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2007/2007년 08월 :
2007/08/16 20:03
2002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달라이라마를 초청하고자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약 30분 남짓 달라이라마와 방문자들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나는 영어라면 입도 뻥긋 못하고, 아주 조금도 들리지 않는 거의 귀머거리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달라이라마의 말 중 아주 또렷하게 여러 번에 걸쳐 들리는 영어단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아임 해피!’, ‘나는 행복하다’라는 말이었다. 그는 이 ‘해피’라는 단어를 늘 달고 다니는 분 같았다. 나라를 잃고 세계의 이곳저곳을 떠도는 한 노인이 어찌 그리 행복하다는 것인지, 아니 ‘나라 잃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민족 지도자로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고 또 행복한 것이 옳은 일인지’ 이런저런 상념이 많았다.
그 일이 있고난 후 우리나라에도 달라이라마와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책들을 몇 권 읽고 나서는 그는 정말로 행복을 알고, 늘 행복하며,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불안은 존재 자체로부터 생기는 근원적 고통
달라이라마에 의하면,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는 불안의 씨앗들은 세상의 들풀과 같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불안감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스트레스의 주된 원인이다. 물질적 욕망을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불안은 더욱 증폭되고 그대로 두면 제동장치를 잃게 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는 사회적 흐름에 쫓아가지 못하는 듯 여겨질 때 불안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집을 장만하기 위해 눈에 심지를 켜는 사회가 되면 집이 없는 사람, 집을 구할 도리가 없는 사람은 불안감을 느낀다. 주가 2000시대에 주변에서 주식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안스럽다. 아이들을 학원과 해외 영어연수 혹은 해외 유학을 보내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세대의 삶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집도 여러 채 있고, 주식투자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아이들 교육에 마구 돈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들은 불안에서 벗어나 행복할까? 내가 그런 부자의 삶에서 천리나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어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원리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불안의 ‘뿌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불안의 뿌리는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근원적인 괴로움이다. 존재를 유지해야 한다고 인식할 때에 불안은 그에 수반되어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불안은 우리가, 나아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여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망각하는데서 나오는 ‘무지의 병’이다.
우리가 생각을 바꿔 이 불안의 뿌리에 물대기를 중지한다면 불안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이다. 그 방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호의존성을 깊이 자각하고 선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키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관성에서 벗어나는 삶
나는 올해 41세, 그러니까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만40세가 되었으니 생애전환주기로서 각종 성인병 진단을 꼭 받으라는 ‘육체적 경고장’을 받은 나이다. 70중반의 노모를 모시고 13세, 7세, 3세의 아이를 돌보며, 서울 외곽의 시골스런 마을에 오래된 농가주택을 개조한 값싼 전세방에서 살고 있다. 물론 시민사회활동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월급은 넉넉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시민사회활동가 41세면 말 그대로 ‘생애전환’은 아니더라도 후배들을 위해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나가야 할 ‘활동의 전환적 연령’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불안하고도 불안하다.
그러나 여성단체 활동을 하는 아내와 서로 벗과 같이 지내며, 늙으신 어머님이 힘은 드시지만 세 살 난 손자를 너무도 사랑하여 돌보아 주시고 스스로도 보람과 기쁨을 느끼시고, 아이들은 마을 또래들과 주변의 울창한 숲과 개울을 쏘다니며 혼자서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50평 남짓의 텃밭에는 당장 따 먹을 수 있는 새콤달콤한 방울토마토와 고구마, 고추, 상추가 자라니 행복하다 할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어렵게 고향의 논밭을 지키고 있는 동생과 처남, 누님들이 현금이 없어 어려워 할 때에 변통해 줄 수 있는 500만 원짜리 마이너스통장이 나와 아내에게 모두 있어 형제로서의 도리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으니 남들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올해부터는 온 가족이 각자 하루 100원씩 저금을 해서 큰아이 초등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로 해서 온가족이 서로 ‘100원 넣어야지!’ 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그것으로나마 어려운 이웃에 대한 시민된 도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또한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가 있다. 불안이 자라나지 않게 하고 행복이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절망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마음가짐, 우리 사회의 일반적이고 관성적인 삶에 편입되는 길 이외에도 새로운 길이 있을 수 있다는 도전의식이 없고서는 ‘소극적이고 자조적인 삶’으로 떨어질 개연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이들이 용기를 얻게 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 모두의 책무이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용기’를 보여주고, 선의의 경쟁을 통한 ‘최고의 아름다운 승리자’가 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책임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런데 그때 나는 달라이라마의 말 중 아주 또렷하게 여러 번에 걸쳐 들리는 영어단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아임 해피!’, ‘나는 행복하다’라는 말이었다. 그는 이 ‘해피’라는 단어를 늘 달고 다니는 분 같았다. 나라를 잃고 세계의 이곳저곳을 떠도는 한 노인이 어찌 그리 행복하다는 것인지, 아니 ‘나라 잃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민족 지도자로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고 또 행복한 것이 옳은 일인지’ 이런저런 상념이 많았다.
