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2007/2007년 05월 :
2007/05/01 00:00
매우 익숙하고 당연시 되는 일상적 삶의 영역 ‘가족’. 우리 안에 ‘가족은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구성원들의 집합’이라는 규정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규정은 한부모가정, 동성가정, 다문화가정, 비혼가정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가족을 ‘차별’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가족문화의 그늘을 돌아보고, ‘평등’과 ‘다양성’이 녹아나는 ‘가족들’의 공존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자. 편집자주
변화의 시대, 고리타분한 ‘가족’을 되돌아본다
한동안 유행처럼 등장하던 가족의 ‘위기’나 ‘해체’를 말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다양한’ 가족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는 듯하다. 말 많은 ‘다양한’ 가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다양한 답변이 가능할 것 같다. 물론 최근 들어 대안적 가족형태를 새롭게 고민하고 기획하는 시도들이 등장하면서 특정 형태의 움직임이나 목소리를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가족’에 대한 담론은 기존의 가족과 차별성을 전제하는 새로움만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오랫동안 이성애 중심의 정상 혈연가족과 갈등하는 가족단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가지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해 이성애 중심의 법적 제도에 근거하여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만이 정상화되었던 역사 속에서 주변화 되고 배제되었던 가족들이 현재 새롭게 제기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한국사회의 결혼이데올로기
몇 년 전부터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를 미완의 결핍상태로 인식하는 ‘미혼’이란 단어를 비판하고 ‘비혼’이란 새로운 단어들이 회자되었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비혼자들의 자기선언을 중심으로 하는 비혼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당당히 사회로부터 자기완결성을 지니는 주체’라는 의미를 스스로 혹은 사회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는 결혼을 계획하지 않거나 결혼을 계획한다 하더라도 아직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강제가 있었다. ‘노처녀, 노총각’이란 호칭을 통해 비혼자들의 일상을 침해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듯 여겨지고 어느 집의 누군가가 결혼을 하지 못하면 마치 그것은 그 집안의 문제인 듯 부각되었다. 그리고 비혼은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이러한 문제는 더욱 극명해진다. 사회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불안하거나 부족한 존재로 인식되는 동시에 ‘임자 없는 상태’로 인식되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하를 용인하기도 한다. 이혼의 경우에도 이러한 문제는 반복된다. 이혼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희화화는 ‘주인 없는 대상’, ‘침범 가능한 대상’이란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결혼이데올로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여성차별과 혼재되었을 때 남성에 비해 여성의 경우, 결혼의 사회적 무게는 더욱 깊어진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근대 산업사회 이후 중산층 중심의 법적으로 인정받은 부부와 혈연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중심적 가족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산층 중심의 가족모델은 대개 1인 생계부양자와 1인 가사전담자 형태를 띠고 있다. 일하는 아빠와 가족을 돌보는 엄마, 그들의 혈연관계에 의거한 자녀라는 도식은 그 밖의 다양한 가족의 관계성을 배제시킨다. 따라서 전형적 중산층 가족모델과 달리 다수의 취업원을 바탕으로 하는 가족은 사회의 가족인식에 있어서 주변화 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또한 법적으로 혼인을 인정받은 부부 중심의 가족모델이 아닌 등록되지 못하거나 등록하지 않은 동거가족이나 비혼, 이혼 등의 과정을 통한 한부모가족을 비정상화한다. 정상가족이데올로기는 수많은 가족들의 모습을 ‘그 밖의 가족들’이거나 ‘예외적인 가족들’로 유형화시킨다. 이러한 예는 가족기반에 근거한 여러 사회제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동거가족의 경우, 건강보험 상의 부양자 등록이 불가능하며 사보험 제도에서의 수혜자 지정을 할 수 없고 가족수당 등 사회제도상의 미등록 여부로 인해 혜택을 인정받기 어렵다. 이는 혼인이 아닌 동거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가족 내 다수의 취업원을 두고 있는 가족의 경우와 한부모가족의 경우, 중산층적 가족모델-즉, 전업주부의 존재-을 기반으로 한 교육현장과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전업주부가 없는 가족의 경우, 정기적으로 학교에 자녀들의 급식도우미로 불려가거나 전업주부 중심의 학부모회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워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다. 결국 부모들은 자녀돌보기에 소홀한 무책임한 부모의 오명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한부모가족의 경우 가정환경조사서를 통해 자녀의 환경이 불완전한 환경으로 인식되면서 학교 내에서 동정의 대상되기도 하며, 정상가족을 근거로 한 가족신문만들기 같은 과제로 인해 쉽게 한부모가족의 자녀들이 곤혹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외에 성애적 관계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의 경우도 사회적으로 정상가족의 성애적 관계기반이나 경제공동체성의 개념으로 인해 가족형태로 인정받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성애적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 다양한 가족의 예로는 장애인의 독립생활을 목표로 구성된 장애인 가족, 혹은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가족들이 포함될 수 있다.
