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시나리오 재미는 낙제점 내 아바타는 어디에...
2001/2001년 03월 :
2001/03/01 00:00
컴퓨터 게임으로 재구성한 오늘의 대한민국
밀레니엄세대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해 서울대 철학연구소와 조선일보사의 공동주최로 열린 고교생 논술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고도 『조선일보』측의 인터뷰를 거절 해 화제가 됐던 한 밀레니엄세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세상을 따라가 보자. <편집자 주>
“잠깐만요.”
냉랭한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퍼지자 좌중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노신사 몇몇이 눈살을 찌푸리며 수근거린다.
XX년 X월 X일.
○○회사의 신작 게임 발표장. 어디서 한 번씩은 본 듯한 그렇고 그런 얼굴들이 모여 격려, 축하, 덕담의 의례를 마치고 막 사교활동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한 소년-아마도 소비자 평가단의 일원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이다.
“사실 분위기가 왜 이런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그는 잠깐 호흡을 끊었다. 중대발표를 할 태세다.
“지독히 재미없거든요, 이 게임.”
소년의 숨이 풀리는 순간 다른 모든 사람의 호흡은 멈췄다. 단상 위에 서 있는 사람들 몇몇은 대놓고 손을 내저으며 허둥댄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발언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자신이 군주 혹은 경영자가 되어 집단을 움직이는 게임에서 탈피해 순전히 개인의 삶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좋았지요. 하지만 사고방식은 완전히 무협지 식이군요. 제발 ‘말’이 통하도록 시나리오를 써봐요. 채팅창 기능은 다 지원이 되는데, 말로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군요. 유저(User)가 신의 입장에서 개체를 바라볼 때는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들이 재미있게 보였겠지만, 개인의 위치로 강등되는 순간 그것은 비참한 일이 되죠. 플레이(Play) 방식은 뻔해요. 대립하는 두 존재가 있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질량이 큰 쪽으로 끌려가야 하죠. 수 자체가 힘이니 소수자로 플레이한다는 건 힘든 일이에요. 테러리스트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면, 여성으로는 플레이하기 싫어요. 홀로 세상을 살 능력이 없다면, 성취향은 동성애로 설정해선 안되겠군요. 어지간히 돈이 많지 않다면 외국 나가도 차별당할 것이고. 그렇다면 유저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죠? 현실세계에서야 선택권이 없으니까 그냥 산다지만. 비슷비슷하고 평균적인 사람들이 넘치겠군요. 게다가, 아무리 피해도 미성년의 시기는 남아요. 미성년자야말로 약자 중에서도 특이한 존재죠. 변하거든요. 그들 중 영원히 미성년인 사람은 없어요. 그건 더욱 ‘규칙’을 공고히 하죠. 일정 기간 동안 겪는 차별은 ‘추억’이 될 수도, ‘통과의례’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다른 이들은 맘에 안 들면 플레이어끼리 담합해 소수를 다수로 키우는 전략도 구사해 볼 수 있다지만, 가만 있어도 성인이 되면 ‘인간’이 될 그들은 덤비지도 않아요. 그러니, 얼마나 재미가 없겠어요? 차라리 21세부터 플레이할 수 있는 모드가 있으면 좋겠군요.”
신경을 긁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선가 많이 듣던 소리’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몇몇 이들은 그들의 원래 습관대로 ‘그게 뭐가 잘못이냐’, ‘원래 다 그렇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등의 반응을 보이려다 목구멍 언저리에서 집어삼켰다. 지금 얘기는 게임 얘기다. 소비자가 ‘재미없다’고 판정을 내렸는데, 그따위 반응을 보였다가는 파산하고 말 것이다. 아마 그것조차도 힘의 논리에서 비롯된 판단이겠지만.
“그리고 수에 의한 차별을 어설프게 논리로 봉합하려 할 때 짜증이 가중되죠. 뻔한 거죠. ‘××는 ○○보다 더 열등하다, 따라서 보호가 필요하다’. ‘××는 비정상이다, 따라서 교정 대상이다’. ‘말’이 ‘말’이 아니고 아예 힘을 뒤에 깔고 있으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몇몇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장사꾼만 아니었더라면, 저런 건방진 소릴 그냥 넘기진 않았을 거라고 뇌까렸을지도 모른다. 꼬마는 드라마를 많이 보고 소설을 많이 읽고 거기서 배운 대로 행동해 주는 게 좋다. 엄숙한 척 폼잡는 할아버지가 한 명 나와 자기 아들들 사진 올려놓고 ‘이놈에겐 이 회사를 물려주고, 저놈에겐 저 회사를 물려줘야지’라고 내뱉는 드라마를 흥미있게 보고, 기업 경영권 쟁탈전을 문중 간의 전쟁 비스무레하게 묘사해놓은 극화를 손뼉치며 감상한 다음, 다음날 회사에 나가 총수님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우러러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꼭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일까?