그 일이 있고난 후 우리나라에도 달라이라마와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책들을 몇 권 읽고 나서는 그는 정말로 행복을 알고, 늘 행복하며,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불안은 존재 자체로부터 생기는 근원적 고통
달라이라마에 의하면,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는 불안의 씨앗들은 세상의 들풀과 같이 무궁무진하게 많다. 불안감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스트레스의 주된 원인이다. 물질적 욕망을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불안은 더욱 증폭되고 그대로 두면 제동장치를 잃게 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는 사회적 흐름에 쫓아가지 못하는 듯 여겨질 때 불안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집을 장만하기 위해 눈에 심지를 켜는 사회가 되면 집이 없는 사람, 집을 구할 도리가 없는 사람은 불안감을 느낀다. 주가 2000시대에 주변에서 주식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불안스럽다. 아이들을 학원과 해외 영어연수 혹은 해외 유학을 보내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세대의 삶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집도 여러 채 있고, 주식투자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아이들 교육에 마구 돈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들은 불안에서 벗어나 행복할까? 내가 그런 부자의 삶에서 천리나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어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원리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불안의 ‘뿌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불안의 뿌리는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근원적인 괴로움이다. 존재를 유지해야 한다고 인식할 때에 불안은 그에 수반되어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불안은 우리가, 나아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여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망각하는데서 나오는 ‘무지의 병’이다.
우리가 생각을 바꿔 이 불안의 뿌리에 물대기를 중지한다면 불안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이다. 그 방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상호의존성을 깊이 자각하고 선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키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관성에서 벗어나는 삶
나는 올해 41세, 그러니까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만40세가 되었으니 생애전환주기로서 각종 성인병 진단을 꼭 받으라는 ‘육체적 경고장’을 받은 나이다. 70중반의 노모를 모시고 13세, 7세, 3세의 아이를 돌보며, 서울 외곽의 시골스런 마을에 오래된 농가주택을 개조한 값싼 전세방에서 살고 있다. 물론 시민사회활동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월급은 넉넉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시민사회활동가 41세면 말 그대로 ‘생애전환’은 아니더라도 후배들을 위해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나가야 할 ‘활동의 전환적 연령’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불안하고도 불안하다.
그러나 여성단체 활동을 하는 아내와 서로 벗과 같이 지내며, 늙으신 어머님이 힘은 드시지만 세 살 난 손자를 너무도 사랑하여 돌보아 주시고 스스로도 보람과 기쁨을 느끼시고, 아이들은 마을 또래들과 주변의 울창한 숲과 개울을 쏘다니며 혼자서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고, 50평 남짓의 텃밭에는 당장 따 먹을 수 있는 새콤달콤한 방울토마토와 고구마, 고추, 상추가 자라니 행복하다 할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어렵게 고향의 논밭을 지키고 있는 동생과 처남, 누님들이 현금이 없어 어려워 할 때에 변통해 줄 수 있는 500만 원짜리 마이너스통장이 나와 아내에게 모두 있어 형제로서의 도리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으니 남들보다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올해부터는 온 가족이 각자 하루 100원씩 저금을 해서 큰아이 초등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로 해서 온가족이 서로 ‘100원 넣어야지!’ 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그것으로나마 어려운 이웃에 대한 시민된 도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또한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가 있다. 불안이 자라나지 않게 하고 행복이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절망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마음가짐, 우리 사회의 일반적이고 관성적인 삶에 편입되는 길 이외에도 새로운 길이 있을 수 있다는 도전의식이 없고서는 ‘소극적이고 자조적인 삶’으로 떨어질 개연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이들이 용기를 얻게 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 모두의 책무이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용기’를 보여주고, 선의의 경쟁을 통한 ‘최고의 아름다운 승리자’가 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책임 중의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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