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받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마라토너

이경휴 참여연대 회원 mairim@hanmail.net

봄기운 물씬한 저녁이었다. 젖살 오른 목련꽃망울이 금세라도 하얀 속살을 드러낼 듯하다. 기후마저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속도를 내는 탓인지 예전처럼 봄을 기다리던 설렘조차 없는 봄날이다. 기다림이 증발된 시간 속에 살면서도 기다림의 끈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자유와 평등·사회적인 안전망이 구비된 세상을, 천박한 자본주의가 하루 속히 사라지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 허필두(43세) 회원이다. 자칭 ‘이 땅의 응달의 한 부분’인 지방세를 담당하는 하위직 공무원이라고 카페에 자신을 올려놓았지만, 전혀 공무원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 사람이다.

짙은 감색 톤 차림의 정장이 사색에 젖어있는 눈빛을 더욱 농밀케 하는 분위기였다. 건네주는 보랏빛 명함을 조심스럽게 받는 순간 절로 시선이 다시 갔다. 명함 상단을 장식하는 라틴어가 궁금했다. ‘너의 갈 길을 가라, 남들이 뭐라 하든지 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 독일어판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라 한다. 단박에 그의 정체성이 드러났다면 지나친 선입견일까. 이름 아래에는 하는 일, 관심사 넷이 나란히 적혀있었다. 카페 운영하기/ 책 사 모으기와 빌려주기/ 돈 되지 않는 일에 관심 갖기/ 馬拉松(ma la song), 그 아래 연락처가 있고 제일 아래에는 ‘명함을 받는 이와 만난 날, 장소를 적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닉네임마저 아나키스트라니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이라 짐작되었다.

한 번에 10명의 회원을 몰아온 통인(通人)의 달인

99년 회원 가입을 했고, 04년에는 회원모임인 산사랑 회원으로 카페를 통하여 부지런히 참여연대와 소통하고 있다. 회원 가입 후 직장 동료들을 꾸준히 회원으로 가입시켜 주변을 놀라게 했고, 이번 총회 참석하고는 단번에 10명의 회원을 몰아(?)와서 또다시 상근자들을 활기차게 했다. ‘회원 확대만이 살길’이라는 퍼포먼스가 그를 ‘通人’하게 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공무원 사회에서 참여연대 회원이 되라고 권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특별한 건 없어요. 평소 참여연대에 대한 인지도도 높고 가장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들 있죠. 그런 사람들에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면 쉽게 소통이 되더라고요.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인들에겐 진심으로 이야기하면 귀를 기울이죠. 비록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라도 인간적인 신뢰로 가입해주고…. 사회는 다양하잖아요. 그런데 개중에는 말과 글로 그럴싸하게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막상 후원금 이야기가 나오면 꼬리를 내리더라고요. 지식인의 위선과 기만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공무원? 조직에 사장이 없는데 눈치 볼 게 뭐 있어요? 소신껏 일하면 되고, 저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밥벌이 수단으로 생각해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공직자는 ‘머슴’이라서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닦달하는 세태인데 이런 소신 있는 머슴이 있나 싶어 순간 당황했다. 우문현답이라 서로 멋쩍어 웃었고 그 웃음 끝에 건강한 혈색이 얼핏얼핏 돋보였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관심사 중 하나인 마라톤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풀코스 완주 열 번에, ‘마라톤을 넘어서’라는 울트라 마라톤까지 완주한 이력을 지녔으니 오죽하랴.

‘자기 성찰의 운동이며 지식 중산층에서 주로 한다’는 마라톤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에 공감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예상을 빗나간 답변이 나올까 싶어 긴장했는데 수줍은 소년 같은 표정으로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서 춘천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감수성 예민한 시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어 참으로 좋았어요. 그런데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을 들여다보니, 남들에 비해 고집도 세고 자의식이 강하여 공동체의 조직문화에 길들여지지 않는 단체생활 장애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독립적으로 마라톤을 시작했지요. 이 세상 또한 너무 따분하고 밋밋하니 달리고 싶기도 했고. 마라톤 참 이기적인 운동이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억압받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달린다. 소수자 존중·억압철폐,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는 그날까지’ 등의 내용을 배너로 달고. 다수와 멀어지면서 시작한 마라톤이 ‘한 아나키스트의 세상살이’라는 카페를 통하여 다수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그는 흔히 무정부주의자로 칭하는 아나키스트에 대한 호칭을 단호하게 지적했다. 일본 번역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며 원래 아나키스트는 자율과 자치·자유를 기치로 억압받지 않는 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한 완전한 채식주의자

그는 일반적인 통념을 여지없이 깨뜨린 마라토너이다. 완전한 채식주의자- 꿀, 우유, 계란까지 먹지 않는 생활이 일 년이 훨씬 넘었다. 그런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어떻게 울트라마라톤까지 완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채식을 하는 사람은 소수자, 우리 인구의 1%도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이들은 정치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하고 싸워야 하니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달라지더군요. 몇 해 전부터 건강·환경·자연주의에 관한 책을 읽다보니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혈색도 좋아지고…. 울트라마라톤 참가 동기는 사뭇 비장했어요. 육류업자나 일부 의사들에 의해 조작된 듯한 신화에 도전 해보고 싶었죠. 운동생리학에서는 시합을 열흘 정도 앞두고는 고단백 음식 섭취를 권장하지만 과연 그 이론이 절대적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고, 어쨌든 달렸죠.”

결과는 한판 승이었다. 1파운드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16파운드의 곡물이 필요하고, 미국, 일본의 육류자본가를 위해 열대우림이 파괴되며, 자국민은 굶어죽는데 선진국에 곡물을 수출 해야하는 제3세계 국가가 있다는 이러한 잘못된 경제구조를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인터뷰 내내 정신은 번쩍번쩍 들었지만 우울했다.

창밖엔 어둠이 서성거리고 채식에 대한 성찬은 끝없이 쏟아졌다. 분명 오늘 저녁은 덩달아 채식주의자가 될 사람이 몇 있을 것 같다.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주변의 채식전문 식당을 클릭하며, ‘감초질문’을 했다. 참여연대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해달라고.

그는 진정성이 엿보이는 역설의 변을 담담히 피력했다.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재벌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민단체가 참여연대라고 합니다. 그만큼 참여연대의 감시가 철저하기에 재벌들이 껄끄러워하죠. 사회가 투명하다면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왜 필요합니까? 참여연대가 할 일이 많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병이 깊다는 거죠. 삼성같이 부도덕한 기업이나 김앤장 같은 우리 사회의 악질적인 집단은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하는데…. 아직은 우리가 할 일이 많은 게 문제지요.”

과연 억압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회를 꿈꾼다는 사람다운 발상이다. 그러면서도 자잘한 부분은 놓치지 않는 섬세함도 한몫을 한다.

“회원 가입을 더 많이 시켜서 재정도 탄탄하게 하고, 삼성 관련 집회에도 적극 나서서 상근자들에게 힘도 되어주고, 함께 가야지요. 비판보다는 도울 일이 더 많지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시장기가 동한 지 제법 되었지만 뱃속은 그득하다. 그래도 오늘 한 끼는 지구력도 좋고 피로 회복이 빠르다는 채식주의자가 되어보자고 모두 활짝 웃는다. 앞서 가는 그의 어깨 위로 도심의 봄기운이 사뿐히 따라가고 있었다.

2008/04/02 21:14 2008/04/0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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