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은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이 깊사오나 그 부친을 부친이라 하지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 하지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잇가”라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출가해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의적이 되었으며, 이후 ‘높낮이 없는’ 율도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평등사상을 견지한 홍길동의 작가 허균을 능지처참한 신분사회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재능 있고 뜻 있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반면에, 가문의 위세에 편승한 썩은 기득권 세력에게는 권력과 재물을 무한대로 보장해주었던 조선사회는 결국 이러한 비극적인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찍이 조광조는 이 좁은 조선 땅에는 인재가 적기 때문에 그들을 골고루 등용하지 않고서는 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설파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 인구가 4,000만이 된 지금은 사정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한번 취득되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 학벌이라는 족쇄는 우리 사회의 활력을 빼앗고 수많은 창의적인 인재들의 전도를 가로막고 그들을 좌절의 늪에 빠트리는 이 시대의 신판 신분제가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서울대의 대한민국 지배는 군사독재, 재벌의 경우처럼 쉽사리 가시화되진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또 서울대를 못 간 사람들이 그것을 ‘지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식을 통해 재도전 열망을 불태우게 한다는 점에서 훨씬 색다른 형태의 지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재벌, 지역주의처럼 학벌이라는 장벽, 특히 서울대라는 상징은 일자리의 확보, 감투와 승진을 좌우하는 물질적 힘이며, 모든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행동을 옥죄고, 그들의 주머니를 쥐고 흔드는 무시무시한 권력이다. 이 학벌이라는 권력을 얻기 위해 한국인들은 핸더슨(Henderson)이 말한 것처럼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필사적으로 남을 밟고서 올라서려 하고 있다.

서울대의 고시학원화

얼마 전 한 일간지는 서울 강남의 젊은 엄마들이 자녀들의 평생을 지배하는 연고를 미리 쌓아두기 위해 출산할 때의 병원이나 자녀의 유치원까지도 골라서 보낸다는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양반에게 권력과 돈, 지위를 보장해 주는 사회에서는 돈을 주고서라도 양반을 사려 할 것이며, 외모가 성공과 출세의 지름길인 사회라면 사람들은 책 보는 시간에 거울을 볼 것이며, 수백, 수천만 원을 들여서라도 얼굴을 뜯어고칠 것이다. 2001년 오늘, 이 땅의 강남 젊은 엄마들의 행동은 바로 학벌이 돈과 권력이 되는 현실, 즉 화폐자본을 사회적 자본(학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투자’라 생각하는 우리 사회 ‘지도층’의 사고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재벌 집 자녀에서 울산과 마산의 노동자 자녀들까지 이 땅의 아이들은 오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과외, 저 학원을 돌고 있으며,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형형색색의 학원 차량은 요란스럽게 거리를 누비고 다닌다. 실제 우리나라 사람들의 64%는 일류대를 졸업하는 것이 사회적 성공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학벌경쟁의 소용돌이에서 탈락하면 저 캄캄한 진흙탕에서 영원히 못 빠져나올 것만 같은 공포감을 갖고 있다.

단순히 이 시대의 풍속도라 말하기에는 학벌주의의 폐해는 너무나 심각하다. 당장 7조 원을 넘어서는 사교육비 부담, 과열된 입시교육 탈락자들의 학습의욕 상실로 인한 중·고등학교 특히 실업고의 학급 붕괴현상, 입시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하는 학생들, 중·고등학교에서의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교육의 실종, 참교육의 열정을 가진 교사들의 좌절감, 지방의 소외와 지방대학의 침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짐을 우리사회에 남기고 있다. 좋은 대학 나와야 사람 대접 해주는 이러한 사회풍토야말로 전도양양한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반인권적인 폭력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풍토가 빚어내는 해악 중에서 대학 교육의 실종이야말로 으뜸에 속할 것이다.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된 사회에서 그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더 이상 지적인 노력을 경주하지 않게 된다. ‘일류대’의 경우 학사징계를 겨우 면할 학점을 따더라도 일단 간판은 확보한 것이니 그들에게 학문의 참맛을 보여주려는 교수들의 애처로운 노력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만다. 서울대의 고시학원화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고시과목을 청강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신림동 고시촌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전국에서 몰려든 3~4만 명의 현대판 유생들의 풍경이야말로 정보화시대와 신분제 조선사회가 공존하는 희극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성공’보증서를 얻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말해야 하는 이른바 2ㆍ3류 대 교수들의 ‘역할 부재’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BK21, 대학서열화 가속시켜

이 현대판 신분제, 학벌주의의 정점에는 온 나라의 모든 학생들을 일렬로 줄세우기하여 그들에게 서열을 매기고 바코드를 부착한 다음 그것을 평생토록 지니고 다니도록 하는 서울대라는 상징이 자리잡고 있다. 서울대가 버티는 한, 우리 사회에서 ‘기타 대학’은 독자적인 브랜드를 만들어도 재벌의 자본력과 시장장악력에 항복할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과 같은 신세이다. 한국의 재벌과 언론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성장하기보다는 분단, 군사독재, 국가주도 경제성장의 산물이듯이 서울대가 그러하며, 재벌과 언론이 돌진적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듯이 서울대 역시 그러한 성장과정에서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바 있으며, 그러한 재벌과 언론이 국내에서는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공룡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전혀 경쟁력이 없는 피라미에 불과하듯이 서울대 역시 그러하다.

일각에서는 이 교육제도를 혐오하여 이민을 떠난다고 하고, 아예 자녀들을 외국 대학에 보낸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다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교육부는 입시전형 방식의 다양화, 평생교육의 강화, 지방대학 특별법 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육부의 처방이 그러하였듯이 수술이 시급한데 임시 처방으로 해결하려는 접근 법은 문제의 핵심에서 비켜나 있다. 더구나 ‘큰 놈 더 키워주자’는 BK21 사업은 대학의 서열화를 더욱 고착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연구중심 대학, 대학원중심 대학이라는 목표는 지난번 서울대 대학원의 미달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유학생이 득세하는 이 한국사회의 풍토 속에서는 비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것이 새삼 확인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한 신지식인 운동은 학벌사회의 벽을 깬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지만, 이 운동이 전개된 이후 학벌주의의 피해자들이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엘리트 교육은 과연 필요한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학력ㆍ학벌주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그것이 제대로 자리잡기 어렵다. 우리사회 지배체제의 유지ㆍ강화, 민중들의 체제 흡수와 복종의 기제인 이 학력ㆍ학벌주의는 단순히 입시제도 혹은 교육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사회의 핵심적인 작동원리와 연관된 정치 사회적 중대사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은 대단히 어렵다. 물론 학벌주의 문제가 서울대가 없어진다고 단숨에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우선 우리는 서울대의 혁신적 재편 없이는 백약이 무효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전국의 국립대를 단일대학으로 통합하고, 거주지 진학을 장려하여 특성화를 유도하는 대안도 생각해볼 수 있고, 서울대를 분리ㆍ해체하여 예술, 응용과학을 떼어낸 다음, 순수학문 중심의 대학으로 개편하는 방안 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동춘 |성공회대 NGO학과 교수·참여연대 협동처장
2001/03/01 00:00 2001/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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