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있는 영미에게
2007/2007년 01월 :
2007/01/01 00:00
내 친구 영미는 지금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캐나다인 남편과 알콩달콩 재미있는 신혼을 보내고 있다.
나와 이름도 비슷한 영미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대구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우리는 중학교를 따로 다니고 고등학교는 또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남학생들과 미팅도 하고 도서관 간다면서 롤러스케이트장에 놀러도 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냈다. 자취를 하던 나는 영미네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영미 어머니는 딸이 하나 더 있다고 늘 말씀하실 정도였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영미는 지루한 삼수 끝에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당시는 의대보다 공대가 더 인기가 있었고 원래 의대를 가기 싫어했던 영미는 공대를 선택했다. 1980년대의 신림동.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늘 최루가스 냄새와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몇몇의 죽음과 감옥, 가투……. 나와 영미는 신림동에서 함께 자취를 했다. 서울대와 연관이 없는 나지만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에 같이 살기로 했던 것이다.
영미는 가투를 나가는 날이 잦았다. 그런 날이면 피곤에 지쳐 늦게 들어오곤 했다. 나는 그 당시 학생운동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고향이 보수적인 대구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밖에 신문이 없는 줄 알고 자랐으니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나는 영미가 걱정스러웠다. 한밤중에 들어와선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한두 대씩 피우며 한숨을 쉬기도 했고, 두꺼운 책들을 밤새 줄을 그어가며 읽기도 했다. 궁금했지만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어떤 의미에선 조금 소외감도 느끼면서 몇 달이 흘러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영미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밤새 ‘운동’과 ‘사회’와 ‘의식’과 ‘꿈’에 대해서 토론을 하기도 했다. 가투에도 함께 참여하고 영미의 친구들도 알게 되었다. 영미가 처음에 그런 생각들을 내게 얘기하지 않은 이유를 결혼 후 생각해보니, 남편이 아내에게 걱정 끼칠까 봐 자신의 괴로움을 말하지 못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둘 중 한명이 남자였으면 둘이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상상까지 하면서 지냈으니 말이다.
나는 영미 덕에 ‘운동’이라는 말이 헬스클럽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학생운동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이 시민사회운동까지 이어진 것이다.
영미는 대학원을 마치고 외무고시 준비를 하다 진로를 바꿔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다. 영미의 어머니는 항상 딸을 믿어주셨고 무슨 일을 하든지 지지해 주셨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할까. 영미가 캐나다로 떠나던 날, 공항에서 그 강하신 어머니가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나도 울었지만 영미는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고 씩씩하게 혼자 떠나갔다. 그 때 내가 영미에게 준 책 한 권이 바로 ‘참여사회’다. 내 사진과 글이 실린 책을 보고 영미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남편에게 보여주고 자랑할거라면서.
참여사회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간 영미는 ‘내 안의 사람’이다.
나와 이름도 비슷한 영미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대구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우리는 중학교를 따로 다니고 고등학교는 또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남학생들과 미팅도 하고 도서관 간다면서 롤러스케이트장에 놀러도 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냈다. 자취를 하던 나는 영미네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영미 어머니는 딸이 하나 더 있다고 늘 말씀하실 정도였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영미는 지루한 삼수 끝에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당시는 의대보다 공대가 더 인기가 있었고 원래 의대를 가기 싫어했던 영미는 공대를 선택했다. 1980년대의 신림동.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늘 최루가스 냄새와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몇몇의 죽음과 감옥, 가투……. 나와 영미는 신림동에서 함께 자취를 했다. 서울대와 연관이 없는 나지만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에 같이 살기로 했던 것이다.
영미는 가투를 나가는 날이 잦았다. 그런 날이면 피곤에 지쳐 늦게 들어오곤 했다. 나는 그 당시 학생운동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고향이 보수적인 대구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밖에 신문이 없는 줄 알고 자랐으니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나는 영미가 걱정스러웠다. 한밤중에 들어와선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한두 대씩 피우며 한숨을 쉬기도 했고, 두꺼운 책들을 밤새 줄을 그어가며 읽기도 했다. 궁금했지만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어떤 의미에선 조금 소외감도 느끼면서 몇 달이 흘러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영미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밤새 ‘운동’과 ‘사회’와 ‘의식’과 ‘꿈’에 대해서 토론을 하기도 했다. 가투에도 함께 참여하고 영미의 친구들도 알게 되었다. 영미가 처음에 그런 생각들을 내게 얘기하지 않은 이유를 결혼 후 생각해보니, 남편이 아내에게 걱정 끼칠까 봐 자신의 괴로움을 말하지 못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둘 중 한명이 남자였으면 둘이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상상까지 하면서 지냈으니 말이다.
나는 영미 덕에 ‘운동’이라는 말이 헬스클럽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와 학생운동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이 시민사회운동까지 이어진 것이다.
영미는 대학원을 마치고 외무고시 준비를 하다 진로를 바꿔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다. 영미의 어머니는 항상 딸을 믿어주셨고 무슨 일을 하든지 지지해 주셨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할까. 영미가 캐나다로 떠나던 날, 공항에서 그 강하신 어머니가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나도 울었지만 영미는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고 씩씩하게 혼자 떠나갔다. 그 때 내가 영미에게 준 책 한 권이 바로 ‘참여사회’다. 내 사진과 글이 실린 책을 보고 영미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남편에게 보여주고 자랑할거라면서.
참여사회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간 영미는 ‘내 안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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