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맛과 멋 아는 한문선생



- 백금렬 회원

이경휴 참여연대 회원 mairim@hanmail.net

이른 아침, 빛고을 광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은 간밤에 내린 첫 눈으로 은색 도시이다. 늘 서울을 벗어나는 일은 가슴을 설레게 했는데 오늘 하루는 머물고 싶다는 충동이 순간 일었다. 그러나 어쩌랴. 심성이 눈보다 더 희고(白), 금빛보다 더 반짝이며(金), 우리문화를 불사르며(烈) 단근질하는 백금렬(35세) 회원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도심의 설경은 찰나의 유혹에 불과했다.

남녘땅의 햇살은 도탑고 눈부셨다. 대신 바람이 실없이 불어대며 도시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허풍떠는 바람 끝에는 단내가 배어있었고 그 단내가 지역문화를 꽃피우는 향기임을, 전남 광주 월계중학교 한문 교사 백금렬 회원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깨달았다.

단박에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과 문화를 자양분으로 하는 고향에서 능력과 재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가 있고, 지음객(知音客)들이 진을 치고 있고, 자신의 뜻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일산의 한 고등학교에 근무하다 고향으로 내려 왔다. 낙향의 즐거움을 한마디 해달라고 하자 입이 먼저 귀에 걸린다.

“우게서는(위에서는) 말을 편하게 할 수가 없었죠. 여기선 그런 부분이 없어요. 학생들에겐 친구 같은 선생이 되려고 했는데, 선생 같은 친구가 되어버렸어요. 애들한테서 배우는 게 참 많아요.”

전교조 조합원이 절반을 훨씬 넘는다는 월계중학교는 학생과 교사의 벽이 없는 곳 같았다. 점심시간, 교사나 학생이 함께 줄을 서서 배식 받고 같이 앉아서 밥을 먹는 모습은 서울에선 보기 힘든 장면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쓰레기 분리수거를 선생님도 함께 한다고 하니 ‘다닐만한 학교’임에 틀림없다.

영어가 국어 자리를 넘본 지 오래이고, 더우기 한문이 ‘기타 과목’으로 전락한 마당에 수업은 어떻게 진행하며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지 궁금했다.

“대한민국, 부모님 성함, 자신의 이름쓰기는 주관식으로 시험에 낸다고 늘 이야기 하죠. 그 정도는 한자로 쓸 줄 알아야하는데 잘 몰라요. 뜻이 있는 글자이니 알면 알수록 깊이가 있는데 애들은 어려운가 봐요. 그래도 저는 ‘이오덕 선생님 파’라서 학생들에게 되도록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도록 권장해요. 갈수록 우리말의 맛과 멋을 알기 어렵잖아요.”

한문선생님으로서 갖는 고정관념이 완전 깨어졌다. 아차, 기존의 제도와 구조를 깨기 위하여 혼신을 다하는 선생님 앞에 내 부질없는 사고의 틀이 노출되다니, 부끄러웠다. 서둘러 국가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교육문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직 계급이동이 활발한 우리사회에서 학력은 계층 상승의 가장 쉬운 경로가 아닌가. 더구나 낙오자에겐 아무런 사회 안전망조차 없으니 불안감이 학력경쟁에 치닫고 있는 세태이다. 현장에 있으니 그도 할 말이 오죽 많으랴만 절제된 언어로 정곡을 찔렀다.

“교단이 바뀌어야하는데 그게 쉬운 일입니까? 구조적으로 해바라기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제도지요. 전교조출신도 부장까지는 승진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려워요. 자연히 조합에서 탈퇴해야 점수제에 유리한데 그것 신경 안 쓰는 사람들만 남아있죠. 그래도 끊임없는 투쟁으로 시범학교를 만들었고, 교장응모제가 신선하게 선 보인 것만으로도 큰 성과이죠.”