이렇게 소위 정상가족으로 불리는 가족 중심의 제도나 교육현장으로 인해 그렇지 않은 당당한 가족들을 끊임없이 구분해내는 동시에 문제적 환경으로 낙인찍는 등의 사회적 인식이 문제가 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와 구성으로 점차 증가하고 있는 공동체나 친밀한 관계성이 가족의 범주로 인정받지 못하고 제도상의 보호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성애 중심주의
결혼과 정상가족에 대한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가족의 구성을 법적, 제도적, 사회적으로 이성애 중심성에 두고 있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동성애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시민권의 한 부분인 가족구성권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적 현실은 가족구성의 권리를 단지 이성애자들에 한하여 개방하는 불평등의 오류를 낳는다. 물론 동성애 가족을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방안과 더불어 동성애 가족을 지지해줄 수 있는 사회적 기반과 인식을 마련하는 것 역시 강구되어야 할 것이지만 현실적인 가족제도의 이성애 중심성의 한계점 역시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동성커플 중 한 명이 아플 때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하며 파트너가 사망한 경우 유산상속을 받을 수 없고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상의 불이익-국민연금, 건강보험, 세금면제 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가족의 여부와는 달리 제도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해 서구사회에서는 동성혼의 인정이나 동반자 관계1) 인정제도를 통해 제도상의 미비점을 보호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
‘다양한 가족들’은 왜 목소리를 높이려하는가
이성애 중심의 정상혈연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가족들은 생각해보면, 늘 존재했었다. 그러나 변화의 지점은 이제 ‘다양한 가족들’, ‘그 밖의 가족들’의 목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근래에 들어 이러한 ‘다양한 가족들’에 대한 담론이 증가할까?
이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이 학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를 설명하는 논의 가운데 한 가지는 노동현실세계의 변화에 주목한다. 유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지속적인 자본주의 체계의 불황주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대안으로 노동의 세계의 불안정성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조망 불가능한 노동자들의 위치의 냉엄한 현실을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 친밀성의 세계를 통해 위로받는다고 보았다. 결국 애정과 친밀성의 세계를 통해 노동세계의 변화지점은 상쇄되는 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가족의 가치, 사적영역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족을 둘러싸고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개인들의 변화를 설명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족의 사적영역의 가치는 전통적인 세계에서 받아들여졌던 시기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전 세계에서 제도상의 결혼을 당연시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순차적으로 강요된 사회의 질서 속에서 사고하였다면 이제는 누구와 살 것인가, 제도상의 결혼을 선택할 것인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등을 매번 고민하고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위가 아닌 친밀성의 공간으로 의미화 되고 있는 가족은 더 이상 정상화된 이데올로기적 지표에 맞춰지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가족은 이제 무엇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비혼을 고민하여 결혼과 양육을 선택함에 있어 무엇보다 신중함이 요구된다.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서 가족은 더 이상 젠더(성별)의 문제로 환원되는 공간이 아니라 개인에게서의 친밀성의 공간, 즉 섹슈얼리티의 공간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변화된 가족구성권을 위해
우리에게 있어 가족은 이제 ‘되어야(이루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으로 전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족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홀로 혹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다양한 실험의 무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이상적인 가족상에 맞추어 자신을 재단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오히려 개인 스스로가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의 시각 교정을 요구한다. 닫혀진 가족의 문을 열어 개인의 가족구성권을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이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가족들에 대한 다양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에서 벗어나 개인의 다양한 가족구성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전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가족문화의 그늘을 돌아보고, ‘평등’과 ‘다양성’이 녹아나는 ‘가족들’의 공존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자. 편집자주
