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지금 당신 안방 한 가운데 앉아 있나요?"
2007/2007년 04월 :
2007/03/29 00:00
분홍색 립스틱의 저 여성은 지금 심기가 불편하다. 몇 달 만에 어렵게 성사된 소개팅에 나온 상대 남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왕 느끼’한 외모에 지루한 언변, 게다가 엉망인 매너까지. ‘폭탄요건 3종 세트’처럼 완벽하게 마음에 안 들었다. 더 불쾌한 것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고 밥에 차까지 마셔준 자신에 대해 감지덕지해야할 이 남자가 본인도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양 행동한 것. 그게 불쾌해서 그녀는 어쩔 줄 모르겠다. 그래서 그 화를 풀기 위해, 오늘 밤에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실 계획이다. 은빛 넥타이의 저 남성은 내일 애인과 영화를 보러갈 생각이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팔다리 잘려나가는 하드코어 스릴러를 보고 싶은데, 애인은 코미디에서 한발도 물러섬이 없다. 30분 째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애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뱀가죽 숄더백의 저 중년여성은 중학생 아들의 부족한 수학실력이 가장 큰 고민이다. 아들의 수학실력만 높일 수 있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수 있다. 실력 있는 과외선생을 찾느라 동분서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옆자리 남성은 처음 홈쇼핑을 이용했는데,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교환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상품 박스를 뜯은 상태라 홈쇼핑 측은 수용할 수 없다.

이들과 나는 무슨 관계이기에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을까? 친구? 친척? 이웃? 땡! 모두 아니다. 바로 오늘, 퇴근길에 만난 이들로, 10분 전쯤 사당방향 4호선 5번 칸을 같이 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위의 사실은 ‘대면 인터뷰를 통한 조사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직접 ‘발표’한 것이다. 바로 휴대폰 통화로.
레이첼 카슨은 환경오염으로 죽어버린 생태계를 ‘침묵’으로 비유했다. 살충제로 아예 사라져버린 곤충과 새들과 다른 동물들까지. 봄이 와도 꽃도 없고 새도 없는 죽음의 시간을 「침묵의 봄」이라 명명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와글와글 북적대는 이 소음은 ‘생명의 활기’일 텐데, 왜 이렇게 피곤한 것일까. ‘휴대폰’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지금 그들은 이 공간에 없는 저 멀리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다. 공간적으로 바로 곁에 있는 우리들은 완전한 타자로, 그냥 의미 없는 배경이다. 눈동자도 말소리도 앞에 앉은 나를 향해 있지만, 나는 그냥 통화 중 보이는 배경화면, 지하철 의자나 광고판과도 같은 존재일 뿐이다.
멀쩡한 사람이 이렇게 배경그림 취급을 받는게 짜증나고 피곤하다면 지나친 오버액션일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예 휴대폰 제작 기술이 더 발달해, 말소리를 흡입하는 수화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공청소기가 공기를 빨아 당기듯 말소리를 빨아 당기는 기능은 어떨까. 그런 휴대폰 옆이라면 마치 남의 집 안방에서 사생활을 훔쳐듣는 것과 같겠지. 불편함은 없지 않을까. 뭐, 과학기술 발전의 속도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상상도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그런 ‘부가 기능’을 만들기 위해 에너지는 얼마나 쏟아 부을 것이며, 그 기능이 추가된 휴대폰은 또 얼마나 비쌀 것인가. 그냥 돈도 에너지도 절약할 방법을 선택하자.
지하철을 타고 가는 시간동안 외롭거나 누군가와 애절하게 통화하고 싶어도 좀 참아보는 것이다. 통화욕구를 잠시 참는 고통으로 사망에 이르렀다는 얘긴 아직 듣지 못했다.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잠시 생각에 잠기는 일도 보기보다 재미있다. 은근히 중독성마저 있다. 휴대폰족들에게 이런 중독에 빠져보길 권한다.

이들과 나는 무슨 관계이기에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을까? 친구? 친척? 이웃? 땡! 모두 아니다. 바로 오늘, 퇴근길에 만난 이들로, 10분 전쯤 사당방향 4호선 5번 칸을 같이 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위의 사실은 ‘대면 인터뷰를 통한 조사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직접 ‘발표’한 것이다. 바로 휴대폰 통화로.
레이첼 카슨은 환경오염으로 죽어버린 생태계를 ‘침묵’으로 비유했다. 살충제로 아예 사라져버린 곤충과 새들과 다른 동물들까지. 봄이 와도 꽃도 없고 새도 없는 죽음의 시간을 「침묵의 봄」이라 명명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와글와글 북적대는 이 소음은 ‘생명의 활기’일 텐데, 왜 이렇게 피곤한 것일까. ‘휴대폰’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지금 그들은 이 공간에 없는 저 멀리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다. 공간적으로 바로 곁에 있는 우리들은 완전한 타자로, 그냥 의미 없는 배경이다. 눈동자도 말소리도 앞에 앉은 나를 향해 있지만, 나는 그냥 통화 중 보이는 배경화면, 지하철 의자나 광고판과도 같은 존재일 뿐이다.
멀쩡한 사람이 이렇게 배경그림 취급을 받는게 짜증나고 피곤하다면 지나친 오버액션일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아예 휴대폰 제작 기술이 더 발달해, 말소리를 흡입하는 수화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공청소기가 공기를 빨아 당기듯 말소리를 빨아 당기는 기능은 어떨까. 그런 휴대폰 옆이라면 마치 남의 집 안방에서 사생활을 훔쳐듣는 것과 같겠지. 불편함은 없지 않을까. 뭐, 과학기술 발전의 속도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상상도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그런 ‘부가 기능’을 만들기 위해 에너지는 얼마나 쏟아 부을 것이며, 그 기능이 추가된 휴대폰은 또 얼마나 비쌀 것인가. 그냥 돈도 에너지도 절약할 방법을 선택하자.
지하철을 타고 가는 시간동안 외롭거나 누군가와 애절하게 통화하고 싶어도 좀 참아보는 것이다. 통화욕구를 잠시 참는 고통으로 사망에 이르렀다는 얘긴 아직 듣지 못했다.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잠시 생각에 잠기는 일도 보기보다 재미있다. 은근히 중독성마저 있다. 휴대폰족들에게 이런 중독에 빠져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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