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_먼 나라 티베트, 우리에게 다가오다
분류없음 :
2008/06/02 21:17
먼 나라 티베트, 우리에게 다가오다
박장배 서강대 사학과(중국근현대사, 티베트사) 강사 plantinoid@hanmail.net
한국어로 된 책들 중에서 티베트 역사와 문화를 개관해 볼 수 있는 책을 몇 권 선정해 본다면, R.A.슈타인의 『티벳의 문화』, 토머스 레어드의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김한규의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티베트 학자였던 슈타인이 쓴 『티벳의 문화』는 불교문화 이상의 것인 티베트 문명의 여러 측면을 개관하고 있다. 인도문화와의 관련성과 중원 쪽과의 관련성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토머스 레어드의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는 티베트인과 달라이 라마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인터뷰 형식으로 달라이 라마의 역사인식을 꼼꼼히 확인했다는 점에서 참고의 가치가 있다.
역사공동체, 중국과 티베트
김한규의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는 ‘역사공동체’라는 분석 단위를 설정하고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규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중화인민공화국 시기부터 시작하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 방식으로, 티베트가 주변 역사공동체와는 구별되는 별개의 역사공동체임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1950년 이전과 이후로 티베트 역사는 역사적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다른 대상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티베트 인식에도 전체를 통찰하는 관점과 함께 자기 성찰적 관점이 긴요하다고 하겠다. 이 중 중국측의 입장을 담고 있는 책은 없지만, 김한규의 『티베트와 중국 - 그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이해』를 통해 중국측의 기본적인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토번(티베트)이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7세기 전반기 티베트 고원을 통일한 쏭짼감뽀(617?~649? 재위) 시대부터였다. 중국측은 이 시기에 쏭짼감뽀에게 시집 온 문성공주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250년 동안 토번과 당은 대등한 인접국이었다. 중국 관변의 공식 입장은 13세기 중엽 이래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티베트는 1720년 청 제국에 정복되어 청 제국에 통합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티베트는 자립성을 강화했고, 1912년 어간에 티베트 중심지역(즉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 지역)은 사실상의 독립을 달성하고, 나머지 지역은 대개 중국계 군벌의 지배하에 있었다. 1951년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을 중국측은 티베트 해방이라고 규정한다. 달라이 라마 정부를 포용하던 1950년대에는 중국이 티베트를 제국주의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하고, 1959년 라싸 봉기 이후에는 5:95 사회, 즉 소수의 귀족이 다수의 농노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농노를 해방시켰다고 인식한다. 티베트 망명자쪽의 입장과 중국의 공식 입장은 서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티베트의 지리적 범위도 달라서 티베트 망명자측은 25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티베트 고원 전체를 일컫지만, 중국측의 경우 티베트(시짱)는 120만 제곱킬로미터의 티베트 자치구를 지칭한다.
화이사상에 입각한 조선왕조 시기의 티베트 이해
사실 한국 사회에서도 시대와 관점에 따라 티베트를 보는 입장은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전통시대의 한국인에게 티베트는 먼 곳이었다. 현재 역사적인 사실로 확인되는 한국과 티베트 접촉의 최초 기록은 역시 당대의 기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나라 초기에 9명의 신라 승려가 서역으로 구법을 하러 떠났는데, 그 중 5명의 승려가 육로로 티베트를 거쳐서 인도에 갔다. 서역으로 가는 구법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었다. 도중에 티베트 경내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고, 구법승들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티베트를 깊이 읽기 위한 작업은 먼저 『열하일기』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열하일기』의 「겔룩파 문답(黃敎問答)」에서 황제가 장성 밖의 쓸쓸한 벽지인 열하, 즉 청더(承德)에 머무는 것은 피서(避暑)가 아니라 “천자 자신이 변방을 방어하고 있는 것(天子身自備邊)”이라고 했다. 박지원은 열하에 가서 ‘천하 형세(天下之勢)’를 보았다. 전통시대에 연암만큼 청의 제국 체제를 꿰뚫어보아 티베트의 위상을 확인하고 티베트에 대한 나름의 기록을 그렇게 자세하게 남긴 사람은 없었다. 전통시대 티베트에 대한 정보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규경(1788~1860)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도 박지원이 수집한 정보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열하일기』의 「판첸 시말(班禪始末)」·「짜시륀뽀(札什倫布)」·「겔룩빠 문답(黃敎問答)」 등에는 그때까지의 전통시대 한국 역사상 가장 자세한 티베트 정보가 실려 있다. 박지원이 달라이 라마보다는 판첸 라마에 더 주목한 것은 당시에 박지원이 견문한 사람이 판첸 라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하일기』의 계승 작업이면서 새로운 내용도 담겨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서장(西藏) 홍교(紅敎)·황교(黃敎)에 대한 변증설」은 조선 사대부의 티베트 인식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에 대한 지식의 확대는 문답과 변증이라는 방법으로 해외정보를 파악하고자 했던 실학자들의 노력도 한몫 했다.
