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나이에 다시 찾아나선 화가의 자리
2001/2001년 03월 :
2001/03/01 00:00
향기있는 만남|민중미술가 홍성담
발로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물론 나도 손으로 노크를 했다. “계세요?” 몇 번을 그렇게 했는데도 응답이 없으니 당연히 주먹이, 아니 발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의 대형 창고작업실 입구에는 벨이 없다. 약속을 잊고 출타를 한 것일까? 아니면 ‘작가적 은둔’에 들어가 버린 것일까? 어느 경우라도 다시 와야겠네, 예술의 길이 멀고도 험한 게 아니라 예술가를 만나는 길이 험한 거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서비스센터 아저씨처럼 바로 문 앞에 서서 핸드폰을 ‘때렸다’.
'아니 안 들어오고 뭐해요.'
아마 억수로 추운 겨울날, 북한 덕산 지방을 내려오던 중공군의 복장이 저러했으리라. 누비점퍼, 누비바지에 물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한 시간도 넘게 문을 두드렸노라고 엄살을 부리며 지각한 사실을 은폐하려는 나의 얄팍한 의도를 아는체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상냥한 미소로 커피를 준비한다. 날렵한 주부의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그는 혼자 산 지 10년이 넘었을 것이다. 손에 밴드가 붙어 있다.
“참치 캔 뚜껑에 베였어요. 그 통을 버리려면 씻어야 되잖아요. 수돗물에 헹구다가 손을 벤 거예요. 이거 뭐 금방 낫겠지요. 살림 하다보면 이런 잔상처를 많이 입게 돼요. 그나저나 주부습진이 안 나아서 큰일이에요.”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화가는 심각한 표정이 된다. 붓과 행주. ‘언덕에 올랐다가 산에서 내려온 사나이’처럼 ‘민중미술가 만나러 갔다가 전업주부 만나다’로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미술가 홍성담부터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션 체인지 임파서블.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민중 미술가들의 작품 전시를 위해 여러모로 준비를 한다는데 어떤 상관이 있나요?
‘하하하… 상관없어요’ 라면서 그는 상관 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립미술관에 들어간 제 작품이 5월 연작 기록 판화인 ‘새벽’인데 그게 추려서 완간된 게 모두 50점이에요. 전두환 신군부정권으로부터 최고의 불온물로 낙인찍혀 가장 밉보인 작품이었지요. 그 판화 건으로 구속이 되고 몇 년에 걸쳐 계속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요.”
그러나 그 판화를 찍었다는 죄목으로 이리저리 그가 잡혀가거나 불려 다니는 동안, 국제 앰네스티와 영국 글래스고우시, 독일 함부르크시에서는 그를 위해 인권활동을 벌였고, 그의 작품을 사들여 자신들의 미술관에 소중하게 전시했다. 그런 행사가 열릴 때마다 작가는 초대를 받았지만 갈 수 없었다. 출국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한때 간첩혐의를 받고 옥살이까지 했던 화가의 작품이 버젓이 대중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것도 공공 미술관에서 개방되다니.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신원조회니 하는 까다로운 조건도 없다.
격세지감의 만감이 교차하시겠군요?
“문제 작품이 공공 미술관의 소장 작품으로 선택된 것이지요. 한국 사회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대목입니다. 기분이 좋지요. 사실 아직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는커녕 개정도 안 된 마당이지만 인식 자체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은 들어요. 요즘 TV 토론 같은 데서 국가보안법 개정이나 언론개혁을 반대하는 극우적인 발언들을 들으면 저걸 그냥 두나, 전국민적으로 뭉쳐 뭔가 대응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 치솟으면서 속이 많이 상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속내를 들춰보면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엊그제 한 라디오 토론 프로그램에서 북한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남한정권은 친일세력이 잡았기 때문에 갈등구조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둥.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다니, 참 많이 변한 거죠. 그런데 그런 얘기 막 해도 되나 몰라? 진짜 걱정되네, 하하하.”
그의 웃음이 커피향 속으로 퍼져 나갔다. 확실히 세상은 변했다. 옛날 같으면 커피 마시면서 이런 얘기 못한다. 소주라면 몰라도.
그럼 감옥에 도합 몇 번을 간 건가요?
“창피하게 그런 것을 왜 자꾸 묻고 그래요? 광주 5월 등과 관련해서 수배와 조사를 받았지요. 89년에 평양축전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사건으로 감옥 가서 3년 있다가 나왔고.” 감옥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화두이다. 지난 98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 홍성담에게 ‘감옥’은 강한 주제가 되었다. 지금 그가 중공군 복장으로 손을 호호 불어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도 감옥이다. 대저 그에게 있어서 감옥이란 무엇인가?
“파시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의 콤플렉스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뭐 이런 관계 안에서 말이죠. 파시즘의 기본 원리란 바로 나 이외의 사람도 나를 닮아야 한다, 저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격리시키거나 죽이거나 하는 지경까지 가는, 그런 게 파시즘의 골조라는 거죠. 한 사회의 파시즘의 전형이 바로 감옥이 아닌가 생각해요.”
