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에서 찾는 희망
2007/2007년 03월 :
2007/03/01 00:00
수술 천재인 장준혁의 능수능란한 손놀림을 통해 하얀거탑은 의학 드라마이면서 정치 드라마가 되고 때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휘어 잡아 균형 있게 째고 꿰매는 ‘솜씨 좋은’드라마다.
오늘날의 정치는 정치하는 계급과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가 협동하여 온갖 악의적인 텍스트로 점철된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대중과 멀어졌다. 일반적으로 정치 드라마라고 하면 으레 공화국을 쟁취하려는 선 굵은, 하지만 피곤한 인생의 남자들 이야기 뿐이다. 하지만 정치하는 것이 어디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던가? 게다가 정치하는 여자가 적다고 하여 남자는 정치, 여자는 수다쯤으로 비하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하얀거탑이 놀라운 이유는 일상의 정치를 발가벗겼다는 점이고, 반대로 악랄한 이유는 마초와 가부장적 전통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선과 악처럼 구도를 그려가는 장준혁과 최도영을 그대로 양분하기에는 너무 많은 변명이 우리 사회에 살아 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한 끝없는 교만과 자신감이 불러오는 추잡한 사변들을 용서할 수 없지만, 진정 장준혁의 가여운 인생과 배경도 용서할 수 없을까? 소신과 따뜻한 인간성으로 사람을 보살피는 최도영의 자세를 현실의 조직에 넣고 한없이 긍정할 수 있을까? 장준혁은 일그러져 있지만 버거운 세계에 잘 적응한 자로서 진골이며, 최도영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정의를 외치는 이상주의자 즉, 반골이다. 가슴에서 반골인 최도영을 응원하면서도 장준혁에 반해 버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 돌아 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준혁은 개개인이 현실에서 꿈꿔온 그야말로 거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치에 밝고, 말보다 몸이 먼저 아는 리더쉽,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 신념과 영혼을 내주고, 기꺼이 이용 당해야 하는 사회는 명백한 재앙이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패배주의 때문에 우리는 최도영을 고참으로 모실 수가 없다. 밥벌이는 숭고하지만, 밥 벌어오는 과정은 그렇지가 못한 현실은 그 자체로 공포다. 친절하게도 하얀거탑은 이러한 공포가 장준혁과 그의 남자들 즉 남성성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남성성의 광기가 불러온 이익관계 사회에서 이웃을 더 이상 구속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 인간관계로 복구하는 데는 평화와 공존과 같은 여성성이 희망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도영은 남성이지만 여성성의 상징이다.
하얀거탑은 시종일관 진중하게 무서운 사회를 그리고 있다. 정치를 하는 가부장적 집단에 여성이 진출하는 것이 사회적 여성성의 회복은 아니다. 장준혁의 파멸을 보면서 비겁한 냉소를 던지는 행위가 아닌, 그를 여성성의 사회로 끌어들여 보듬어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하안거탑은 무서운 사회에서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사회로의 귀환, 최도영을 고참으로 존경하고 기꺼이 모실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보자는 이면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정치는 정치하는 계급과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가 협동하여 온갖 악의적인 텍스트로 점철된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대중과 멀어졌다. 일반적으로 정치 드라마라고 하면 으레 공화국을 쟁취하려는 선 굵은, 하지만 피곤한 인생의 남자들 이야기 뿐이다. 하지만 정치하는 것이 어디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던가? 게다가 정치하는 여자가 적다고 하여 남자는 정치, 여자는 수다쯤으로 비하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하얀거탑이 놀라운 이유는 일상의 정치를 발가벗겼다는 점이고, 반대로 악랄한 이유는 마초와 가부장적 전통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선과 악처럼 구도를 그려가는 장준혁과 최도영을 그대로 양분하기에는 너무 많은 변명이 우리 사회에 살아 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한 끝없는 교만과 자신감이 불러오는 추잡한 사변들을 용서할 수 없지만, 진정 장준혁의 가여운 인생과 배경도 용서할 수 없을까? 소신과 따뜻한 인간성으로 사람을 보살피는 최도영의 자세를 현실의 조직에 넣고 한없이 긍정할 수 있을까? 장준혁은 일그러져 있지만 버거운 세계에 잘 적응한 자로서 진골이며, 최도영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정의를 외치는 이상주의자 즉, 반골이다. 가슴에서 반골인 최도영을 응원하면서도 장준혁에 반해 버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 돌아 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준혁은 개개인이 현실에서 꿈꿔온 그야말로 거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치에 밝고, 말보다 몸이 먼저 아는 리더쉽,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 신념과 영혼을 내주고, 기꺼이 이용 당해야 하는 사회는 명백한 재앙이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패배주의 때문에 우리는 최도영을 고참으로 모실 수가 없다. 밥벌이는 숭고하지만, 밥 벌어오는 과정은 그렇지가 못한 현실은 그 자체로 공포다. 친절하게도 하얀거탑은 이러한 공포가 장준혁과 그의 남자들 즉 남성성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남성성의 광기가 불러온 이익관계 사회에서 이웃을 더 이상 구속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 인간관계로 복구하는 데는 평화와 공존과 같은 여성성이 희망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최도영은 남성이지만 여성성의 상징이다.
하얀거탑은 시종일관 진중하게 무서운 사회를 그리고 있다. 정치를 하는 가부장적 집단에 여성이 진출하는 것이 사회적 여성성의 회복은 아니다. 장준혁의 파멸을 보면서 비겁한 냉소를 던지는 행위가 아닌, 그를 여성성의 사회로 끌어들여 보듬어 지키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하안거탑은 무서운 사회에서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사회로의 귀환, 최도영을 고참으로 존경하고 기꺼이 모실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보자는 이면의 희망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