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를 비누라 부를 수 없는 설움
2007/2007년 05월 :
2007/05/01 00:00
“그건 샴푸!”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움찍 놀라며 그녀는 손을 움츠린다. 그 모습이 더 화를 돋워, 나는 더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게 목욕비누고 이게 샴푸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기억할건데!”
이번 달엔 우리집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 엄마는 나이 60이 넘어서야 수영장을 발견했다. 운동은 필요한데 무릎이 좋지 않아 선택이 어려웠다. 나는 수영을 강력히 권했으나 그녀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수영강습 등록을 거부했다. 이 몸매에 어떻게 수영복을 입느냐는 둥, 수영장 물에서 나는 소독 냄새 때문에 두통이 가시지 않을 것이라는 둥, 여름에는 더워서 운동이 힘들고 겨울에는 추워서 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둥, 온갖 핑계거리를 일 년이나 듣고서야 둔하디 둔한 나는 진짜 이유를 알아차렸다.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이유였다. 함께 수영을 다니자고 묻자, 그녀는 두말 하지 않고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지난달부터 구민체육관에서 1주일에 3일씩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
평균 한 달이면 자유형을 한다는데, 그녀도 나도 강사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더디다. 그녀는 아직 유아풀에서 연습 중이고 나도 엇비슷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우 즐겁다. 자유형이 되고 안 되고는 문제도 아니다.
“이 나이에 수영복을 입게 될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니.” 라는 말로 그녀는 행복을 표현한다. 그 따뜻한 파장에 나도 덩달아 행복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샴푸와 비누를 구분하지 않는 그녀의 부적절한 샤워 행태가 발단이었다.
1주차, 나는 매우 친절했다.
“이건 샴푸, 목욕비누는 이거.”, “그건 린스잖아요. 이게 치약.” “아니지. 이건 폼클렌징.”
2주차에는 특강이 진행됐다.
“잘 보세요. 이건 샴푸, 이건 목욕비누…….”
그럼에도 3주가 지나도록 변화가 없자 결국 나는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기억이 안 나면 통에 쓰여 있는 거라도 읽어야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나는 비누통들의 라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런 젠장. 그녀가 못 읽었던 게 당연했다. 전면을 채운 글자는 ㄱㄴㄷ이 아닌 a b c로 시작하는 알파벳이었다. 샴푸도 린스도 그리고 목욕비누도 예외가 없었다. 한글이 적힌 것은 ‘치약’이 유일했다. 그 한글은 젊은 나도 통을 눈앞까지 치켜들어야 보일까한 작은 크기로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샴푸와 비누 구분을 알려주는 일에서도 겨우 한 달 분 인내심조차 안 되는 부끄러움은 제조사에 대한 분통으로 번져갔다.
저출산 고령화가 몇 해 전부터 사회문제다. 특히 올해는 연초부터 노인인구가 전체인구의 몇%니 하면서 온 사회가 난리를 떨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게 노인 비율이 증가했다면 소비품목도 그들에 맞게 나오는 게 당연하다. 거의 같은 내용물에 뚜껑 디자인만 바꿔 값을 올리는 상술은 얼마나 많은가. 그 다양한 변화 중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도 없다.
눈이 나쁜 이들을 위한 큰 글자가 붙은 비누통, 우리네 부모님처럼 영어가 낮선 세대를 위해 바디나 폼클렌징이 아닌 몸비누나 얼굴비누라고 쓴 통, 글자를 못 읽는 이들을 위해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표현하는 방식. 꼭 샴푸라고 쓸게 아니라 뽀글뽀글한 비눗방울을 가득 머리에 묻힌 그림은 어떤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라벨이 붙은 비누통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디자인도 사람이 먼저다. 지금 방식을 고수하고 싶다면, 한 제품에 대상층을 달리해 여러 종류의 통을 만들면 된다.
내가 늙어가는 것도 서글프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노쇠해짐을 보는 것은 더 슬프다. 나는 길에서 마주치면 부모님을 잘 못 알아본다. 머릿속 그들과 현실의 모습은 간극이 너무 크다. 내 부모는 예외일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믿음은 일상 곳곳에서 당혹스럽게 깨져나간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 비누와 샴푸를 골라 쓰는 일 정도로 그들의 늙어감을 실감해야할까. 슈퍼마켓에서 알파벳을 모르고도 굳이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고도 신나게 쇼핑하고, 샤워를 하면서도 자신 있게 손을 뻗어 샴푸와 목욕비누를 고를 수 있는 즐거움, 우리집 그녀를 비롯해 비누를 비누라 부르기 곤란했던 모든 이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다. 제조사들이 하루빨리 ‘사회적으로 올바른’ 라벨과 통에 담긴 비누제품을 생산해내길 촉구한다.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움찍 놀라며 그녀는 손을 움츠린다. 그 모습이 더 화를 돋워, 나는 더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게 목욕비누고 이게 샴푸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기억할건데!”