티베트 문화의 노른자위가 불교문화라고 한다면, 불교문화에 큰 관심이 없는 조선의 사대부에게 티베트가 어떤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조선인의 티베트 인식은 조선이 이민족을 상대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거울의 하나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티베트는 독특한 불교문화를 가졌다는 점과 이민족 지역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으며, 그 이면에는 원 지배기 경험의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고 보인다. 요컨대 조선시대 식자들의 티베트 인식은 주로 화이론적 패러다임에 입각한 것이었다. 1780년 베이징에 다녀온 박지원은 “화이사상이라는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하되 그 화이사상”을 “신축성”있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론을 보여주고 있다. 박지원은 “천하의 이치를 꿰뚫는 원리”를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의 관심은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었다. 이런 관점은 이규경의 경우에도 그대로 유지되지만, 이단(異端)에 대한 비판은 더욱 거세다. 그것은 당시에 서양세력의 조선 침략 가능성에 우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격동기에 휩쓸린 약소국의 동병상련
조선왕조 500년 동안 드문드문 언급되던 티베트는 한국의 근대시기에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었다. 한국인들이 티베트에 대한 정보에서 소외된 상황은 1920년대에 가서야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1920년대부터 한국 언론에도 드문드문 티베트 소식이 전해지곤 하였다. 그리고 티베트에 대한 인식의 내용은 이전과는 매우 다른 내용의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한국인들이 티베트를 바라보는 눈, 즉 인식 틀이 달라졌다는 것을 말해줄 것이다.
일제하 한국 언론이 다룬 티베트 관계 기사의 가장 큰 특징은 여전히 현지 취재에 따른 기사가 아니라 주로 중국, 일본, 영국 등의 언론이 전하는 소식을 ‘중계방송’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티베트 관계 기사의 많은 수가 중화민국 정부 주변에서 나오는 소식을 인용한 것이었다. 식민지시대의 일부 한국 기자들은 ‘티베트의 처지’에 대한 ‘동병상련’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그러한 인식은 ‘티베트민족 자결론’이 식민주의의 본당인 영국의 ‘배후 책동’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민족자결론’이나 ‘혁명’ 또는 ‘문명개화’ 따위의 근대사상의 세례를 받은 식민지시대의 한국인들도 중국의 지원에 의한 자신의 독립 쟁취라는 자민족의 이익을 티베트와 같은 ‘약소민족’의 해방이라는 이념보다 중요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40년대는 티베트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이 또다시 정체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대는 한국인에게는 어렵고 힘든 격동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티베트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서구와 일본과 중국이 나름대로 티베트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940년대에 티베트를 방문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티베트에서의 7년』을 쓴 오스트리아인 하인리히 하러와 『비경의 라마』를 쓴 일본인 첩보원인 니시가와 카주미(西川一三)일 것이다. 1950년대에는 1950년 중국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주 소식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티베트에 대한 관심이 미약하나마 되살아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55년에 샹그릴라라는 이상향을 묘사한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이 번역되기도 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새로운 정보 축적이 시작된 계기는 1959년 3월의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사건이었다. ‘중공군’에 대항하는 티베트인들의 ‘반공의거’와 ‘티베트의 비극’은 한국의 신문지상에도 자주 등장하였다. 이것은 전에 없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내용의 보도는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에게 단순히 냉전적 시각에 의한 ‘공산침략’ 이미지를 넘어서 또 다른 ‘동병상련’을 느끼게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티베트 이미지 소비와 관심의 증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티베트 인식은 크게 ‘티베트의 비극’이라는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티베트 불교에 대한 관심도 사회 일각에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동서문화사, 1977)이 다시 번역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크게 보아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탈바꿈하는 한국사회의 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70년대 중반 이래 한국의 문학과 사회과학은 제3세계라는 인식틀을 수용하였다면,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의 색채를 띤 현실 도피적 작품도 수입하였다. 이것은 냉전적 시각을 벗어나기 시작한 징조였다.