현재 작업중인 그림도 역시 감옥과 관련 있는 것이죠?
“3월 17일부터 과천 국립미술관에서 작가 30여 명을 선정해서 대규모 기획전을 여는데 그 중 민중미술측에 세 명이 선정되었어요. 우리 주제는 ‘메시지의 전달’인데 제 그림제목은 ‘통방’이고요. 통제되고 꽉 막힌 감옥 생활에서 재소자들이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나 제 경험을 통해 보여주는 거지요. 그전에는 감옥 안에서 감옥을 바라보았는데 이번엔 감옥 밖에서 바라보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 보니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요. 물론 그 안에 있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러니까 살았지만… 이제 이 그림으로 감옥그림은 끝이에요. … 내가 마음 속에서 기어코 부닥치고 말아야 할 게 있지 않겠어요. 그것을 그리고 나서야 다른 것을 그릴 수 있는 그런 것이죠. 이걸로 나는 그런 부담을 덜게 되겠죠.”
그는 이제 감옥에서 탈출을 한 것일까? 인간은 너무나 이상한 존재여서 제 스스로 강요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뭐랄 사람도 없건만 기어코 혼자서 우기는 게 인간인 것이다. 시지프스보다 더 힘겹게 무거운 바위를 지고 끙끙거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옥죄었던 80년대라는 시대의 올가미에서 어떻게 빠져 나왔나?
“80년대는 자신의 꿈이 없어야 미덕인 시대였습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와 함께 하기 위해서 개인은 무한하게 ‘유보상태’로 남아 있어야 했던 시대였죠. 그게 우리에게 콤플렉스고 스트레스였던 것이죠. 현재는 다양성을 요구하는 시대,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대이지 않습니까? 예술가의 생명은 가없는 상상력 아닙니까? 그런데 80년대는 작가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그런 면이 분명히 있었죠.”
때로 붓질 자체를 제한하는 수도 있었다. 그의 작품 ‘사계절’ 중에는 겨울이 없다. 판화시리즈 사계절을 봄, 여름, 가을로 그려내고 있을 때 ‘너무 관념적으로 흐른다’는 운동권들의 비판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 등쌀에 못 배겨나 ‘에라, 그럼 겨울은 없다’고 포기한 것이다. 그의 슬픈 겨울이야기다. 그렇지만 이런 저간의 이유를 밝힌 지도 얼마 안 된다. 이러한 이유를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장산곶매처럼 그도 훨훨 날아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가?
글쎄요, 그러한 도정에 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 그 동안의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는 가운데 발생한 산업화의 잔해에다 또 정보 파시즘, 사이버 파시즘 같은 게 등장하고 있잖아요. 한국사회가 많이 다양해졌지만 아직도 그 다양한 것끼리의 간격이 불안정하지요.”
그는 특히 사이버 파시즘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www. humani. org)를 만들어 왕성한 사이버 액션 즉, 미술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이 최첨단 기술과 어울린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림 중 어떤 것들은 전통적인 색채인 오방색의 현란함으로도 섬뜩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민중미술의 한복판에서 동영상으로 뛰는 그의 표현방법은 가히 전방위적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욕심이 대단한 것 같은데요?
“그림이든 뭐든 자기표현의 도구라고 봐요. 내 표현에 합당한 것이라면 장르와 매체를 구별하지 않겠다는 게 제 의지예요. 80년대 그 당시 광주에서 또 문화운동판에서 장기간 일하면서 음악, 연극 등에도 전방위적으로 참여했죠. 뭘 구별할 처지가 아니었거든요. 그때 습성이 그대로 붙어 있는 거죠. 대학 다닐 때 영화도 좀 해봤고, 90년대 감옥에서 나와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동영상이 갖는 대중적 호소력을 깨달았어요. 매체를 도구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술이 엔터테인먼트화 하는 것인데 여기서 주의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될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면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자기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백남준 같은 경우가 그렇죠. 썩어가는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그에 종속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당연한 귀결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우리 미술쪽에서 매체를 광범위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의 화두예요. 요즘 미디어 미술이 유행하면서 우리 민중미술계에서도 그런 흉내를 내는 친구들이 다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배제해야 하는 자본의 종속구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고 애석해요.”
창고형 작업실은 가히 넓었다. 축구장만하다면 허풍이지만 배구시합 정도는 능히 하고도 남을 공간이다. 책장 안에는 물감이 빼곡이 쌓여 있었다. 그의 보물들. 저게 전부 돈이 아닌가. 난 유화 물감을 볼 때마다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있다. 갈탄 난로 위에 곰국 솥이 끓고 있었다. 광우병이라고 난리들인데 걱정이 안 되는가 보다.
“요럴 때 얼른 사서 끓여 먹어야재. 값이 싸지 않소.”
‘살림의 지혜’. 그는 광우병의 잠복기는 길면 60년이나 된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하고 있는 듯했다. 주방을 살펴보니 어쭙잖게 살림하는 여자들은 기죽을 정도로 손이 맵짠 것 같다. 밥그릇 하나 하나도 함부로 고른 게 아니다.
