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채우려 쉼없이 달리는 뜨거운 지식인
다가오는 9월 10일은 참여연대가 태어난 지 열세 돌이 되는 날이다. 올해는 특히 서울 통인동 새 보금자리에서 창립의 초지를 새길 예정이라 더욱 뜻 깊다. 회원들의 힘으로 <시민의 집>을 지은 것이 참여연대가 그동안 걸어온 길의 한 매듭이라면, 참여연대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새로운 10년을 향한 참여연대 5대 비전’은 새로운 여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대 비전의 알짬은 아무래도 ‘사회경제개혁운동을 권력감시운동에 버금가는 중심사업으로 전개’하겠다는 것일 터이다. 이는 참여연대 운동이 ‘개혁의 제도화와 법치의 정착에 기여’하는 등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극심해지는 빈부 격차 등 사회경제적 권리의 실현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에 따른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참여연대는 사회경제개혁운동의 확대·강화라는 비전을 보고서에만 가둬 두지 않았다. 2005년 노동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한 이래 2006년 노동사회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거쳐 올해 정식으로 노동사회위원회를 출범시키며 차곡차곡 실현해 온 것이다. 노동사회위원회는 우리 사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미조직 취약 노동자의 인권 보호,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 노동양극화 극복을 주요 과제로 삼아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참여연대 10년에 대한 성찰이 탄생시킨 조직이란 점에서 보면 참여연대 제2기 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창립 13주년을 앞둔 어느 날, <박영선이 만난 사람>에 노동사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를 초대한 이유이다.

인터뷰 약속을 잡은 후, 그에 대해 미리 염탐(?)을 했다. 연구부터 사회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열심히 하고, 잘 한다는 중평. 아니 이구동성이다. 평소 ‘3무(무력, 무의, 무능)’의 자괴감에 시달리는 나는 솔직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하고, 행여 만나게 되면 냉소로 일관한다. 하지만 인터뷰가 걸려있다. 대략난감이지만 어쩌랴. 냉소 모드를 경청 모드로 급전환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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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쑥한 샐러리맨, 해 지면 치열한 사회운동가로 변신

그는 조직의 실체가 안개같이 베일에 쌓여있다는 의미로 경찰이 이름 붙였다는 이른바 무림 사건으로 강제징집을 당했던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군대에 끌려갔다 온 후에도 그의 진로는 오직 하나였다. 그러나 그 길을 갈 수 없었다. “저 역시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과 뜻을 함께 하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집안의 맏이이다 보니 어려운 집안 형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버님이 공무원이셨는데, 80년에 강제해직당하시고 퇴직금으로 새로운 일을 하시다가 여의치 않아 빚이 많이 생겼거든요. 고민 끝에 집안부터 챙겨야 된다고 결론을 내렸지요.”

그래서 취직한 곳이 IBM. 여기서 보낸 7년 넘는 시간이 마냥 부질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관리법, 회의진행법 등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지식과 경험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시절이 개인적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운동 현장에서 전업으로 뛰는 친구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 성남 열린터 야학, IBM노조 설립, 외자기업노조협의회 건설 등의 활동을 쉬지 않고 했다. 야학 교사였을 때의 생활을 잠깐 엿보자. 아침 일찍 정장을 차려입고 여의도로 출근한다. 업무를 마치고 시흥의 집으로 서둘러 퇴근을 한다. 양복을 벗어버리고 라면이나 빵으로 저녁을 때운 뒤 바로 야학으로 향한다. 배차간격이 한 시간이었던 버스를 타고 성남에 도착하면 아무리 서둘러도 1교시 중간 쯤. 다시 열한시 넘어 귀가. 이런 생활을 2년쯤 했다. 안타까운 것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쪼개고 쪼개며 열심히 살았지만, ‘펌프질’만 하고 현장에서 함께 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중요한 때 직장에 묶여 있다는 강박 때문일까. 그는 끊임없이 일을 벌였다. 사회과학 출판사도 그 중의 하나. 어렵게 종자돈을 모아 출판사를 차리기로 했는데 누군가 준비 기간 동안 돈을 까먹지 않을 요량으로 만홧가게를 하자고 제안했던 모양이다. 시간도 벌고, 돈도 벌 수 있는, 일석이조의 아이디어였지만, 결국 돈만 까먹고 말았다. 모두들 ‘출판 기획 회의는 아주 잠깐만 하고, 만화만 본’ 결과였다고 한다. 내가 가끔 찾는 만화방 주인도 손님보다 만화를 더 열심히 보던데, 잠깐 그 곳의 미래가 스쳐 지나간다.

