들을 대규모로 잔인하게 살해할 뿐만 아니라 더 잔인한 고통을 후손과 환경에 대대로 남긴다. 이 비참을 생략하는 것은 의미가 크며 그 의도가 크다. 이 생략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표적으로 하는 무기가 정당한 자위 또는 협상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러한 인간애와 그러한 비참을 제기하는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열등한 것으로 차별화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핵무기를 수단으로 삼을 수 있나
이쯤 되면 대북제재론자들이 편리하게 생략하는 것이 드러난다. 북의 핵무기를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북한이 강해지기 때문이지 핵무기가 반인도적 무기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에게 미국의 핵무기, 그리고 미국이 한국에게 제공하는 핵우산은 문제도 아니다. 정당하고 필요하기까지 하다. 우리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대량으로 사멸시키는 것으로 목적으로 하는 그런 군사적 방법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대북제재론자는 북한이해론자와 무기와 살인에 대한 철학이 거의 같다. 서로 비난하지만 출발점이 같은 것이다.
대북제재론자들에게는 ‘made in US’핵무기의 선함을 믿는 광적인 미국 숭배가, 대북이해론자들에게는 ‘북조선 산’ 핵무기의 선한 목적을 믿는 숭배가 조금 다를 뿐이다. 양자가 모두 열등하게 격하시키려고 하는 것은 최근 국회에서 ‘평화’를 부르짖는 세력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며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훈계하는 야당의원들의 목소리에서도 확인된다.
국민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안보전문가’들
생략을 통해 말하는 것은 그 생략을 말할 때 보복이 따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눈에 띄지 않는, 언급되지 않는 보복이 있는 것일까? 나는 더 큰 침묵을 강요하는 보복문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이른바 안보전문가들이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 정부의 국방·안보 정책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국방·안보 정책을 논의할 때 ‘누가 너희보고 그런 식으로 보호해달라고 했나?’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 핵무기를 통해서 남한까지 보호할 수 있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서도, 미국의 핵우산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동맹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난 그런 식의 보호 필요 없는데’, ‘어차피 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는 진짜 안보의 주인들의 목소리는 주류 언론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침묵당하는 것이다. 보호(안전)의 문제를 당사자가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사자의 문제를 대리인들이 가로채서 제기하기 때문이며 이들 대리인들, 즉 자칭 안보전문가들이 보호(안전)의 문제를 주인들로부터 도둑질했기 때문이다. 안보 전문성의 세계에서는 거대하고 복잡하며 국제정치적인 핵문제를 아무나 말해서는 곤란해진다. 더구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런 사안을 개인의 가치로 재단하여 말하는 것은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이렇듯 안보전문성의 세계는 자칭 보호자들이 원치 않는 사람들을 피보호자로 만들며 동시에 침묵을 강요하는 세계이다.
이렇게 하여 북 핵실험 논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략되는 것은 ‘과연 핵무기가 군사 문제인가?’라는 당연한 질문이다. 이 질문이 생략되어야만 자칭 안보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군사·안보 문제로 재생산해낼 수 있으며, 동시에 핵무기를 생활의 문제, 삶의 가치의 문제로, 인간의 문제로, 가부장제의 문제로, 남성성의 문제로 말하고자 하는 진짜 안보의 주인들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침묵시킬 수 있다.
대량 살상이 어떤 목적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그런 상태가 ‘자연스런’ 상태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광기로 흐르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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