1980년대의 한국인의 티베트 인식은 『티베트, 人間과 文化』(티베트 문화연구소 엮음, 열화당, 1988) 등의 출판을 계기로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샹그릴라와 같이 우회적으로 티베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의 불교문화와 망명정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까지 나온 티베트 관계 책의 한계는 명확하다. 대부분 한국인의 시각이 아니라 서구인이나 티베트 망명자들의 시각에 입각한 책이었다. 상황은 1980년대 말 이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한국인들이 직접 티베트에 가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학술적인 연구의 분량과 수준은 빠르게 증대되었다고 보기 힘들지만, 일반 문화소비자들의 티베트 이미지 소비는 대량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90년대에는 좀 더 구체적인 맥락에서 티베트의 문화는 한국 소설(장정일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나 박경리의 『토지』11권, 15권 등)과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여 한국 문화의 미세 성분으로 편입되고 있다. 이러한 티베트에 대한 이미지와 티베트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의 심한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균형이 극복되고 있는 징후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1990년대는 티베트 여행기가 출간된 시기였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김호동의 『황하에서 천산까지』(1999)와 박완서의 『모독』(1997)이 주목할 만하다. 『모독』은 한국 사회의 ‘식민지 경험’과 좌우대립 경험, 그리고 경제개발 경험 등이 잘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티베트 인식틀을 잘 보여준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를 발견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자기 자신의 고향을 등에 지고, 한국문화 배경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행기 속에 티베트 문화만큼이나 한국문화가 잘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인들의 손으로 쓰인 기행문의 탄생은 일본보다 80여년이나 늦은 출발이었다.
보다 깊은 이해 확산의 필요성 대두
최근 10년 동안 티베트에 대한 전문연구서도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김한규의 『티베트와 중국 - 그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이해』(2000)와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2003) 등은 한국에서의 티베트 ‘연구’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저작들일 것이다. 김규현의 『티베트 문화산책』(2004)도 티베트 문화에 대한 안내서로서 일독의 가치가 있다. 번역서 중에서 롤프 알프레드 슈타인의 『티벳의 문화』(2004)와 토머스 레어드의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2008) 등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 슈타인의 책에서 서구인들의 티베트 문화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서구인들이 서구문명과 동급(?)으로 인정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현대화를 이룩했다며 서구인들은 티베트 문명에 대해서도 일본과 동급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서구인들의 티베트 인식은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학계의 입장을 담은 연구서는 국내 출판물 중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아 균형 있는 티베트 인식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하겠다. 아무튼 티베트를 깊이 이해하려면 티베트인들의 생각과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쫑카빠가 쓰고 청전이 옮긴 『깨달음에 이르는 길』(2005) 등의 번역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문헌과 문학작품의 번역은 아직 대단히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게싸르 대왕 전기』와 같은 영웅서사시 등은 한국사회에는 아직 충분히 소개된 상황이 아니다.
현대 한국인들이 티베트에 대한 비교적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통시대의 한국인의 ‘무관심’과 비교하면 대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 한국인의 티베트에 대한 인식은 ‘영혼의 고귀함’이며 ‘식민지의 비참함’이라는 현대 한국인의 티베트 인식과는 매우 동떨어진 내용의 것이었다. 현재 한국인의 티베트에 대한 인식은 주로 1959년 이후에 형성된 것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뿌리는 한국인의 일제 식민지 체험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탈냉전과 전통 부활의 시대정신을 포함하는 탈근대 시대의 티베트 인식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 모색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균형 잡힌 티베트 이해를 위해서는 티베트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현대 인식, 서구 사회와 중국 내부 등의 인식을 폭넓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