이번 달엔 우리집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 엄마는 나이 60이 넘어서야 수영장을 발견했다. 운동은 필요한데 무릎이 좋지 않아 선택이 어려웠다. 나는 수영을 강력히 권했으나 그녀는 갖가지 이유를 들어 수영강습 등록을 거부했다. 이 몸매에 어떻게 수영복을 입느냐는 둥, 수영장 물에서 나는 소독 냄새 때문에 두통이 가시지 않을 것이라는 둥, 여름에는 더워서 운동이 힘들고 겨울에는 추워서 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둥, 온갖 핑계거리를 일 년이나 듣고서야 둔하디 둔한 나는 진짜 이유를 알아차렸다.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이유였다. 함께 수영을 다니자고 묻자, 그녀는 두말 하지 않고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지난달부터 구민체육관에서 1주일에 3일씩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
평균 한 달이면 자유형을 한다는데, 그녀도 나도 강사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더디다. 그녀는 아직 유아풀에서 연습 중이고 나도 엇비슷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우 즐겁다. 자유형이 되고 안 되고는 문제도 아니다.
“이 나이에 수영복을 입게 될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니.” 라는 말로 그녀는 행복을 표현한다. 그 따뜻한 파장에 나도 덩달아 행복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샴푸와 비누를 구분하지 않는 그녀의 부적절한 샤워 행태가 발단이었다.
1주차, 나는 매우 친절했다.
“이건 샴푸, 목욕비누는 이거.”, “그건 린스잖아요. 이게 치약.” “아니지. 이건 폼클렌징.”
2주차에는 특강이 진행됐다.
“잘 보세요. 이건 샴푸, 이건 목욕비누…….”
그럼에도 3주가 지나도록 변화가 없자 결국 나는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기억이 안 나면 통에 쓰여 있는 거라도 읽어야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나는 비누통들의 라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런 젠장. 그녀가 못 읽었던 게 당연했다. 전면을 채운 글자는 ㄱㄴㄷ이 아닌 a b c로 시작하는 알파벳이었다. 샴푸도 린스도 그리고 목욕비누도 예외가 없었다. 한글이 적힌 것은 ‘치약’이 유일했다. 그 한글은 젊은 나도 통을 눈앞까지 치켜들어야 보일까한 작은 크기로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샴푸와 비누 구분을 알려주는 일에서도 겨우 한 달 분 인내심조차 안 되는 부끄러움은 제조사에 대한 분통으로 번져갔다.
저출산 고령화가 몇 해 전부터 사회문제다. 특히 올해는 연초부터 노인인구가 전체인구의 몇%니 하면서 온 사회가 난리를 떨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렇게 노인 비율이 증가했다면 소비품목도 그들에 맞게 나오는 게 당연하다. 거의 같은 내용물에 뚜껑 디자인만 바꿔 값을 올리는 상술은 얼마나 많은가. 그 다양한 변화 중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도 없다.
눈이 나쁜 이들을 위한 큰 글자가 붙은 비누통, 우리네 부모님처럼 영어가 낮선 세대를 위해 바디나 폼클렌징이 아닌 몸비누나 얼굴비누라고 쓴 통, 글자를 못 읽는 이들을 위해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표현하는 방식. 꼭 샴푸라고 쓸게 아니라 뽀글뽀글한 비눗방울을 가득 머리에 묻힌 그림은 어떤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라벨이 붙은 비누통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디자인도 사람이 먼저다. 지금 방식을 고수하고 싶다면, 한 제품에 대상층을 달리해 여러 종류의 통을 만들면 된다.
내가 늙어가는 것도 서글프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노쇠해짐을 보는 것은 더 슬프다. 나는 길에서 마주치면 부모님을 잘 못 알아본다. 머릿속 그들과 현실의 모습은 간극이 너무 크다. 내 부모는 예외일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믿음은 일상 곳곳에서 당혹스럽게 깨져나간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 비누와 샴푸를 골라 쓰는 일 정도로 그들의 늙어감을 실감해야할까. 슈퍼마켓에서 알파벳을 모르고도 굳이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고도 신나게 쇼핑하고, 샤워를 하면서도 자신 있게 손을 뻗어 샴푸와 목욕비누를 고를 수 있는 즐거움, 우리집 그녀를 비롯해 비누를 비누라 부르기 곤란했던 모든 이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다. 제조사들이 하루빨리 ‘사회적으로 올바른’ 라벨과 통에 담긴 비누제품을 생산해내길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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