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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함부로 몸을 망가뜨리고 싶은 때를 마주하기도 한다. 시간은 5월을 향하고 있는데 봄은 오는 듯, 마는 듯. 대기는 스산하기만 하고 몸에는 찬 기운이 가시지 않는다. 허세욱 선생의 죽음 앞에서였다. 그는 모르면 알기 위해 노력했고 알고 나면 실천하려고 애쓰던 이였다. 얄팍한 급여봉투 때문에 변변한 외출복 하나 마련하지 못하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웃들의 김장 걱정을 함께 나누었으며, 뜻을 같이하는 단체 후원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게 내로라하는 학교 졸업장은 없었지만 부지런히 배움의 길에 나서 민중들의 삶과 가까운 문제에는 누구보다 박식하였다. 평소 말을 아끼던 그였지만, 그를 애타게 하는 사회 문제에 대해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시간이 모자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서 그는 한미FTA협상 타결을 앞두고 협상 결과를 자신과 다르게 낙관하는 정부와, 삶에 치여 한미FTA가 버겁기만 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위험성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택시 노동자가 FTA에 대해 뭘 알아서 분신을 했냐고 비난과 냉소를 앞세웠다. 노동자는 무식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무식한 노동자가 사회적 발언을 하는 건 주제넘은 짓이라고 비난하는 세상, 흉흉하다.

노동자는, 진짜 노동자는 어떤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마침 노동절 117주년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이번호의 주인공은 남상헌 씨(71), 현재 아산에서 원룸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꽤 많은 호칭을 갖고 있는데, 호칭을 좇다보면 그의 생애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몇 년 동안 마찌꼬바를 전전하다 들어간 제대로 된 첫 직장인 고려피혁 동료들에게 그는 ‘지부장’이었다. 1970년대 노동조합의 험난한 여정을 함께 했던 이들에게 그는 ‘회장님’이다. 75년 크리스챤아카데미 교육을 마친 후 교육생들과 함께 만든 모임인 노동사례연구회의 회장이었고, 70년대 노동운동을 했던 이들과 함께 70민노회(민주노동운동동지회)를 꾸려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길에 함께 서 있는 이들에게 그는 영원한 ‘지도위원’이다. 90년 전노협 상임지도위원을 맡은 이래 현재까지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다. 한편 민주노동당 사람들은 당대회 ‘의장님’으로 부른다. 그를 부르는 호칭은 이처럼 다양하지만, 그를 대하는 태도는 모두 한결같다. 한마디로 ‘존경’. 그에 대한 존경은 40년을 민주노조운동의 궤적을 따라 온 삶에 대한 존경이다. 그래서 말 많고 탈 많은 노동운동 판에서 그의 권위는 오롯하다.

노동자니까 노조 가입했지

그는 솜씨 좋은 기술자였다. 민종덕 전 청계피복노조 위원장은 “남상헌 선배가 연장을 들고 기계 앞에 서면 노동자로서 각이 제대로 나온다”고 추켜세운다. 손재주가 좋았냐고 묻자 그는 “안 하면 먹고 살기 힘드니까 자꾸 하게 되고, 하다 보니 되는 거죠.” 라고 답한다. 명문으로 꼽히는 서울중학교에 들어갔건만, 그는 병석의 아버지와 징집을 피할 도리가 없었던 장남을 대신해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다. 중학교 중퇴 이후 배지, 모표 등속을 만드는 작은 가내공장을 전전하기도 하고 미군들이 먹고 버린 깡통으로 남폿불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가 걸어온 신산스런 삶은 ‘돈 되는 일은 다 했다’는 한마디로 충분했다. 고려피혁은 그의 첫 직장이라고 할 만하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 그는 상당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사장이 “남형, 부탁해요” 할 정도였고, 임금협상도 직접 했다고 한다. 이렇게 회사의 인정과 신임을 받던 그가 노동조합 가입권유를 받아들인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르지만, 내가 노동자인 건 틀림없으니 노동조합에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극히 상식적인 설명 앞에 노조 가입률이 10%대에 불과한 현실이 머릿속을 스친다.

노조활동의 원천이 된 자신감과 소신

평조합원으로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는 회사 동료들에게 꽤 큰 신임을 받았던 모양이다. 노조 위원장을 맡게 된 이후 처음 맞닥뜨린 일은 보조금 문제. 난데없이 위원장을 맡은 터라 노조가 보조금을 받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그에게 회사가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통보해왔다. 부랴부랴 총회를 소집하고 회사 보조금으로 노조를 운영할 수는 없으니 조합비를 올리자고 조합원들을 설득, 만장일치의 찬성을 얻었다. 당시 대부분의 노조가 회사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분위기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노’자도 모르고 참여했었지만, 이상하게 틀림없이 모아지는 두 가지 생각이 있었어요. 하나는 회사의 영향력 하에 있는 노동조합은 하지 말자, 그 다음에 노동조합의 주인은 조합원이다. 그러니까 조합원들끼리 충분히 토론하도록 하고, 조합원들의 의사에 의해 운영되고, 결정되어야 노동조합이다. 그 두 가지는 내가 크리스챤아카데미 교육 받기 전부터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자주성을 지키고, 조합원 의견 존중하면서 노조활동을 하겠다는 그의 상식은 당시 노조 상층부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일으켜 별난 사람 취급까지 받게 했다.