변화의 시대, 고리타분한 ‘가족’을 되돌아본다
한동안 유행처럼 등장하던 가족의 ‘위기’나 ‘해체’를 말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다양한’ 가족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는 듯하다. 말 많은 ‘다양한’ 가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다양한 답변이 가능할 것 같다. 물론 최근 들어 대안적 가족형태를 새롭게 고민하고 기획하는 시도들이 등장하면서 특정 형태의 움직임이나 목소리를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가족’에 대한 담론은 기존의 가족과 차별성을 전제하는 새로움만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오랫동안 이성애 중심의 정상 혈연가족과 갈등하는 가족단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가지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쉽게 말해 이성애 중심의 법적 제도에 근거하여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만이 정상화되었던 역사 속에서 주변화 되고 배제되었던 가족들이 현재 새롭게 제기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한국사회의 결혼이데올로기
몇 년 전부터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를 미완의 결핍상태로 인식하는 ‘미혼’이란 단어를 비판하고 ‘비혼’이란 새로운 단어들이 회자되었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비혼자들의 자기선언을 중심으로 하는 비혼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당당히 사회로부터 자기완결성을 지니는 주체’라는 의미를 스스로 혹은 사회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는 결혼을 계획하지 않거나 결혼을 계획한다 하더라도 아직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강제가 있었다. ‘노처녀, 노총각’이란 호칭을 통해 비혼자들의 일상을 침해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듯 여겨지고 어느 집의 누군가가 결혼을 하지 못하면 마치 그것은 그 집안의 문제인 듯 부각되었다. 그리고 비혼은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이러한 문제는 더욱 극명해진다. 사회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불안하거나 부족한 존재로 인식되는 동시에 ‘임자 없는 상태’로 인식되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하를 용인하기도 한다. 이혼의 경우에도 이러한 문제는 반복된다. 이혼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희화화는 ‘주인 없는 대상’, ‘침범 가능한 대상’이란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결혼이데올로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여성차별과 혼재되었을 때 남성에 비해 여성의 경우, 결혼의 사회적 무게는 더욱 깊어진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근대 산업사회 이후 중산층 중심의 법적으로 인정받은 부부와 혈연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중심적 가족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산층 중심의 가족모델은 대개 1인 생계부양자와 1인 가사전담자 형태를 띠고 있다. 일하는 아빠와 가족을 돌보는 엄마, 그들의 혈연관계에 의거한 자녀라는 도식은 그 밖의 다양한 가족의 관계성을 배제시킨다. 따라서 전형적 중산층 가족모델과 달리 다수의 취업원을 바탕으로 하는 가족은 사회의 가족인식에 있어서 주변화 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또한 법적으로 혼인을 인정받은 부부 중심의 가족모델이 아닌 등록되지 못하거나 등록하지 않은 동거가족이나 비혼, 이혼 등의 과정을 통한 한부모가족을 비정상화한다. 정상가족이데올로기는 수많은 가족들의 모습을 ‘그 밖의 가족들’이거나 ‘예외적인 가족들’로 유형화시킨다. 이러한 예는 가족기반에 근거한 여러 사회제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동거가족의 경우, 건강보험 상의 부양자 등록이 불가능하며 사보험 제도에서의 수혜자 지정을 할 수 없고 가족수당 등 사회제도상의 미등록 여부로 인해 혜택을 인정받기 어렵다. 이는 혼인이 아닌 동거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가족 내 다수의 취업원을 두고 있는 가족의 경우와 한부모가족의 경우, 중산층적 가족모델-즉, 전업주부의 존재-을 기반으로 한 교육현장과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전업주부가 없는 가족의 경우, 정기적으로 학교에 자녀들의 급식도우미로 불려가거나 전업주부 중심의 학부모회 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워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다. 결국 부모들은 자녀돌보기에 소홀한 무책임한 부모의 오명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한부모가족의 경우 가정환경조사서를 통해 자녀의 환경이 불완전한 환경으로 인식되면서 학교 내에서 동정의 대상되기도 하며, 정상가족을 근거로 한 가족신문만들기 같은 과제로 인해 쉽게 한부모가족의 자녀들이 곤혹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외에 성애적 관계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의 경우도 사회적으로 정상가족의 성애적 관계기반이나 경제공동체성의 개념으로 인해 가족형태로 인정받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성애적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 다양한 가족의 예로는 장애인의 독립생활을 목표로 구성된 장애인 가족, 혹은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가족들이 포함될 수 있다.
