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da Out of Afghanistan Now!(캐나다는 당장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라!)”, “Money for Healthcare and Education, Not for War and Occupation!(전쟁과 점령이 아닌 의료와 교육에 우리의 재정을!)”

확성기에서 구호가 터져 나오자 모든 참가자들이 일제히 따라 외치며 시계 반대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30여 명이 채 안 되는 시위 대열엔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에스테반 같은 청소년에서부터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이 너무나 싫어 지금은 밴쿠버의 부두노동자로 일한다는 중년의 애드리안 아저씨, 꾸부정한 허리와 두꺼운 돋보기안경이 올 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를 짐작케 하는 데이비드 할아버지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피켓 시위를 한 다음 삼삼오오 모여 한참동안 이런저런 인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칼칼한 목과 출출한 배를 채우러 근처 샌드위치 가게로 발길을 향하곤 하지요.

제가 캐나다 밴쿠버에서 몸담으며 활동하고 있는 <전쟁과 점령 반대행동(Mobilization Against War and Occupation, 이하 MAWO)의 회원들은 이렇게 매월 한 두 차례씩 다운타운의 모병 센터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월 1회의 정기집회, 서명운동, 포럼, 반전영화제와 힙합 페스티벌 같은 문화행사들로 MAWO 회원들의 수첩은 항상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운동의 기본, 인간애

MAWO는 2001년 말 미영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직후 캐나다 정부가 나토의 일원으로 일찌감치 파병을 결정해 이듬해 1월 처음으로 750명의 지상군 병력을 파병하자 침공과 점령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조직된 단체입니다. 캐나다군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약 2천 5백 여 명의 군인들이 <나토 국제보안지원군(ISAF)>의 주력군으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외국 군대로서는 미군 다음으로 많은 66명의 군인들이 전사했다지요. 그러나 이들이 더욱 가슴아파하고 분노하는 것은 자국 군인 사망자 수보다 수백 배 이상 많은 무고한 아프간 민중들이 죽어가는 현실과 침략과 점령이 시작된 지 6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끝날 줄을 모르는 대다수 아프간 인들이 겪는 고통입니다. 때로는 ‘배신자’, ‘매국노’라는 비아냥거림과 비난을 듣기도 하지만 이들은 국가보다도 가장 우선하는 것은 인간애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런 비난에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 MAWO는 밴쿠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반전단체 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변변한 사무실조차 없습니다. 아니, 사무실 같은 공간이 굳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또한, 활동의 취지에 동감하면 아무런 가입절차 없이 누구나 의사결정에서부터 조직과 활동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조직이기도 하지요.

제가 MAWO를 열린 조직이라고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MAWO 회원들은 고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 노동자, 주부, 성전환자, 할아버지 까지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들 중 아무도 데이비드 할아버지가 나이가 많다고 구닥다리 취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베트남전 때부터 반전운동을 해온 베테랑 활동가인 그를 특별히 ‘모시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에스테반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이도 없습니다. 그냥 똑같이 어울려 토론하고 농담을 주고받고 유인물을 돌리고 피켓을 만듭니다. 반면 배려가 필요한 이들은 아주 세심하게 배려해 줍니다. 일례로, 모임을 시작할 때마다 사회자는 항상 이런 말을 하죠. “여기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모두들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세요. 그리고 성차별,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엔 여러분의 동의를 얻어서 당사자를 모임에서 제외시킬 수 있다는 점도 미리 알려드립니다.” 언어구사 능력만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불평등해 질 수 있는지를 영어권 국가에 와서 뼈저리게 느끼게 된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이나 난민들이 우리와 회의나 모임 할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반성하곤 합니다.

형식이 아닌 진실을 담아

몇 해 전부터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내에서는 기존의 운동권식 집회 문화에 대한 반성과 대안을 고민하는 목소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MAWO의 집회를 보면 사실 형식면에서는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이 연사들이 차례로 나와서 발언하고 구호 외치고 거리행진을 하지요. 하지만, 보통의 시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이른바 운동의 대중화는 매번 새롭고 신선한 프로그램을 고민한다거나 몇 년 전 촛불집회 때 논쟁이 됐던 것처럼 깃발을 드느냐 마느냐, 구호를 외치느냐 마느냐와 같은 형식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는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심지어 거리를 지나다 잠깐 멈춰 서서 지켜보는 이들까지 절대 구경꾼으로 놔두는 법이 없습니다.

집회를 준비하는 회원들이 일일이 찾아가서 인사를 건네고 유인물을 주면서 질문에 답하고 그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입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이들이 다음 집회에 다시 찾아오고, 정기모임에 나오고 하면서 든든한 지지자들이 됩니다. 지금 열심히 활동하는 이들도 그런 과정을 통해 이른바 열성 회원이 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샤킬이라는 친구처럼 약물과 알콜 중독으로 치료를 받다가 MAWO 활동을 시작하면서 약물을 완전히 끊고 열정적인 반전운동가가 된 경우도 있지요.

밤늦게 이 글을 쓰는 오늘도 MAWO의 정기 모임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낮에는 용접공으로, 철강 노동자로, 건설 노동자로, 케이블 수리공으로 일하는 섀넌, 토마스, 마이크, 애런은 역시나 작업복을 입은 그대로 왔더군요. 시에서 운영하는 시설에서 일하는 알리 아저씨는 파업 배지를 달고 나타나 시청 소속 노동자들의 파업 이야기에 열을 올립니다. 요즘 기술훈련을 받는다는 제닌은 전공인 무용보다 용접일이 더 재미있다며 자랑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운동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얼마든지 병행 가능하다는 걸 직접 확인합니다. 이것이 지난 일 년 동안 밴쿠버에 살면서 제가 얻은 가장 소중한 깨달음 중 하나입니다.

최재훈 경계를 넘어 활동가
2007/08/16 00:00 2007/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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