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막바지 장맛비가 시원스럽게 내린다. 때를 놓쳐 푹 젖은 앞섶을 서둘러 헤치고 젖 물린 어머니처럼 빗줄기는 산천초목을 흠뻑 적신다. 주룩주룩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 순간 사나운 폭우로 돌변해 지붕을 요란스럽게 때리기도 한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면 불볕더위가 찾아오겠지. 본격적인 휴가철에 들어가는 것이다. 매인 직장은 없어도 365일 바쁜 나는 누구보다 야심찬 여름휴가 계획을 오래전부터 착착 준비해왔다. 드디어 내일 떠난다. 남국의 섬 제주도로. 어린 두 딸과 함께. 한 달 동안.

부럽다고? 팔자 좋다고? 작년에도 아이들과 한 달 동안 집 떠나 지냈다.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체험과 소중한 추억 한 보따리에 덤으로 생활비까지 남겨가지고 돌아왔다. 그 경험이 올해는 겁도 없이 국내의 해외 제주도에 도전하게 만들었다. 금 숟가락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해보니 별 것 아니었다. 알뜰하게 꾸리니까 돈도 크게 필요치 않았다. 떠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성수기 제주도 장기 체류의 최대 관건은 역시 숙소였다. 하룻밤 방값이 기십만 원에 이르는 호화로운 호텔이나 그림 같은 펜션은 애초부터 ‘그림의 떡’이라 여기고 꿈도 꾸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촐한 민박도 값이 만만치 않았다. 한 철 벌어 한 해를 살아가는 관광지이니 무리도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 못 하지. 공식적인 경로를 버리고 한국 사회 특유의 사적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펜션 며칠 숙박료도 안 되는 금액에 한 달 동안 싱크와 욕실이 딸린 빈 방을 내주는 욕심 없는 집주인을 만났다.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일 있니?

제주를 오가는 교통비도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차 없이 한 달은 도저히 불편해서 안 될 성 싶었다. 비행기로 가서 현지에서 차를 빌릴까?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한 달 생활비를 길바닥에 쏟아 붓게 생겼다. 억울하다. 차를 싣고 배로 가면? 알아보니 그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이면 해결되었다. 이제 짐만 꾸리면 된다. 같이 가자고 별렀던 이웃들은 먼 거리와 긴 부재, 비용 부담 등의 이유로 하나 둘 포기했다. 말 대로 움직이는 나를 대단한 사람, 용감한 사람, 더러는 무모한 사람, 더 나아가 무서운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한여름의 제주도는 날씨가 덥고 불안정해서 여행자에게 최적의 조건은 아닐 것이다. 높은 물가에 허리띠 바짝 졸라야 하니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여행이 될 수도 있다. 때로 세 모녀는 편안한 집과 두고 온 강아지를 그리워하리라. 그래도 낯선 풍경, 새로운 경험이 기다리는 떠남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나만의 소박하고도 특별한 계획을 세워보자. 얽히고설킨 일상을 도마뱀 꼬리 자르듯 과감하게 자르고 떠나보자. 앞만 보고 내달리지 말고 쉬엄쉬엄 가자. 채우지만 말고 비우기도 하자.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우리, 가끔은 그런 여유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고진하 (참여사회 편집위원)
2007/08/16 21:18 2007/08/1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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