살림하랴, 작품하랴 힘들겠어요. 가끔 슬럼프가 찾아올 땐 어떻게 극복하나요?
“일단 청소와 빨래를 하고 인스턴트 죽과 스프를 준비한 다음, 이불로 굴을 만들어 들어가 묻혀요. 다른 사람들한테 나 힘들다, 이런 표시 안 하죠. 술로 풀 생각도 안 해요. 그리고 저 같은 주부들이 주로 한다고 알려져 있는 쇼핑, 그것도 안 해요. 또 어딜 허우적대며 돌아다니지도 않아요. 그렇게 하고 난 뒤의 허전함을 알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자기 안으로 잦아드는 방법을 택하지요(존경의 염이 저절로 생김).”
그는 운보 김기창 화백을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낀 게 있단다. 예술가로서의 삶은 일정한 선이 있다는 것. 길게 갈 것 없다. 나이 들어서도 그 열정을 삭이지 못한 모습은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더욱 바쁘다. 대학시절 국전에 당선되었으면서도 그의 젊은날은 그림보다는 문화운동가로서 충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림에 입문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고 한다.
“화가로서 홍성담을 얘기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문화운동가로서의 삶이 워낙 치열해서인지 내가 정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 때도 있다니까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그의 자세는 언제나 겸손하지만 그림 자체는 기가 세다는 평을 듣는다. 실제 그의 비엔날레 작품 중 ‘봄’ 전시장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림을 보러온 어떤 스님이 그림의 기가 너무 세서 달래야 한다며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랬더니 아들 손주가 소원인 할머니, 두루 빌 것이 많은 아주머니들로 주위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사실 어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강한 기운이 뿜어 나오는 듯하다.
“하하… 어릴 적부터 동네 앞바다에서 드리는 풍어제나 씻김굿을 많이 보고 자란 탓일 거예요. 나도 모르게 그런 색감이나 분위기가 내 그림에 나타난 것이죠. 동양적인 샤머니즘이 내 그림의 주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죠.”
그의 지난 개인전 작품 중 문학에서 원형비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있다. 사람과 바다고기가 서로 꼬리를 물고 원형으로 돌고 있는 모습은 신화에서 재생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것이다. 물고문을 당하면서 고향 앞바다를 떠올렸다는 섬 소년. 그는 혹독한 세월을 거치며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고향의 푸른 바다에서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술가로서 내게 힘이 된 것은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섬에서 자랐다는 것, 또 하나는 고등학교 때 사서장학생으로 도서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때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여름방학 때는 운동장에서 책을 말리는 일을 했는데 그 넓은 운동장에 깔린 책이 전부 내 책이었죠. 공부는 별로 안 했어요, 게을러서. 원래 선생이 되고 싶었는데 예비고사 점수가 별로여서…. 하하하~. 게으른 사람들이 흔히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가 평생의 감동으로 꼽는 소설이 D.H.로렌스의 『차탈레 부인의 사랑』이다. 그는 평생 이 소설을 세 번 읽었다. 감옥에서도 읽고 새로운 감동을 받은 나머지 다른 재소자들에게 강권하기도 했다(물론 그들은 많은 오해를 했다고 한다). 최근 그가 주장하는 정음정양이론에 따르면, 이제껏 세상은 양의 세계에 의해 움직여왔지만, 앞으로는 음의 세계가 도래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흔을 옛날에 넘겼으면서도 악동 같은 미소를 곧잘 짓는다. ‘도청 앞 궐기대회’라는 그림에는 특히 장난기가 잘 나타나 있다. 시위대는 목청껏 외치고 있건만 구경꾼 아저씨의 손은 옆에 선 처녀의 엉덩이쪽으로 가고 있고, 자전거 위에 서서 목을 빼고 구경하던 이는 기우뚱 떨어져 엉덩이를 찧는다. 그걸 고소해하는 옆 친구, 등에 업힌 아이가 칭얼대건 말건 구경에 넋이 빠진 애기 엄마, 한몫 잡겠다고 판을 벌이고 앉은 걸인. 홍성담 씨에게 시민은 이런 것이다. 그럼 시민운동은 무엇인가? “시민운동은 목적과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죠. 기본적으로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거거든요. 80년대처럼 훈장 같은 교만으로는 더 이상 안 되죠. 우리는 그때 하늘을 가로지르는 화염병은 아름답다고 하면서 꽃밭의 꽃은 그냥 지나쳐 버렸잖아요. 이제 우리는 역사와 더불어 자기 심성을 반성해야 해요. 민중은 무지렁이 교화의 대상이 아니지요. 뭇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야 하고 정서적 상생관계를 이루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민운동도 이제 경영마인드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시민운동은 호혜시장이거든요. 자본주의 시장은 이해관계가 우선이지만 호혜시장은 손해를 보아도 재미있는 곳이죠.”
진압부대의 군홧발에 밟히고 찢어질 그림들을 밤새도록 그리면서 보낸 청춘의 나날들은 민중미술가란 이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고 시대가 어떻게 바뀌어도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를 것이다. ‘아, 홍성담, 민중미술가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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