“다음으로, 이 게임을 지독히도 재미없게 만드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 예쁜 아바타(사이버상의 캐릭터)의 이마에 박힌 이 숫자 말입니다. 랭킹을 매긴다, 물론 충분히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요소이죠. 하지만 한번 보세요. 이 프로그램이 랭킹을 어떻게 매겨주는지. 재력, 지위, 명예 포인트 대충 합산해서 나오죠? 이 한 가지 룰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정한 제멋대로의 룰. 하지만 살아가는 데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어요. 오로지 여가를 즐기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수집하기 위해 회사에 나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콘서트 쫓아다니며 생음악 듣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인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이들의 ‘랭킹’ 역시 프로그램의 방식대로 매겨지겠죠. 그리고선, 다른 이들이 그들을 무시해요. ‘너희들은 잘못 살고 있는 거다’라고. 몇 살이 되면 집을 사야 되고, 또 몇 살이면 자가용이 있어야 하고…. 사람을 한 방향으로 내몰면서 행동지침까지 다 정해주니, 유저는 무슨 재미로 플레이하죠? 끊임없이 나오는 ‘성공’이란 말. 성공, 성공, 성공! 어떻게 해야 ‘성공’하나. 무엇을 해야 ‘성공’하나. 왜 나는 ‘성공’하지 못하나. 글쎄요, 그들의 ‘룰’이 지배하는 이 곳에서, 성공이란 말이 특정인의 삶의 방식을 모든 이에게 강요하는 것 외에 어떤 기능을 하는지 묻고 싶군요.”
그의 말이 너무도 신랄하고 악의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인지, 급기야는 누군가 한 명이 버릇대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게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당신 건강에도 안 좋을 것 같군요. 깊이 생각하지 말고 남들 하는 대로 플레이하세요.”
많은 이에게 감미롭게, 몇 사람에게 구역질나게 울려퍼졌던 소리는 메아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통렬한 반격을 받았다.
“재미없으면 안 사요.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몇 초 동안의 침묵.
“…야, 야!”
“…야 이 새끼야, 그럼 너 혼자 안 사면 되지 왜 여기서 잿밥을 뿌리냐?”
한번 빗나가면 영원히 평행선을 그린다. 그는 싱긋 웃었다. 아니, 그러려고 애썼다.
“뭐, 그런 대사는 게임 안에서도 많이 나오지요. 그중 제 정신건강에 가장 큰 악영향을 끼쳤던 대사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였어요. 떠나는 사람 욕하려는 건 아니죠. 싫으면 나갈 수 있습니다. 자퇴를 하든, 사표를 내든, 이민을 가든. 하지만 내부에서 뭔가 바꾸려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내뱉는다는 건 웃기는 일이죠. 대체 누가 ‘절’인가요?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아님 금동불이 ‘중’더러 나가라고 할까봐서요?…왜 니들 맘대로 절이야? 니가 ‘절’이야? 주지승이 ‘절’이야? 결국은 그것도 힘으로 해보겠다는 얘기지. 그럼, 나도 여기 방 하나 만들어서, 몽둥이 하나 들고 너희들 머리 박게 만들 수 있어. 거기선 ‘절’이 싫어도 주지승 허락 없인 나가지도 못하게 해볼 거야. 무슨 차이가 있지? 내가 ‘말’했을 때는, 내 말 듣고 여러 사람이 호응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그것도 몰라? 하긴 너희들은 말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니들이 그렇게 중시하는 힘의 관계를 한번 역전시켜보려고 이렇게 떠드는 거야, ‘절’ 한번 내가 만들어 보려고. 그러니까 ‘절이 싫으면 나가라’고 말하지 마. 네가 말하는 절과 내가 말하는 절은 틀리니까.”
존대말이 하대어로 바뀌는 순간, 홀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고, 뛰쳐나가려는 사람, 덥치려는 사람, 그들을 말리려는 사람들로 분주한 공간 속에서 술잔과 유리병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소년이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식장을 빠져나오기 전에, 기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호기심 많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었던 정장 입은 청년 하나가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어떻게 하냐고요? 보이콧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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