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유기체의 생존을 위해 있는 것이다. 신경계에 주어지는 자극들이 위험한 상황을 유발할 수 있는 징후로 지각될 때, 불안은 일종의 경보장치로서 작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적절한 긴장은 삶에 필수적 요소이다. 실패를 나무랄 때, 우리들이 흔히 정신력을 탓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사회 또한 마찬가지여서 적절한 불안을 유지할 수 없는 국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긴장과 불안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인간은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정서를 경험하게 될 뿐 아니라 생명체에 유해한 변화들이 몸에서 일어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짜인 시스템이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고 삼켜버리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같은 해석이 국가에도 적용된다. 집단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이 사회구성원들을 압도하게 된다면, 파이는 커질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국가는 인민들에게 독이 든 파이를 먹이게 되는 것이다.

불안의 정신의학적 이해와 한계

불안을 초래하는 원인들은 무수히 많다. 정신의학은 편의상 그 원인들을 생물학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으로 대별한다. 생물학적 문제는 육체의 기계적 고장으로 유발된 불안을 말한다. 즉, 사고와 감정에 관련된 신경세포군의 기능장애를 말하며 정신분열병과 심한 우울증의 대부분, 불안장애의 일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이 경험하는 불안은 그들이 놓여있는 현실상황과 분명한 인과관계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심리적 원인에 의한 불안은 그 인과 관계가 비교적 쉽게 추적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어디까지나 편의상 분류일 뿐이다. 도식적 이해가 때로는 인간이해를 가로막는 심각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불안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신경증으로 공황장애라는 병이 있다. 천재지변이나 사고 등과 같은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생리적 반응들을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질환이다. 공공장소에서 갑자기 불안발작이 일어나는 사회공포증에서 많이 동반된다. 이들은 죽을 것만 같은 극심한 불안, 흉부 압박감, 심장 두근거림, 어지럼증 등과 같은 증상들을 예고도 없이 갑자기 겪게 된다.

공황장애를 설명하기 위한 많은 이론들이 있다. 정신의학자들은 공황장애가 어떤 경로를 통해 발생하였건, 궁극적으로는 중추신경계에서 말초로 내리는 신호체계의 오작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의학적 모델에서 본다면 타당한 결론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아직 공황장애는 잘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공황장애의 원인론이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 공황장애 환자들은 장기간 약물 치료를 해야만 하는 임상경과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약물치료에 의해 완치된다는 뚜렷한 증거들은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혹시 현대 정신의학이 수많은 사연들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스러운 불안 증상들을 ‘공황장애’라는 과학용어에 일방적으로 우겨넣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푸코의 지적대로 정신의학은 ‘알고 결정하는 의학적 시선’, ‘지배하려는 시선’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고민스럽다. 사회적 차원이 배려되지 않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임상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적어도 30대 중반 이후 발생하는 공황장애는 스트레스 또는 과로와 분명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과도한 육체적 노동도 포함이 된다.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이 노동을 심하게 하여도 공황장애가 올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다. 힘에 부치는 육체적 노동을 하자면, 정신력을 배가해야 하는 것이고 정신력을 올린다는 말은 긴장 수준을 높인다는 말이니 당연히 불안발작이 올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공황장애 환자들에게 “쉬어라”는 의학적 충고를 하게 된다. “과로의 기준이 너무 높으니 좀 낮추어라”는 조언도 한다. 환자들도 실제 쉬어보면 좋아지는 것을 몸소 경험한다. 문제는 그들이 계속해서 쉴 수 없다는 현실에 있다. 잠시 숨을 돌리게 되면,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그것이 공황장애의 진짜 범인이다. 느린 사회에서는 이런 식의 불안발작은 발생하지 않는다. 꽉 짜여 있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사회는 개인차를 인정하지 않는다. 주체는 사라지고 모든 인간들이 표준화 되고 균질화 되어버린 사회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을 강요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폭력은 차이가 사라진 곳에서 발생한다는 지라르의 지적은 적절하다.