더는 무리다 한계 느껴 등 돌려나올 때 시렸다

그의 삶은 대학에 다니며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직장에 다니며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던 시절, 유학 시절, 귀국 후부터 현재까지의 시간 이렇게 네 토막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가운데 직장생활을 했던 시간을 가장 비중 있게 들려주었다. IBM의 노조 설립 얘기만 하더라도 꽤 구구절절했다. 회사에서 소모임을 만들어 독서토론을 하고 노동법을 공부했던 일, 노조 설립투쟁 당시 성탄 전야에 혈서를 쓴 일, 최초로 시도한 차량 시위 덕에 난지도에 쓸려 들어간 일, 조합원들을 위해 어렵게 유명가수를 초청했는데 열 명 남짓한 사람들만이 모이자 가수가 무대를 내려갔던 일 모두 그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긴 하지만 7년 반 동안 마음이 편치는 않았어요. 그 때가 84년부터 91년이잖아요. 같이 운동했던 선배 동기 후배들이 현장에서 잡혀 들어가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직장에 안주하듯 지낸다는 것이…….”

그의 마음속엔 성남에서 했던 야학이 6월 항쟁이나 민주노조운동의 산파 역할을 한 것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형, 아우하고 지냈던 노동자들과 승리와 패배를 함께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더 진하게 새겨져 있다. 6개월간의 투쟁 끝에 노조 설립을 인정받고 전국의 투쟁 현장을 돌아다니며 외자기업노조협의회 결성을 이루어냈을 때도 승리감보다는 조직의 융성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앞섰다.

“직장생활이 중심이다 보니 아쉬움 같은 게 있어요. 단적으로 성남에 있던 동생들에겐 내가 큰 형이고 따르던 동생들이 많았는데, 내가 그만두면서 뭐라고 이야긴 할 순 없지 등 돌리고 갈 때 등이 시렸어요.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 한계를 많이 느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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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소리 담는 그릇, 신문고 노릇할 터

그는 유난히 현장성을 강조한다.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 함께 일하는 활동가, 함께 연구하는 동료들은 한결같이 현장성에 대한 강조를 그의 정체성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은 참여연대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어진다.

“일이 되게 하려면 뱀같이 냉정한 사고로 전략과 수단을 짜는 게 필요하단 생각이에요. 이런 점에서 참여연대 활동에 90% 만족하지만, 현장의 뿌리가 없다는 느낌이 있어요. KTX투쟁같은 경우도 책을 통해서가 아니고 현장이 얼마나 직접 망가지는지 확인해야 해요. 그래야 우리 운동이 구체화되고 단단해져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성찰과 반성을 반복하며 진보를 이뤄나가는 태도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노동사회위원회가 자리가 잡히면 현장의 문제점을 끌어 모으고 담을 수 있는 그릇, 신문고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머리만 있는 활동기구로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랜드만 하더라도 기자회견 하기 급급하지, 그 사람들하고 같이 하지는 못하잖아요. 노동문제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요.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진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울림을 주고, 울림을 거두는 것까지 해야 해요.”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데 단련되어 있다는 말처럼 지금도 그는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위원장 외에 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나태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삼스레 ‘노동사회위원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다음 안식년까진 열심히 살아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아마도 ‘뜨거운 지식인’으로서 계속 살아가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그 다짐의 힘이 ‘3무’에 시달리는 나 같은 이에게도 전해져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박영선
2007/09/01 00:00 2007/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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