이렇게 소위 정상가족으로 불리는 가족 중심의 제도나 교육현장으로 인해 그렇지 않은 당당한 가족들을 끊임없이 구분해내는 동시에 문제적 환경으로 낙인찍는 등의 사회적 인식이 문제가 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와 구성으로 점차 증가하고 있는 공동체나 친밀한 관계성이 가족의 범주로 인정받지 못하고 제도상의 보호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성애 중심주의
결혼과 정상가족에 대한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가족의 구성을 법적, 제도적, 사회적으로 이성애 중심성에 두고 있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동성애자들에게는 기본적인 시민권의 한 부분인 가족구성권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적 현실은 가족구성의 권리를 단지 이성애자들에 한하여 개방하는 불평등의 오류를 낳는다. 물론 동성애 가족을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방안과 더불어 동성애 가족을 지지해줄 수 있는 사회적 기반과 인식을 마련하는 것 역시 강구되어야 할 것이지만 현실적인 가족제도의 이성애 중심성의 한계점 역시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동성커플 중 한 명이 아플 때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하며 파트너가 사망한 경우 유산상속을 받을 수 없고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상의 불이익-국민연금, 건강보험, 세금면제 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가족의 여부와는 달리 제도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에 대해 서구사회에서는 동성혼의 인정이나 동반자 관계1) 인정제도를 통해 제도상의 미비점을 보호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
‘다양한 가족들’은 왜 목소리를 높이려하는가
이성애 중심의 정상혈연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가족들은 생각해보면, 늘 존재했었다. 그러나 변화의 지점은 이제 ‘다양한 가족들’, ‘그 밖의 가족들’의 목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근래에 들어 이러한 ‘다양한 가족들’에 대한 담론이 증가할까?
이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이 학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를 설명하는 논의 가운데 한 가지는 노동현실세계의 변화에 주목한다. 유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지속적인 자본주의 체계의 불황주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대안으로 노동의 세계의 불안정성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조망 불가능한 노동자들의 위치의 냉엄한 현실을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 친밀성의 세계를 통해 위로받는다고 보았다. 결국 애정과 친밀성의 세계를 통해 노동세계의 변화지점은 상쇄되는 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가족의 가치, 사적영역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족을 둘러싸고 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개인들의 변화를 설명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족의 사적영역의 가치는 전통적인 세계에서 받아들여졌던 시기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전 세계에서 제도상의 결혼을 당연시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순차적으로 강요된 사회의 질서 속에서 사고하였다면 이제는 누구와 살 것인가, 제도상의 결혼을 선택할 것인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등을 매번 고민하고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위가 아닌 친밀성의 공간으로 의미화 되고 있는 가족은 더 이상 정상화된 이데올로기적 지표에 맞춰지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가족은 이제 무엇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비혼을 고민하여 결혼과 양육을 선택함에 있어 무엇보다 신중함이 요구된다.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서 가족은 더 이상 젠더(성별)의 문제로 환원되는 공간이 아니라 개인에게서의 친밀성의 공간, 즉 섹슈얼리티의 공간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변화된 가족구성권을 위해
우리에게 있어 가족은 이제 ‘되어야(이루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것’으로 전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족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홀로 혹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다양한 실험의 무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이상적인 가족상에 맞추어 자신을 재단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오히려 개인 스스로가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의 시각 교정을 요구한다. 닫혀진 가족의 문을 열어 개인의 가족구성권을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이는 그동안 간과되었던 가족들에 대한 다양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에서 벗어나 개인의 다양한 가족구성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전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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