불안요소로 가득한 한국사회

오늘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웰빙 붐은 현대인들의 몸과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시대의 유행이 한국사회에 상륙하는 순간, 그 위력은 엄청나게 증폭된다는 사실. 웰빙 붐도 예외가 아니다. 평안하고 안녕한 사회가 심신의 행복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산업화 이후 한국사회는 긴장이 일상화 되어 있다. 우리 사회가 불안에 얼마나 잠식되어 있는지는 번창 일로에 있는 불안 관련 산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회가 투명하게 돌아가고 미래가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한 사회는 점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복지정책의 부재를 발판으로 도약하고 있는 보험회사들, 전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엄청난 음주량과 변함없이 국세 수입을 든든히 보장해주는 담배 소비량 등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 모든 것들은 우리사회가 불안에 얼마나 찌들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그 많은 십자가들이 우리사회가 종교적 인간들이 넘쳐나는 평안한 사회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도리어 교회의 융성은 우리 사회의 불안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리라.

한국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불안은 물질적 궁핍에 그 주요 원인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가난을 벗어보자는 경제개발의 목표는 이미 달성한지 오래 되었고 비록 수치상이기는 하나 대한민국은 이제 경제대국이다. 처음 산업화를 추진하던 정치집단이 내세운 로드맵에 의하면, 이 땅은 행복한 사람들로 넘쳐나야 한다. 그리고 돈 문제 때문에 정신과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소수이어어할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아니다. 아직도 정신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받는 스트레스는 경제적인 것이다. 국부는 엄청난 양적 팽창을 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고통스럽다. 양이 절대적으로 늘어났음에도 사람들의 삶에 질적 변화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분배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데 경제 성장을 거듭하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것은 과거와는 달리 많은 어려움들이 돈만으로 해결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기회 균등의 본이 되어야 할 이세 교육은 학습기술의 상품화로 판도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이제는 학업 성취도가 타고난 자질과 성실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상품의 구매력에 좌우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처럼 돈의 위력은 점점 커지고 있고 커진 자본의 위력은 빈부 격차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어버렸다. 상류 계층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신분을 굳히려 하고 있다.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 능력이 되지 않지만, 괜히 불안해져 다른 사람들도 같이 뛰기 시작한다. 써야할 곳이 많아졌으니 돈에 쪼들릴 수밖에.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법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경쟁적이 되어버렸다. 그 비정상성은 다양한 병리적 현상을 낳고있다. 요즈음 청소년들이 과거와 뚜렷이 차별되는 것이 있는데 훌륭한 학업성적이 곧 성숙한 인격을 보장한다는 공식은 이제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마스터 해야할 다양한 발달 과제들을 외면하고 오로지 대학시험을 위해서 사는 인생들만이 상위권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나라를 이끌어가게 될 것이다. 후손들이 살아가게 될 사회가 걱정되는 대목이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무한경쟁으로 몰고 있는가? 즉, 한국사회의 속도를 조절하는 페이스 메이커는 어떤 사람들인가? 아쉽게도 우리 사회에는 건강한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하는 집단이 사라져버렸다. 앞뒤를 살피면서 조용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을 오늘 대한민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분위기 잡고 바람 잡는 사람들만 판을 친다. 최근 20년 내지 30년 동안 벌어진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누가 득세하였던가? 유감스럽게도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보다는 좌충우돌 호들갑스러운 사람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상은 변화되어 왔다.

선행학습이 학업성취도와 무관하다는 연구 결과를 사람들은 이제 믿지 않는다. 온갖 비난을 받아 가면서도, 극성을 떠는 부류들이 결국 자식 교육에 성공하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바에야 공자님 말씀 같은 그 말을 누가 받아들이겠나. 경제적인 문제도 마찬가지. 집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만 바보가 되었다. 온갖 편법을 써가면서 아파트를 사고 판 사람들이 결국 경제적 우위를 점하게 되더라. 세월이 지나니까 그러한 편법은 재태크라는 우아한 용어로 바뀌어, 늘 써왔던 말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점잖게 굴면 점점 뒤로 쳐지게 되는 사회. 그래서 우리들은 불안하다. 한 사람이 뛰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우르르 달려가야 하는 사회. 우리들은 몹시 피곤하다.

속도 좀 줄입시다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노인들을 보면, 끔찍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들의 70대도 저렇게 젊음을 부러워하면서 살아야 할까? 죽음을 앞둔 나이에 이르러서는 죽음을 생각해야하고 삶을 돌아보아야 할 시간에는 삶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한국 사회는 온통 속도감에 중독되어있다. 누군가 나서서 이 사회가 숨을 고르도록 해야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계속 달릴 수는 없는 것이다. 조용히 걸어도, 그리고 앉아서 쉬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조중근 정신과 전문의
2007/08/16 19:49 2007/08/16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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