설핏 서운한 기색은 엿보였지만 표정만은 교복 입은 악동의 모습이다. 교육현장의 문제점에 대한 담론이 끝없이 이어지자 마치 교육신문 인터뷰 같다며 웃음으로 방점을 찍었다.

골덴 상의에 달려있는 배지로 눈이 가자 멋쩍은 듯 또 웃음을 흘렸다. 그는 98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을 선두로 몇 개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8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시켰고, 녹색연합, 민언련, 인권운동사랑방 등 20여 개 가까운 시민단체를 후원하고, 그 단체의 배지와 회원가입서를 가지고 다닌다. 축의금 대신 질(?)좋은 책의 정기구독권을 선물한다. 한 마디로 걸어 다니는 시민운동 홍보가인 셈이다. 그 열정의 시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배지는 며칠 후 지역에서 환경운동행사가 있을 거라서 찾아서 달았죠. 2-3년 째 회원가입도 답보상태라 고민이죠. 그래도 내가 할 일을 시민단체에서 대신해주니 얼마나 고마워요. ‘삼성문제’만 하더라도 누가 감히 흔들겠어요? ‘권력’조차 삼성의 관리대상이 된 마당에 깨끗한 정치가 될 리 있겠어요? 국민들을 탐욕만 키우게 하지. 예전엔 국민소득 5천 불만 되면 행복할 줄 알았죠. 그런데 만 불, 2만 불이 돼서 행복할까요? 경제를 살리는 것만으로 행복하겠어요? 탐욕만 키우는 지도자를 어찌 선택하겠어요.”

탐욕-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게걸스러운 환상을 ‘이익’ ‘이윤’이라는 공명정대한 이름으로 포장해 버린 사회의 동력. 그것을 사(邪)용하는 집단과 여과 없이 부풀리는 언론. 과연 국민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함께 숙연한 분위기였다.

“생각 없이 하는 말들이 우리 의식을 지배해버리지요.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명제 대신 ‘공사판이냐 보존이냐’ 로 바꿔야 해요. 어디 그게 개발이에요. 게걸스런 탐욕이지. 수업시간에도 의미 있는 한자풀이로 애들을 즐겁게 하죠. ‘조지부시’-새 조(鳥),지혜 지(智),아닐 부(否),옳을 시(是), 새 대가리라 옳지 않은 짓만 한다, ‘고이주미’-괴로울 고(苦),귀 이(耳),주인 주(主),아름다울 미(美), 망언으로 이웃나라 사람의 귀를 괴롭히고 미국을 주인으로 섬긴다. 애들에게 따로 역사의식을 심을 필요가 없어요.”

참교육이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님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 외에도 상업주의에 물든 발렌타인데이를 한자식으로 풀이하며 우리의 칠월칠석을 환기시키는 저력. 그의 학생이 되어 교실에 앉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마침 수업시작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자 한결 강하게 마음이 동했다. 자리가 파함이 아쉬워 대신 송년의 밤 행사에서 다시 뵙기를 청하자 고개를 살짝 저으며 양해를 구했다.

“주중에는 학교 수업 때문에 어렵고 일요일엔 지역 MBC의 국악프로그램 진행을 맡아서 자리를 뜨기가 어렵습니다. 통인동 보금자리에 꼭 한번 가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지난 11월 범국민대회에 참석했다가 한번 들리는 거였는데 아쉬워요.”

서울을 홀연히 뜰 수는 있었지만 광주는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 모양이다. 주말엔 방송을 위해 야외촬영도 해야 하고, 월간 <전라도 닷컴>의 어려운 경영 사정도 뜻있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각종 지역행사에 참석하며 힘을 보태는 일상으론 무리였다.

운동장 한켠에 서있는 복자기나무가 바람에 춤을 춘다. 곱게 물든 잎새들이 흡사 사춘기 소녀들의 웃음소리 같았다. 아니, 백금렬 회원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2008/04/04 20:03 2008/04/0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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