그가 노조 활동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70년대. 강압적이고 반노동자적인 박정희 정권에서 자기 방식대로 노조 활동을 한다는 게 두렵지 않았을까?

“무서운 생각은 없었고, 그땐 아직 젊음이 있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비굴하게 타협하기 보다는 자기 능력을 믿고 있어 그런지 정 안되면 다른 곳에 가서도 그만큼 못하겠느냐 했는데, 노동조합을 그렇게 심하게 탄압하고 있는 줄은 몰랐고, 잘못된 자존심이지만 그런 생각과 젊음이 있었어요.”

그는 잘못된 자존심이라고 말했지만 자존심과 당당함도 그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의 고희기념문집에서 지인들도 그의 배짱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고 있다.

노동운동역사의 한 획을 그은 해고 노동자

회사 뒤에 경찰 정보과, 안기부 등이 버티고 있고, 긴급조치법 등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지는 상황 속에서 ‘당시로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점거 농성, 단식, 특근거부 등의 투쟁을 벌이며 노동자의 생존권과 노조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그의 활동은 80년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강제적으로 중단되었다. 이른바 신군부 정화 조치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나를 선출한 기관에서 사퇴하라면 몰라도 어디서 사퇴하라고 하느냐? 사퇴하라는 이유를 대라 하며 따졌는데, 나랑 알던 화학노조 사람이 ‘별이 세 개 이상이면 정화해고 당하는데 당신은 5개’라고 했어요. 별은 어디서 붙이냐 했더니 경찰, 안기부, 기무사, 검찰, 노동부에서 심사해서 붙인다고 하대요. 한 달 넘도록 사퇴 안 한다고 버텼는데 안 하면 잡아서 삼청교육대 보낸다고 하고 도피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서 그만두었지요. 회사에선 그걸 빌미로 해고하고.”

그는 해고당한 후 2년간 몹시 아팠다고 한다.

“그 때 병이 마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느꼈어요. 몸무게가 10kg 정도 빠지고 주변에서 모두 회생하기 힘든 암이라고 했지요.”

시골에 내려가 요양 겸 생계를 위해 염소를 키우고 새우젓 장사, 마늘 장사도 해보았으나 잘 되지 않아 힘들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다시 올라와 정화해고 된 원풍모방, YH등의 노동자들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만들고 복직투쟁도 하며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노협과 민주노총의 출범을 함께 맞이한다. 그의 삶은 한국노동운동역사 그 자체이건만, 그는 자신을 노동운동가로 부르는 것은 과분하다며 사양한다.

“일제치하에 태어나 군사독재시절 노동자로 살아가는 게 녹록치 않고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또 사치스러운 엄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못된 것에 대해 저항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렇지요. 자기 소신 때문에 몇 십 년씩 감옥에서 사는 사람들에 비해서도 그렇지요.”

그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노동자 남상헌으로 돌아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위원장님, 회장님, 이사님, 고문님 하며 받드는 마당에 경비를 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노조활동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고 또 해고됐고, 이걸로 어렵게 살아온 것을 보상할 순 없지만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 갚을 수도 있고.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는데 그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느 틈에 운동꾼이 되어 버렸다는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성찰적 고백처럼, 각성한 노동자가 되어서 운동꾼으로 살기는 쉬워도 진짜 노동자로 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어쩜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 초심을 유지하며 사는 것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는 요즘 세태에서는 희귀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아무려나 그는 “‘현장에 가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다.” 며 ‘일은 많았지만 인간적인 정이 넘치도록 많았던’ 고려피혁을 떠올린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이 아침에 출근해서 노조사무실 문 열고나서 현장 돌고, 힘들게 일하고 난 후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사람 사는 기분을 느끼고……. 외형적인 조건은 나아지지만, 잃고 가는 게 있구나 싶죠. 갈수록 빠른 속도로 나빠지지 않을까하는 생각. 무엇을 위한 발전이고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노동자로 살아온 것이 자랑스러워

그는 지난 해 칠순을 맞아 절들을 순례하며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졌던 모양이다. 바쁘게 쫓기며 살았지만 해놓은 것이 없어 아쉬움 많지만 그래서 앞으로 삶이 쓸모 있기를 고대한다.

“큰 집에 살고 큰 차를 타면서 꽤 행세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만일 내가 고생을 겪지 않고 자라서 노동자가 되지 않았다면 노동자의 삶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내가 노동자로 살지 않았다면 세상의 이치를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가능했을까? 힘들었지만 이렇게 노동자로 살아온 것이 참 자랑스러워요.”

묻지 못했지만 그가 깨달은 세상 이치란 그가 살아온 삶처럼 매우 상식적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의 당연한 인식을 굴절시키는 세상이다.

박영선 참여사회 편집위원
2007/05/01 00:00 2007/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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